김근혜 수필가 33

타인앓이/김근혜

슬픈 시로 다가오는 그 남자. 오늘도 어김없이 그 카페에 액자처럼 걸려 있다. 초췌한 몰골, 파란 입술, 근심어린 눈빛은 진이 다 빠져나가 속이 빈 고목 같다. 땅에 닿아야 할 뿌리가 허공에 떠 있다. 중력마저 무력하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낯선 만남을 하고 있다. 붙박이가 된 남자가 궁금해서 나도 자주 찾곤 한다. 우린 무성영화의 주인공이다. 난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잔혹한 도둑, 프로크루스테스다. 그 남자를 내 잣대에 올려놓고 늘이고 줄이고 한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재단하고 자르고, 깁고, 고쳐 쓴다. 그 남자 좌석 옆자리에서 커피를 마신다. 오후 서너 시경의 카페는 한산하다. 무료해서 커피잔에 꽂힌 빨대를 돌린다. 삶의 운전대라도 되는 양 좌회전했다가, 유턴하며 운전 연습을 한다. 그러다 카페..

앙금이 속살거리다/김근혜

팥죽을 만들기 위한 시간은 동백이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팥의 앙다문 입술이 벌어지기까지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하다. 자신이 깨고 나오기까지 호흡조절에 힘쓴다. 그때부터는 동안거다. 참지 못하고 벌컥 화를 내는 순간 팥은 설익고 만다. 붉디붉은 팥은 같은 콩과 식물인데도 콩들과 잘 섞이지 못한다. 콩은 둥글둥글하고 모난 데가 없어서 누구와도 잘 어울린다. 모서리에 베여도 훌훌 털고 쉽게 일어나는 힘을 가졌다. 팥은 야무지면서 단아하고 차가운 느낌이다. 도도한 인상이 거부감을 일으킨다. 너그러운듯하나 속 좁은 여인네 같고, 포용과 배려보다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으로 보인다. 소심한 팥은 세상의 바람과 맞서지 않는다. 지혜롭게 보이지만 그의 속은 앙금으로 까맣다. 돌덩이 같은 팥이 스스로 껍질을 벗고 나올 때까..

김밥, 옷을 벗다/김근혜

칼을 간다. 날카롭게 갈아야 흠집을 내지 않고 단번에 자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의 응어리가 밥알처럼 붙어 나온다. 김밥은 싸는 것보다 잘 쓰는 기술이 필요하다. 사람의 감정도 단번에 잘라버리지 않으면 칼에 묻어 나오는 밥알 같아서 끈적거림이 늘 따라다닌다. 김밥을 싼다. 한 톨 한 톨의 밥알은 하얀 이팝꽃을 뿌려 놓은 것 같다. 햇살에 구운 한 폭의 먹장구름으로 가지런히 누워 있는 맨살들을 덮는다. 낱글자들이 빠져나오지 않게 조심스럽게 돌돌 만다. 긴 드레스 입은 여인들이 은빛 수레 위에 조용히 눕는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입안에서 방긋이 터진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김밥 속 같았다. 쓴소리를 잘하는 우엉인 언니와 조그만 일에도 잘 삐치고 얼굴이 붉어지는 당근인 나, 누가 뭐라고 하든 무던한 시..

Balance/김근혜

​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많은 터널을 만난다. 컴컴한 터널을 빠져나가면 희망의 빛이 어려 가슴이 잔뜩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언덕을 오를 때면 온 힘을 다해 뿌앙하는 기차 경적 소리가 고단한 인생을 넘어가는 부모님 같기도 하다. 기차여행이 아니면 느껴보지 못하는 새로운 경험이다. ​ 추억 속의 터널이 와인을 빚는 저장고가 되었다. 온도와 습도가 일정해서 와인이 발효 숙성되기에는 적당한 곳이라고 한다. 일교차가 심한 인간의 마음 온도와 비교된다. 인간 마음에 높낮이가 있는 것은 온도가 너무 높거나 낮으면 탈이 나게 마련이니 적절하게 조율하면서 살라는 신이 준 숙제인지 모른다. ​ 잠시 카페에 앉아 감 와인을 시켜두고 다리쉼을 한다.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홍시를 무더위에 먹는 얼얼한 맛이 일품이다. 이국땅..

카테고리 없음 2022.02.17

어쩌자고, 이름표/김근혜

생의 서문을 읊는다. 마이크에 기름을 바른 듯 반지르르한 말이 굴러 나온다. 경매사는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마음대로 넘나들며 흥정을 붙인다. 지긋이 묵상하는 구경꾼들 등줄기에 실핏줄이 일어선다. 시간을 추리하려는 사람들의 인기척을 가만가만 듣고 있는 촛대 하나가 마음을 졸이고 있다. 한 해가 가기 전 매출이라도 올리려는 걸까. 경매사의 목소리에 고이는 힘이 만만찮다. 사람들의 잠자던 손가락이 눈을 열고 서성거린다. 물건은 전파탐지기를 매단 고래가 된다. 큰 화면으로 그를 보며 둘째손가락으로 왼쪽을 쉼 없이 클릭, 클릭하는 사람들. 마우스는 설렌다. 여체를 조각한 목각 인형에게도 극적인 장면이 나올까. 새소리마저 죽은 금요일 밤, 경매장의 열기는 뜨겁다. 잠시 쉬고 있는 나에게 DNA가 두드린다. 휴지기..

壬寅열차 /김근혜

인임열차는 1월 1일이라는 역에서 출발합니다. 365일이라는 간이역을 지나 12월 31일이라는 역에 도착합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이 열차를 타고 시간 여행을 하게 됩니다. 열차는 푸른 깃발을 펄럭이며 쉬지 않고 달립니다. 표를 미리 준비한 사람은 일등석에 앉아 편안히 가네요. 표를 사지 못한 사람은 미처 짜 넣지 못한 인생계획표가 어그러지듯 서서 가거나 땅바닥에 주저앉아 갑니다. 삼등석이지만 만족하며 가는 사람도 있고, 일등석이라도 자리가 좁다며 불평하는 이도 있습니다. 일반석에 있는 사람이나 서서 가는 사람들은 부러운 눈길로 일등석을 바라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쉬울 것 하나 없어 보여도 부족한 게 있는지 행복해 보이지가 않네요. 일등석에 앉은 사람들은 가진 것이 많은데도 베풀기보다는 더 ..

근* 글 2018.04.04

푸네기 아리랑- 김근혜

푸네기 아리랑 - 서랍 정리를 하다 통장을 뒤졌다. 남편은 몹시 불안한 듯 보였다. 갑자기 통장을 보여 달라고 하니 슬금슬금 피한다. 이십여 년 동안 살면서 통장을 보자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럴 만도 했다.​ 아주버니는 교통사고로 한쪽 눈을 다쳐서 직장을 잃었다.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술로 나날을 보내다 고향으로 내려갔다. 시동생들은 아주버니가 자리 잡을 동안 생활비를 보태기로 했다. 동생들이 보태주는 것을 처음에는 체면치레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당연히 여겼다. 문중들의 남는 땅을 경작했지만, 경험이 없는 터라 실패를 거듭했다.​ 벼농사만으로는 별 수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듬해에는 동네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수박농사를 지었다. 몇 년 동안은 그럭저럭 수익을 냈다. ​수입이 ..

근* 글 2018.04.04

“아프지, 나도 아프다” -김근혜

“아프지, 나도 아프다” 김근혜 공감능력은 대인관계에서 중요하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자신의 기준으로 보면 타인의 삶이 이해되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에서 판단하고 상대의 처지를 고려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장 과정에서 감정에 관한 관심을 주고받은 경험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속상한 일을 털어놓는 상대에게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속을 뒤집어 놓는 일 또한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내 기준으로 상대를 파악하고 분석해서 판단을 내리려 한다. 상대는 어떤 해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이해해v주길 바랄 뿐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된다. 각자의 경험과 욕구가 다르고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에..

근* 글 2018.04.04

액자를 다시 걸며-김근혜

액자를 다시 걸며 김근혜 액자를 다시 걸었다. 삼십여 년 동안 손길이 타지 않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액자를 골방에서 찾아냈다. 마음을 닦아내듯이 닦고 또 닦았다. 액자 속엔 그녀와 소풍 갔을 때의 모습이 판화처럼 담겨 있다. 중학 시절 단짝이던 친구를 삼십여 년 만에 동창회에서 만났다. 그녀와는 내리 3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 키도 비슷해서 늘 옆자리거나 앞, 뒤로 앉았다. 그녀가 왈가닥이었다면 나는 얌전이였다. 우린 2인용 자전거처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교정을 거닐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는 주로 고등학교 진학 문제라든가 장래 희망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은행원이 꿈이었고 난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교정 소나무 앞에서 손을 꼭 잡고 소원을 빌었다. 어느 눈 내리던 날이었다. ..

근* 글 2018.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