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길에 서다-김근혜

테오리아2 2018. 5. 6.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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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서다

김근혜


  차들이 게걸음이다. 땅을 장사지내는 조문 행렬에 고속도로가 마비다. 불도저는 늙은 땅을 풀어헤쳐 새살을 파느라 여념이 없다. 목덜미를 물린 땅은 하늘을 향해 굉굉 소리를 낸다. 딸려 나온 벚나무가 잇몸을 드러내고 고통을 견디고 있다.
  컬러 사진이 누렇게 바래져도 여전히 가야 할 길은 그대로다. 길을 걸으면서 끝을 찾고 마지막이라 말하면서 허공을 향하는 넝쿨손. 욕망으로 중독된 세상에서 엇길로 가다 발이 빠진다. 아버지의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어린 시절 멀리서 울리던 교회당 종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남들보다 쉽고 편하게 가는 사람들, 지름길로 가지 않아도 빠르게 간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지 않아도 매화는 핀다.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 무엇이 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금수저 인생이다.
  허둥거리고 쫓기며 살아도 주머니 속은 여전히 비어 있다.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이 하루를 산 대가인 사람들, 앞질러가도 봄은 멀다. 급식카드로 편의점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달랑거리는 동전 소리에도 위안을 얻는 결식아동들, 가방 무게에 눌리고 갈아입을 옷 한 벌 없는 삶에 감기를 달고 산다. 홀쭉한 배에 바람만 더 강하게 분다.
  태어날 때부터 가는 길이 달라서 문은 좁고 길도 좁다. 빌고 빌어도 앞가림이 안 되는 흙수저 인생이 세상엔 더 많다. 생존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는 지쳐 있다. 지진은 그때뿐이다. 세상의 뒤안길에서 서서히 잊혀간다. 귀는 큰소리에 더 크게 열리도록 길들어 있는지 모른다. 수없이 봄이 왔다가도 낮은 자들을 위해 등을 두드려 주는 쉼터는 없다. 풍족한 것은 바라지 않지만 초대받지도 못하는 인생이다. 그들의 발뒤꿈치만 높아갈 뿐, 길은 여전히 맵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청년실업률에 날씨마저 웅크렸다. 이십 대의 선홍빛 피부가 슬퍼 보이는 아침이다. 꽃샘추위에 겨우 촉을 틔우던 꿈이 얼 것 같아 담요라도 덮어주고 싶다. 유리창에 낀 잔상이 냉기로 번져간다. 툭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길을 잃을까 봐 왼쪽 가슴을 쓸어본다. 단추를 열고 잠시나마 햇빛과 흥정을 한다. 흥정이 통한다. 격려받지 못한 삶에 망각제가 된다.







  화살표를 따라 걷는다. 익숙한 길이라고 마음을 놓는 순간 낯선 길로 들어선다. 막다른 길에 들어서지만 되돌아가는 방법을 안다. 누가 세상에 나오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모태 문을 열고 나온 전력이 있다. 길을 찾는 일은 본능에 가까운가.
  내게는 보이지 않는 길이 타인의 눈에 비친다. 좌절로 인해 길이 한없이 좁아 보인다.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않은 것을 내가 가졌을 때는 좁아만 보이던 길이 넓어 보인다. 마음이 사람 생각의 폭을 넓혔다 좁혔다 한다. 마음만큼 변덕스러운 길은 없다.
  소화되지 못한 삶의 잔해들이 거울에 비친다. 역류하는 염분을 말끔히 비워내는 처방전이 있을까. 게워낸 만큼 삶의 찌꺼기는 또 쌓여 간다. 비탈길에 서 있는 바위를 가려주려고 눈이 내린다. 누군가 다가와 안기만 해도 공갈빵 같이 부스러지고 싶은 날이다. 이럴 때 어머니는 어떻게 하셨을까.
  어머니는 마음 길이 좁아질 땐 문을 닫고 바느질을 하셨다. 일렁이던 파도도 터져 나오던 슬픔도 당신의 손길이 지나가면 길이 환해졌다. 속앓이는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며 교리대로 홈질했다. 풀린 실밥만큼 삼켜지지 않는 울음이 가끔 노래로 풀려나왔다. 뻥 뚫린 바다의 구멍을 기울 때 나는 숨을 죽이며 지켜봤다. 꽁꽁 언 잡목처럼 늙은 당신, 신과 동거하는 법은 배우지 못해도 날마다 외우는 기도문은 하늘나라의 파란 카페트를 짓고 있지 않았을까.
  유리 잔도가 숨을 멎게 한다. 얇은 유리 바닥으로 보이는 천 길 낭떠러지가 아뜩하다. 이 길을 걸으면서 초연할 사람이 있을까. 발바닥에서 감지되는 유리의 차가운 신호보다 눈이 정수리를 가로질러 걱정 한 무리를 데려온다.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이 상황이 꿈이 아니다. 금방이라도 유리가 깨져서 벼랑 아래도 떨어질 것 같다. 극도의 공포감으로 온몸이 마비된다.
  바람이 등을 떠민다. 짧은 시간이지만 혀는 신께 허리를 굽혀 회개한다. 무서운 중에도 앞서가던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절벽을 움켜잡고 손목에 힘을 준다. 멈춰버린 시간 속으로 큰 아이, 작은 아이 얼굴이 지나간다.  

  공황장애를 이십여 년 동안 앓고 있는 내가 신경안정제 한 알로 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가야할 길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끝이 보이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웃음소리와 환호가 절로 나온다. 삶의 고비를 무사히 통과한 의례식 같다.
  수많은 길 중에서 나의 선택이 바른길이라 믿고 살았다. 그래도 가지 않으면 안 되기에 앞만 바라보고 걸었다. 시선이 아래를 향하는 순간 오금이 저려 오도 가도 못 하는 천문산의 유리 잔도처럼, 삶도 어디를 바라보고 가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삶이란 내가 원하지 않아도 가야 할 길이 있다.
  마지막 남은 겨울이 환승을 한다. 땅의 터진 살 위로 꽃이 핀다. 인생의 3분의 2를 달려 또 다른 역으로 간다. 길의 안테나를 높이 올려 주파수를 맞춰 본다. 살아야 하는 목적이 없을 때 길은 없어진다.


<2018. '문장'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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