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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를 찾아서] 양초-김근혜

양초작은 불 하나에 하루가 조용히 몸을 푼다 녹아내린 시간은 종이 위로 흘러와 깨알 같은 문장이 되고 심지 한가운데서 피처럼 태어나 언어가 되기 전의 슬픔으로 먼저 불타오른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운명을 살며 빛을 내는 얼마나 고요한 칼날 위의 숨인가? 지워진 문장처럼 저녁은 재처럼 쌓이고 잿빛 위에서 한 줄기 따뜻함을 느낀다 한세상 살아보겠다고 얼마나 많은 밤을 말없이 울어야만 했을까? 끝내 불꽃이 사라져야만 /완성되는 몸 ◇김근혜=계명대학교 여성학 대학원 졸업. 계간 『동리목월』 수필 등단. 제11회 산림문화 작품 공모전 시, 수필부문 대상(국무총리상). 제7회 중봉 조헌문학상 우수상. 제3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 우수상 외 다수. 대구매일신문, 대구일보, 경북매일 칼럼 집필. 대구 문인, 수필가 협회..

그룹명/시 방 2026.08.09

제 7회 중봉조헌문학상-김근혜

벽 김근혜 장기읍성 둘레길이다. 나지막한 성벽은 여인의 허리선처럼 굽이굽이 감아 돌고 있다. 훤히 드러낸 등허리를 밟고 지인과 자분자분 걷는다.한 층 한 층 쌓아올린 성벽은 각기 다른 얼굴로 정겹게 서 있다. 푸른 이끼 속에서 새싹은 움을 틔우려고 사르락사르락 발길질을 한다. 발아래 엎드린 동해바다가 유난히 굼실거리며 금방이라도 달려올 기세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낮은 집들이 어미 날개 아래 든 병아리 같다. 포근함이 밀려드는 오후다.지나가는 여행객의 말소리가 외딴집의 담을 넘었는가보다. 반가움에 뛰쳐나온 할머니가 여행객의 말을 받는다. 사람 구경하기가 얼마나 귀했으면 길손들의 발목을 잡을까. 할머니의 풍기는 인상으로 봐서 젊은 날은 담벼락에 심어둔 매화만큼이나 고고했을 것 같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

카테고리 없음 2026.08.07

[수필] 삶의 굴곡이 주는 아름다움

김근혜 수필가, 사진작가계명대학교 여성학 대학원 졸업계간 『동리목월』 수필 등단제11회 산림문화 작품 공모전 시, 수필부문 대상(국무총리상)제7회 중봉 조헌문학상 우수상제3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 우수상 외 다수대구매일신문, 대구일보, 경북매일 칼럼 집필대구 문인, 수필가 협회 회원저서: 푸른 얼룩(수필집)2월, 꽃반지 자리(디카시집) 삶의 굴곡이 주는 아름다움​ 젊은 여인이 내 앞에서 시야를 가린다. 불과 한 보 정도의 거리밖에 안 되는 곳에서 헬스 기구를 사용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 공간이다 보니 기구들이 거의 붙어 있다. 코치한테 PT를 받는 중인데 어떤 여인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 여인은 전신이 다 드러나는 꽉 낀 옷을 입고 바벨을 들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마치 삶의 한 단면처..

<반려동물이 주인에게 바라는 10개>

반려동물이 주인에게 바라는 10개> 제 수명은 10년에서 15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떤 시간이라도 당신과 떨어져 있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저를 입양하기 전에 꼭 그것을 생각해 주세요.당신이 바라는 것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저를 믿어주세요. 그것만으로 저는 행복합니다.저를 오랫동안 혼내거나, 벌을 주려고 가두지 말아 주세요. 당신에게는 일이나 취미가 있고 친구도 있으시겠죠. 하지만 저에겐 당신밖에 없습니다.가끔은 저에게 말을 걸어 주세요. 제가 당신의 말뜻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제게 말을 건네는 당신의 목소리는 알 수 있습니다.당신이 저를 함부로 다루고 있지는 않은지 가끔 생각해 주세요. 저는 당신의 그런 마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저를 때리기 전에 생각해 주세요. 제게는 당..

자유 2025.09.19

빙화氷華 향 열리니 / 최경숙

설중매 핀 나무 아래 잔설이 누웠다. 햇살이 선을 긋는다. 하트 모양으로 눈을 녹이는 것을 보니 이 세상 어딘가에 아직은 사랑이 있나 보다. 볕살에 춤추는 아지랑이를 보니 세상 어딘가에 아직은 세레나데가 있는가 보다. 춘몽이 난분분 한다.  봄비가 고인다. 서성이는 봄의 경이에 시인은 새싹 돋는 소리보다, 아물거리는 아지랑이보다, 햇살이 병아리 떼 불러내는 소리보다, 꽃잎이 벙그는 소리를 적으리라. 겨울이 지나갔음에도 풋풋한 풀 내음이 여태껏 없었는데, 입춘이 지나자마자 놀랍게도 풀싹들이 사그작사그작 몸을 비벼댄다. 새잎들도 솨아솨아 소리를 내며 순서를 잊지 않고 돋아난다. 나는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의 벌름거리는 환청을 빨아들여 해독의 시간을 누린다. 홀사랑 맞이다.  조매早梅는 꽃..

사진, 또 하나의 언어

사진, 또 하나의 언어/김근혜    징후다. 답답해서 밥이 목구멍에 걸린다. 산맥들이 꿈틀거리며 탈출을 꿈꾼다. 좋지 않은 호흡기 탓에 서랍 안에서 꿈이 늙을 때가 많다. 방랑벽이 있는 사람이 겨울을 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견디는 재간은 나이인 것 같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무작정 시동을 건다. 이사 온 지 삼 개월이 지나가는데 낯설다. 감기로 인해 실내에서 지내다 보니, 가을이 떠나고 없다. 직장을 그만둔 후론 사진을 찍는다. 영혼이 피사체에 빠져 일체가 될 때 느끼는 희열이 나를 바깥으로 밀친다.   누군가가 지나쳐 버린 하루를 담고, 내가 사랑하는 파도도 넣으며, 위안을 얻는다. 검은 상자 안에서 빨간 알약, 파란 펭귄, 다 닳은 지팡이가 나온다. 그들의 호흡이 멈추기 전에 재빨리..

길에 서다/김근혜

길에 서다/김근혜   차들이 게걸음이다. 땅을 장사 지내는 조문 행렬에 고속도로가 마비다. 불도저는 늙은 땅을 풀어헤쳐 새살을 파느라 여념이 없다. 목덜미를 물린 땅은 하늘을 향해 굉굉 소리를 낸다. 딸려 나온 벚나무가 잇몸을 드러내고 고통을 견디고 있다. 컬러 사진이 누렇게 바래져도 여전히 가야 할 길은 그대로다. 길을 걸으면서 끝을 찾고 마지막이라 말하면서 허공을 향하는 넝쿨손, 욕망으로 중독된 세상에서 엇길로 가다 발이 빠진다. 아버지의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어린 시절 멀리서 울리던 교회당 종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남들보다 쉽고 편하게 가는 사람들, 지름길로 가지 않아도 빠르게 간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지 않아도 매화가 핀다. 무엇이 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금수저 인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