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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의자 / 이정림

우리 집에는 의자가 많다. 혼자 앉는 의자, 둘이 앉는 벤치, 셋이 앉는 소파…. 언제부터 우리 집에 그렇게 의자가 많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소용이 있어서 사들였을 텐데, 정작 우리 집에는 한 개만 있으면 족하지 않던가. 사람들이 몰려오는 날이면 그것도 모자라 바닥에 내려앉아야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을 때는 그 비어 있는 의자들이 하품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모습이 안돼 보여, 심심한 촌로 뒷짐 지고 마을 가듯, 이 의자 저 의자에 가서 그냥 등 기대고 앉아 본다. 의자의 사명은 누구를 앉히는 것이다.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는 그냥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비어 있는 의자에 앉힐 사람들을 돌려가며 초대를 해 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그 빈 ..

친절한 사람들/조연현

1971년 여름, 나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세계 팬 대회에 참석하게 된 기회에, 약 40일 동안 세계 몇몇 나라를 여행한 일이 있었다. 다 알다시피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신생 공화국인 에이레의 수도다. 갈 때에는 자유 중국의 타이베이로 해서 홍콩, 이탈리아의 로마, 프랑스의 파리에 들렀고, 올 때에는 미국에 들러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 시카고를 돌아 보고, 일본의 도쿄를 거쳤다. 그 중, 자유 중국과 일본은 나라에서 퍽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 같은 아시아 국가들일 뿐만 아니라, 전에도 가 본 일이 있기 때문에, 해외여행이라는 데서 오는 흥분이나 불안은 느끼지 않았으나, 그 밖의 나라들에 대해선 적잖은 흥분과 불안을 함께 느꼈다. 아니, 흥분보다 불안이 앞섰다고 하는 거시 옳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불안..

연어 /김 만 년

연어 /김 만 년 한 마리의 날쌘 상어처럼 미끈한 KTX가 출발을 서두르고 있다. 긴 장마 뒤라서 그런지 남쪽을 향해 쭉 뻗은 철길이 오늘 따라 산뜻하게 보인다. 홍보실이라는 낯선 바다로 흘러들어 온지 오늘로서 꼭 일백일 째에 접어든다. 창가를 어슬렁거리며 홍보용 보도자료를 건성으로 읽는다. 오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조금 전 집무실 앞에서 노조위원장을 만나고 부터이다. “어 김기관사님이 여긴 웬일이유?” “어허, 자네야 말로 여긴 어쩐 일로…….아 참, 오늘 노사협의가 있지, 반갑네…….” 한 때 막걸리 잔 부딪히며 고락을 함께 했던 옛 동지를 십년 만에 만났다. 사장 집무실 앞인지라 만남은 어색했고 짧았다. 먹먹한 손을 놓고 돌아 서는데 끝내 가슴 한 쪽을 짓누르던 그 무엇이 둔탁한 파열음..

男자지圖/김근혜

男자지圖 “어디를 잘라낸 것이 가장 마음이 아픈가.” 성전환 수술받은 어떤 남성에게 물었다. 그 남성은 “월급이 깎인 것.”이라고 말했다. 남성의 생식기를 잘라낸 것을 아파할 것으로 생각하며 질문한 것이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다. 사용자는 성전환해서 여성이 되었으니 월급을 깎은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차별 당했다는 말이다. 성전환 수술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자궁 선망과 성차별에 대한 이십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첫 수업 시간이다. 주제는 성차별에 대한 자유토론이다. 몇몇 여학생들의 의견이 비슷했다. 남,녀 간의 취업 기회나 임금차별, 승진에 관련된 사회적 불평등에 관한 것이었다. 부부가 똑같이 직장을 다녀도 육아와 요리 전담은 여자라며 평등하지 못한 성역할에 대한 분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

점등인이 켜는 별 / 이정화

어스름이 마당을 기웃거린다. 길 잃은 개인지 어린 고라니인지 모를 짐승이 살금살금 뜰을 건너온다. 길고양이 한 마리 담을 넘어 골목 저쪽으로 사라진다. 맞은편 산자락이 천천히 제 능선을 지우면서 어둠이 사위에 드리운다. 딸깍, 저녁의 처마에 낡은 등불을 켠다. 부엉이 울음소리, 쓰르라미 부비는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밤의 교향곡 선율을 따라 시냇물 소리도 넘실거린다. 주근깨 같은 별들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밤하늘을 수놓는다. 저 별빛 중에는 수억 년을 달려온 것들도 있겠다. 시간의 장구한 길이를 가늠하자니 먼 빛이 더욱 아득해진다. 내 삶은 등 하나를 찾는 여정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린 그와 나는 두 손을 꼭 잡았다. 세찬 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도 우리는 반드시 도시인으로..

카테고리 없음 2022.09.29

몸/김귀선

조심스럽게 옷을 벗긴다. 두툼한 스웨터와 꽃무늬 고무 치마, 양말을 차례로 걷어낸다. 앞트임 없는 윗옷은 뒤집듯 위로 올리고 돈주머니가 매달린 분홍색 속바지는 아래로 끌어내린다. 이어 겹쳐 입은 두 개의 내의를 분리하려다 한꺼번에 벗겨낸다. 마지막으로 펑퍼짐한 속옷을 방바닥에 내려놓자 찰기 빠지고 늘어진 나신만 남는다. 저수지의 물이 줄고 나서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듯이 물기 마른 구순 노인의 몸에서 삶의 근원을 본다. 욕조 물에 때가 불릴 동안 얼굴부터 씻긴다. 이마의 주름이 고른 밭고랑 같다. 묵정밭에 듬성듬성 거름 무더기를 널어놓은 듯 버짐이 얼룩얼룩하다. 한 여자의 세월이 무서리 맞은 수숫대로 고스러져 있다. 저 얼룩도 때처럼 씻어 없앨 수 있다면…… 얼굴을 문지를수록 어머니는 아이처럼 눈을 ..

어미 / 김혜정

어느 날 나의 일터인 어린이집 베란다 밑에서 새끼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베란다로 달려 나가 법석을 떨었다. 이제 갓 돌을 지난 아기들까지 새끼고양이를 가리키며 옹알이를 했고 네댓 살 먹은 아이들은 신기한 듯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어린이를 돌보는 선생들도 일제히 고양이를 보러 베란다로 나갔다. 어미고양이는 하고 많은 아파트를 두고 왜 하필 어린이집 베란다 밑에 둥지를 틀었을까? 어미 고양이도 예쁜 아가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그 모습을 보면서 행복해하는 선생님들이라면 자기 새끼들을 잘 보살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꼬물꼬물한 새끼고양이 다섯 마리는 어미젖을 먹고 있었다. 얼룩무늬와 검은색무늬가 그려져 있는 모습이 어미와 아빠고양이와 똑 같아 ..

제10회 달서책사랑 전국주부수필공모전 대상/다시 책시렁에서 / 이지영

문간방에 먼지가 세 들어 사는 집이 있었다. 집 앞 큰 길에는 정류장이 없어도 버스가 멈춰 섰다. 해질녘에 버스가 지나가면 그 길 위에는 흙먼지와 아버지가 남겨졌다. 좀 있으면 대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부엌에서 숟가락 놓는 소리도 따라 들어갔다. ​ “아빠 다녀오셨어요?” 마루 위로 쏟아지는 네 남매의 목소리는 온 동네를 채웠다. ​ 석류나무가 새순을 올리던 어느 봄날, 저물도록 버스가 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이튿날 우리 가족은 짐을 꾸려 고향집을 떠나야 했다. 아버지가 손수 짜 주신 소나무 책시렁을 그대로 남겨 둔 채 몸만 빠져 나왔다. ​ 이사 간 집에는 우편함이 없었다. 아랫목에 묻어 두던 아버지의 밥그릇도 사라졌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던 나는 잠에 취해 살았다. ​ 199..

향기를 듣다/최민자

딱새 한 마리가 동네의 아침을 깨우듯 유자 한 알이 온 방의 평온을 흔든다. 방문을 열 때마다 훅 덮치는 향기. 도발적이다. 아니, 전투적이다. 존재의 외피를 뚫고 나온 것들에게는 존재의 내벽을 뚫고 들어가는 힘도 있는 것일까. 절박한 목숨의 전언 같은 것이 내 안 어딘가를 그윽하게 두드린다. 맛보다는 향기로 승부한다는 점에서 유자는 레몬과 닮은 꼴이다. 레몬 향기가 금관 악기면 유자 향기는 목관악기다. 레몬 향기가 바이올린의 고음이면 유자 향기는 비올라의 중음이다. 매끈한 피부에 길쭉한 몸매, 청순하고 새치름한 레몬이 도회 아가씨라면 우툴두툴하고 우루뭉술한 유자는 투박하고 속정 깊은 남도 아낙을 닮았다. 스러지는 것들에게는 소멸의 공포 같은 게 있는 것인가. 유자는 요 며칠 더더욱 맹렬하게 향기를 뿜어..

센 녀석이 온다 / 이삼우

햇살이 넘실거리는 주말 오후다. 소파에 상체를 파묻고 TV를 보면서 졸고 있을 때였다. 휴대전화의 컬러링이 절간 같은 집안의 정적을 깨뜨린다. 작은 며느리 전화다. 손자 녀석이 보채는 통에 할머니 집에 오겠단다. 작은 아들네는 우리 부부가 사는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안방 침대에서 주말 드라마를 보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아내도 손자가 온다는 전화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집 안 청소를 안 했는데….” 혼자 말하듯 웅얼웅얼한다. 당신이 청소하겠다는 의사표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옆이 있는 남편한테 부탁하는 것도 아닌 삼인칭 유체이탈 화법이다. 아내는 잠이 덜 깬 푸석한 얼굴로 거울을 보더니 안 돼! 하며 재빠르게 샤워실로 들어가 버린다. 노부부만 사는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정확히 말하면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