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소리를 읽다/김근혜 귓소리를 읽다 커다란 눈을 단 자전거가 캄캄한 협곡 안을 달린다 저녁 타종 시간이 늦었는지 멈추지 않는 질주 전선 우는 소리, 파도 소리, 매미 소리, 쉼 없이 덜컹거리는 귓속 전입신고조차 하지 않고 뻔뻔하게 입성한 그에게 잠시 쉼터가 돼 주기로 했다 왼쪽으로 누워야 겨우 내려오는 차단기 마다하고 두근거리며 그를 기다리는 날이 생겼다그가 요동칠 땐 첫사랑이 떠올랐다 아파보니 알겠다원치 않아도 오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룹명/시 방 2025.05.29
미더덕/김근혜 미더덕 까봐야 속이 보일까까도 까도 보이지 않는속살, 단단히 숨긴 그것그곳엔 마산 앞바다가 살까. 미더덕은 단단한 갑옷을 벗을 준비조차 하지 않는데 성질 급한 내 송곳니 서둘러 미더덕을 깨물고 말았다. 그런 나를 비웃듯 입안에서 쏘아대는 물줄기 그룹명/시 방 2025.05.29
독거/김근혜 독거 빈방, 어색하게 반기는 덜 삭은 공기 속에밖에서 보았던 어느 노부부의 웃음이 지느러미 달고 내 방으로 헤엄쳐 들어온다독거의 냄새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고내 심장에 위로를 건네며허벅지게 흐드러진 불두화에괜한 화풀이를 했다 빌어먹을 독거 그룹명/시 방 2025.05.29
多누리 무札/김근혜 多누리 무札 술 마시지 않아도취하게 하는 달항아리 그녀 허리춤을 무심히 만지는 경매사 경합 벌이던 수집가들요요한 항아리 앞에서숨죽이는데 부처님 낯빛이 알몸처럼 발개진다 경매장 분위기, 서로 섞여 같은 듯, 다른 신세계多누리에서 다 누리고, 손가락 방언 은사 받는 아라비안나이트의 밤 경매사 손에서 낙찰될 듯, 말듯낯선 남자 옆에서 선을 넘을 듯, 말 듯알몸으로 누워 흔들리는 달항아리 삶이란 유찰과 낙찰 사이 그룹명/시 방 2025.05.29
발돋음/김근혜 발돋음 까치 발을 해도 담장 너머가 보이지 않아 단단한 꿈 하나, 기다린다는 거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그가 떠난 골목을 이제껏 보고 있다 나지막해지는 꿈 그룹명/시 방 2025.05.29
적비悲/김근혜 적비悲 피우지 못할 꽃이라서인연을 뒤로 하고 심연으로 가는운문사 솔바람 길 행과 행이 옷깃을 여미고 적비 맞으며 칸칸이 피어나는 꽃무릇 풋풋한 여승의 속눈썹 사이로 펄럭이는 메타포 문장 내일은 붉은 비悲가 거꾸로 내린다 그룹명/시 방 2025.05.29
공황장애/김근혜 공황장애 나의 하루는 길고 느리다 불안감이 기습적으로 덮쳐온다 사전 협의 없이 불쑥불쑥, 작은 틈새에 나를 가둔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숨구멍을 틀어막고 삼십 년의 시간이 그의 손에 이끌려 원래의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그를 이해하려 애쓸수록 미궁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내 안에는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살고 있는 듯하다. 혼돈의 상태에서 내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대상은 ‘알프람’뿐그래도 “죽지 않는다”는 의사의 말이 비틀거리는 나를 가끔 일으켜 세운다. 그래서 나의 하루는 길고 느리다. 그룹명/시 방 2025.05.29
고성동 겨울 판화/김근혜 고성동 겨울 판화 고성동 삼겹살 집 불판 위에서 뒤집으면 금세 돌아누울 것 같은 내 삶이뒤집어도 뒤집어도 바로 눕지 않는다들쑤실수록 차갑던 변두리의 기억이 뜨겁게 타오른다 그대는 내 몸에 불덩이를 놓고심심한 삶이 싱겁다며 굵은 소금을 뿌리고 떠났다꾸물한 날엔 더욱더 욱신거리며 올라오는 신경통 육질 좋은 삼겹살만 골라 쌈을 싸지만 목구멍 타고 넘어가다 연소하지 못한 그리움 가끔역류성 식도염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을 불에 덴 화상이 화끈거려 나는 질긴 인연의 끈을 자르듯 가위를 든다. 고성동 거리는 불판 위에서도 왜 이리 차가우냐 그룹명/시 방 2025.05.29
각질/김근혜 각질 발바닥을 수술대에 눕히고 거친 부분을 피가 나도록 문지른다 벗겨내도 허연 군더더기 새순이 자꾸만 솟아오른다 쭈그려 앉아 있는 나에게 알전구가 따스하게 비춘다 어쩌면 저 알전구의 몸속에도 생의 각질은 일어날 터 허름한 무릎조차 내주지 못하고 자꾸만 일어나는 마음의 각질 가슴에 연고가 필요한 날이다 그룹명/시 방 2025.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