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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살았을까 / 한시영

자박자박 흙길을 걷는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는 아스팔트와 달리 발에 닿는 느낌부터가 부드럽다. 편리성에 익숙한 도시의 포장도로가 아닌 시골길이 비구름에 쌓여 운치를 더한다. 경계를 지으면서도 휘어져 도는 유유한 토석담이 고목을 끼고 마을을 잇는다. 산청 단성면 남사 예담촌. 가세를 짐작게 하는 고택의 기와 끝에 봄비가 떨어진다. 비에 젖어 더욱 검어진 기와색이 고색창연하다. 세력가의 집 앞에 심어졌다는 부부회화나무가 서로에게 기대어 바람의 성미를 아는 옛사람들의 지혜라는 듯 정갈한 대문 입구를 지키고 있다. 달빛 스며들었을 툇마루 빛바랜 창호가 유구하게 살아온 사람 이야기를 무언으로 전한다. 집은 한자로 집우宇 집주宙라 쓰고 두 글자를 합쳐 작은 우주라 한다. 집은 단순한 비바람을 막아내고 의식주를 영위..

쪽항아리/ 김희숙(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그가 움직인다. 손짓춤에 살결 같은 무명천이 내려서고 조리질에 참깨 올라오듯 누런 진흙물이 일어난다. 토닥거리며 매만지고 빠른 장단으로 휘몰아치니 항아리 안에 울돌목 회오리바람이 인다. 강바닥이 뒤집힌 듯한 너울에 정신이 혼미하다. 토해낸 물거품이 모여 수런거린다. 그가 젖은 천을 치켜들고 훑어 내리자 하늘 한 조각 떼어온 양 푸른 쪽물이 주르륵 쏟아진다. 흙을 빚어 태어났다. 잘록한 목선 타고 흘러내린 허리는 어린아이 두어 명을 거뜬히 품을 정도로 넉넉하고 진한 흑갈색 겉옷엔 빗금 몇 개 그어 멋을 부렸다. 풍만한 맵시는 미스 항아리 대회라도 나섰더라면 등위 안에 당당히 들었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녹여버릴 듯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이 타들어가는 뜨거움을 견딜 때는 어느 종갓집 볕 드는 마당가..

흔들리며 산다 / 남태희

기차에 몸을 싣는다. 아침을 깨우는 희붐한 안개가 드리워진 창에 머리를 기댄다. 철커덩 출발을 알리는 진동에 연이어 일정한 흔들림이 불안정한 심사를 위로해 준다. 눈을 감아 본다. 철컹철컹 일정한 침목의 간격 덕분인지 연속한 기계의 작동 덕분인지 치솟았던 마음자락이 수굿해진다. 한쪽으로 어깨가 살짝 기울어진다. 곡선 구간인가 보다. 해안선이 보이겠지 싶어 실눈을 하고 밖을 보니 하얗게 파도가 부서지고 있다. 출렁이며 깨어지는 것이 어디 파도뿐이겠냐며 굽어진 해송 한 그루가 참빗 햇살에 몸을 맡긴다. 다시 눈을 감는다. 햇살의 유희가 시작된다. 촘촘한 빛살, 느슨한 빛살, 나뭇가지 사이에 걸린 빛살, 언덕에 막힌 빛살, 커튼 자락에 걸렸다 들어온 빛살, 움직임에 따라 밝음의 명도와 채도가 달라진다. 보랏빛..

딱, 그만큼/최장순

1. 검푸른 벽이었다. 멀리서는. 그러나 다가갈수록 숲은 훌륭한 배후가 된다. 나무들이 온통 하늘을 덮고 있다.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한 아파트 삶이 아닌가. 때맞춰 걷는 숲. 그늘이 따가운 햇살을 가려준다. 그루터기에 앉아 카메라 렌즈를 통해 올려다본 우듬지들이 예술작품이다. 일부러 그리기도 어려운 수채화다. 아마존 거대한 숲 사이로 이리저리 흐르는 물줄기를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멀찍이서 짐작한 내 착각이 저만치 물러난다. 우듬지들은 서로가 닿지 않게 절묘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하늘을 조각조각 나눈 절묘함. 그 공간을 통해 우듬지 아래의 가지와 이파리에 빛을 나누고 있다. 잘 균열이 된 거북 등을 닮았다. 이리저리 트인 공간 사이로 하늘은 맑고 푸른 기운을 숲 안으로 쏟아붓고..

제9회 공무원문예대전 최우수상/아름다운 원시(遠視) / 김영식

제9회 공무원문예대전 최우수상/아름다운 원시(遠視) / 김영식 어느 날부터 눈이 침침해지면서 책읽기가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가까운 것들은 자꾸 흐릿해지는 데 눈을 들면 그러나 먼 것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무슨 큰일인가 싶어 황급히 안경점을 찾았으나 자연스 런 노화현상이니 너무 걱정 말라는 것이었다. 순간 마음이 울적해졌다. 싱그러웠던 내 젊은 날이 늦가을 낙 엽처럼 천천히 나를 떠나고 있었다. 매양 봄이라 생각했는데 어느덧 가을의 끄트머리에 서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붙잡을 순 없을까? 눈이 더 흐려지기 전에 서둘러 안경을 맞추어야겠다고 작정했다. 눈이 차츰 희미해진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는가? 더욱 그것이 노화현상이라니. 세월 앞에선 아무 것 도 무한한 것이 없구나하고 생각했다. 잠시 지나..

회의 미수 사건 / 김삼진

“김 차장, 회의 좀 합시다. 과장들 좀 이리 불러 봐요. 거기 홍 계장, 김 계장도 같이 오고.” 부장의 쉰 목소리다. 다른 부서는 이미 퇴근하여 빈자리가 많았다. 북적대던 사무실은 한산하다. “저는 친구 결혼식에 가야해서….” 말끔한 정장차림의 홍 계장이 양해를 구하며 뒷자리의 부장 눈치를 살폈다. 뒤를 돌아보니 부장이 가도 좋다는 손짓을 한다. 내 앞의 과장둘도 얼굴을 마주보며 망설이는 표정인데 홍 계장에게 선수를 빼앗기자 김 샌 표정이다. 나를 비롯한 간부들이 회의용 탁자로 엉거주춤 모였다. 부장은 다음 주 토요일 퇴근 후에 내장산 단풍을 보러가자고 했다. 술도 한 잔 하고 일박하고 점심 먹고 올라오자는 것인데, 강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의는 따라야 했다. 부장은 각 지점장들에게도 연락해서 올 ..

쇠꽃, 향기 머물다 / 허정진

둥글둥글한 버섯들 군생처럼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시골 마을이다. 한해의 결실을 보고 난 뒤의 들판은 허무인지 여유인지 텅 빈 충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담장 너머 등불처럼 붉게 매달린 홍시가 방학 때마다 외갓집 오고 가는 길목처럼 정겹기만 하다. 숲속 어딘가에서 갑자기 허공으로 높이 날아오른 새가 폐곡선을 그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선들선들한 바람이 조붓한 돌담길을 따라 마을을 안내하듯 앞장선다. 오래된 시골집이다. 귀향을 염두에 두고 잠시 머물 거처를 찾던 중이었다. 뒤란에서 불어오는 대숲 바람, 호박넝쿨 타고 오르는 낮은 돌담, 우물가 옆에 돌확이나 숫돌이 주인 잃은 빈집을 지키고 있다. 한때는 올망졸망한 자식들 앞세운 일가족이 등가죽 따뜻하게 살던 집이었으리라. 사람 냄새 들썩거리던 온기..

다리/이상규

혼자 식탁에 멀슥이 앉아 밥 먹는 것이 싫어서 TV 앞에 밥상을 펴고 아내와 조반을 같이한다. 아쉬운 대로 나이 들어 만들어진 대화의 장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상다리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밥상이 자꾸 한 쪽으로 기운다. 나사가 헐거워졌는지 늙은 소처럼 주저앉을까 불안하다. 상을 펼 때마다 다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아내가 나의 반복된 불평에 ‘요즈음 그런 것 수선해주는 목수가 어디 있냐?’는 말만 되풀이 하더니 어느 날 꼭꼭 숨겨두었던 말끔한 새 상을 불쑥 내놓았다. 다리가 튼튼한 밥상의 출현으로 거실에 금세 안정이 찾아왔다. 얼마 전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라는 일본 영화를 보았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자유인이 된 여주인공이 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튼실한..

여행상수/방민

걷는다, 배낭을 등에 매단 채. 발은 앞으로 향하고 눈은 주위를 살핀다. 코로 들이쉬는 공기에는 해초 냄새가 은근하다. 바닷가 모래밭이라 발이 쑥쑥 빠진다. 속도가 느릿하다. 해파랑 길을 걷는 중이다. 길을 안내하는 리본이 마을을 지나서 차도로 향한다. 차도와 나란히 이어진다. 가로등 기둥에도 리본이 달려 있다. 얼마쯤 걷다가 산길이나 마을길로 이어질 것이다. 찻길도 바닷길과 산길이 막힐 때 돌아간다. 차와 나란히 걷는 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불편하고 바로 옆을 스치는 차량도 불안하다. 다른 길이 없으니 잠시 따라 걷는다. 차가 앞에서 왔다 사라지고, 뒤에서 나타나 달아난다. 차창으로 누군가 힐끗 보는 것 같다. 배낭을 짊어지고 스틱을 휘저으며 걸어가는 우리를 보는 그는 무슨 생..

냄새 / 한경희

봄밤이다. 바람이 살랑, 내 블라우스 자락을 부풀린다. 동네 아이들이 떠난 그네에 앉아 고개를 젖힌다. 어둠과 맞닿은 나뭇가지마다 별들이 매달렸다. 밤하늘에는 온통 외로움이 물들어 있다. 세운 무릎에 손깍지를 끼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싶게 한다. 숨을 크게 쉬어 본다. 흘러 다니던 꽃향기가 폐부 깊숙이 빨려든다. 그 속에서 나는 잊고 있던 냄새의 한 끝자락을 붙잡는다. 엄마에게선 항상 달큰한 냄새가 났다. 달달한 과일이 농익은 냄새였다. 고운 분가루를 탁탁 두들려 발라 살 속 깊숙이 그 냄새를 밀어 넣고, 겉은 분내로 은은하게 감춘, 한없이 포근했던 냄새. 엄마의 살 냄새가 좋아서 나는 자주 품에 안겼다. 가슴을 한껏 부풀려 흩어지는 냄새를 붙들었다 맡으면 맡을수록 그 냄새는 더욱 그리워지기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