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1069

구름 속에 머문 기억 / 조헌

'공(空)에 대해 많이 알아서 법명(法名)이 지공(知空)이냐’는 나의 물음에 미소 띤 얼굴을 붉히며 “아는 바가 너무 없어 지공이에요.” 샘가에 앉아 저녁 설거지를 하던 스무 살 남짓 비구니 스님은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했다. 반듯한 이마에 그린 듯 고운 눈썹은 정갈했고 파랗게 깎은 머리와 맑은 눈, 그리고 단정한 입 매무새는 수행자의 모습이 역력했지만 발그레한 두 뺨은 아직도 앳된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학교 도서관에서 여행 계획을 세우던 나는 무심코 집어 든 낡은 잡지 속에서 진귀한 사찰 하나를 찾아냈다. 란 제목의 특집기사엔 사진도 여러 장 실렸었는데, 여기저기 늘어선 석불과 석탑의 모습은 놀라웠고 특히 산 중턱에 자리 잡고 누운 한 쌍의 거대한 와불(臥佛)에선 도저히 눈..

두부 예찬/최민자

두부는 순하다. 뼈다귀도, 발톱도, 간도, 쓸개도 없다. 단호한 육면 안에 방심한 뱃살을 눌러 앉히고 수더분한 매무시로 행인들을 호객한다. 시골 난장부터 대형마트까지 앉을 자리를 가리지 않지만 조심해서 받쳐 들지 않으면 금세 귀퉁이가 뭉개지고 으깨진다. 날렵하게 모서리를 세워 각 잡고 폼 잡아 봐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제국이 몸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눈치다. 생살을 갈라도 소리하지 않고 날카로운 칼금에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슴슴하면 슴슴한 대로 얼큰하면 얼큰한 대로 주연이든 조연이든 탓하지 않고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그는 어둠의 집에서 막 출소한 젊은이에게 숫눈 같은 육신을 송두리째 보시하기도 한다. 괜찮다고, 지난 일은 잊으라고 저 또한 진즉 열탕 지옥을 견디고 환골탈태로 새..

불편한 우산/김근혜 수필가

불편한 우산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할머니 몇 분이 우산을 쓰고 가신다. 그 옆에 어정쩡하게 비를 맞고 따라가는 할머니에게 눈길이 닿는다. 갑자기 내린 비로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나 보다. 함께 걷는 사람들은 무심히 앞만 보고 걷는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너는 우산도 없냐.” 뒤돌아다보며 한마디 던진다. 감정 섞인 말투다. 아니 비아냥거림에 가깝다. 시장가는 길이라서 그분들 뒤를 따르게 되었다. 노인정에 같이 있다가 나온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보기가 안쓰러워 우산이라도 씌워드리려고 할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내 발걸음 자국마다 살얼음이 끼고 있었다. “우산도 없냐.”는 소리가 귓전에서 회전했다. ‘~도’라는 조사가 문턱까지 쫓아와 몸살을 앓게 한다.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 말이 방대..

어쩔, 파스/ 김근혜 수필가

거울 속에 낯선 중년 부인이 서 있다. 본 듯, 아는 듯, 마는 듯한 사람이다. 웃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한쪽 손엔 파스가 들려 있다. 그 꼴이 가관이다. 울퉁불퉁한 전라가 숨김없이 드러난다. 여성 스모 선수가 전쟁터에 나가기 직전 모습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자신이 봐도 봐줄 만한 꼴이 아닌지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끔은 벽이 돼야 하는 자신이 웃프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자주 아프다. 근육통이 새삼스럽지 않은 나이다. 아픈 부위에 파스를 붙인다. 잠시 통증이 진정된 듯 하나 부작용으로 피부 발진이 온다. 붙어있어도 떼어내도 가렵다. 강력한 접착제는 뗄 때가 더 고통스럽다. 일방적인 사랑처럼. 사랑이 너무 뜨거우면 불에 데듯이 파스도 뜨거운 것과 함께하면 화상을 입는다. 아픔을 견디고 억지로 떼..

선, 선, 선/김근혜

선, 선, 선 정지선 앞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많은 생각이 일렁인다. 선線 하나가 있을 뿐인데 쉼표를 찍는 사람들과 차량이 선善을 지킨다. 그 선善은 질서를 위한 선線이다. 선善이 선線을 가둔다. 가끔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정지선線을 넘는 이들이 눈에 띈다. 동요가 일어난다. 걷잡을 수 없는 바람에 무단횡단을 한다. 선線이 선善을 삼키는 순간이다. 많은 선線 앞에서 선選이 갈등한다. 선線을 넘는 일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편견을 깨고 허들을 넘는 일이다. 삶은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순간순간이 늘 선選의 선상에 서 있다. “넘지 않은 선線은 있어도 못 넘을 선線은 없다.” 여성이라는 편견과 사회적 제약을 넘어 ‘유리천장’에 저항한 여성들 얘기다. 그녀들은 왜곡된 시각과 편견을 깨고 당당히 월선越線에 성공..

두두/김근혜

두두 두두가 왔다. 그 아이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탐험가이다. 그저 스치는 바람 한 점마저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코를 벌름거린다. 무엇이든 입에 넣고 물어뜯고, 질겅거리며 씹는다. 집안 전체가 놀이터다. 구석구석을 돌며 어지르고 자신이 점령한 곳은 전리품이라도 되는 듯 방점을 찍는다. 영역이라고 표시하는데 내가 주인이라고 소리 지른들 알 리가 있겠는가. 묵묵히 뒤처리한다. 뻔뻔하고도 당당하다. 화가 나다가도 멜라닌 색소가 가득한 까만 눈과 마주치면 미소가 절로 나온다. 두두는 자신이 상전인 줄 안다. 겨우 4개월 된 강아지와 자리다툼이 싫어서 내 자리를 기꺼이 양보한다. 자리란 것이 꿰차고 앉으면 주인이고, 한번 앉은 자리를 순순히 내놓을 자가 있겠는가. 어떻게든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는가. 굳이 ..

모난 것이 둥글다. /최민자

사람 좋다는 말을 듣는 이들이 있다. 성격이 둥글둥글 원만하다는 뜻이다. 원만(圓滿)이란 원(圓)에서 발원한 말이지만 기실 원은 원만하지 않다. 생각만큼 너그럽고 편하지도 않다. 사각형이나 육각형 형제들은 담 하나를 공유하며 사이좋게 붙어 지내기도 하고, 저희 몸을 밀착시켜 최대한 틈새를 좁힐 줄도 안다. 둥근 것들은 못 그런다. 부드럽고 유연해보여도 친화력이 없고 협심할 줄을 모르는, 오만하고 이기적인 쌤통들이다. 스스로를 최고의 미녀라 여기는 두 여인처럼, 마주쳐도 흘끗 스치고 돌아설 뿐, 진득하게 동행하는 법이 없다. 냉장고 선반 위에 수박 한통이 들어가려면 김치통과 찬통들이 줄줄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원통 찬합이 사각찬통보다 자리를 더 많이 차지하고, 맥주캔이나 음료수병들은 아예 딴살림을 내주..

당신의 의자 / 이정림

우리 집에는 의자가 많다. 혼자 앉는 의자, 둘이 앉는 벤치, 셋이 앉는 소파…. 언제부터 우리 집에 그렇게 의자가 많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소용이 있어서 사들였을 텐데, 정작 우리 집에는 한 개만 있으면 족하지 않던가. 사람들이 몰려오는 날이면 그것도 모자라 바닥에 내려앉아야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을 때는 그 비어 있는 의자들이 하품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모습이 안돼 보여, 심심한 촌로 뒷짐 지고 마을 가듯, 이 의자 저 의자에 가서 그냥 등 기대고 앉아 본다. 의자의 사명은 누구를 앉히는 것이다.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는 그냥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비어 있는 의자에 앉힐 사람들을 돌려가며 초대를 해 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그 빈 ..

친절한 사람들/조연현

1971년 여름, 나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세계 팬 대회에 참석하게 된 기회에, 약 40일 동안 세계 몇몇 나라를 여행한 일이 있었다. 다 알다시피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신생 공화국인 에이레의 수도다. 갈 때에는 자유 중국의 타이베이로 해서 홍콩, 이탈리아의 로마, 프랑스의 파리에 들렀고, 올 때에는 미국에 들러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 시카고를 돌아 보고, 일본의 도쿄를 거쳤다. 그 중, 자유 중국과 일본은 나라에서 퍽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 같은 아시아 국가들일 뿐만 아니라, 전에도 가 본 일이 있기 때문에, 해외여행이라는 데서 오는 흥분이나 불안은 느끼지 않았으나, 그 밖의 나라들에 대해선 적잖은 흥분과 불안을 함께 느꼈다. 아니, 흥분보다 불안이 앞섰다고 하는 거시 옳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불안..

연어 /김 만 년

연어 /김 만 년 한 마리의 날쌘 상어처럼 미끈한 KTX가 출발을 서두르고 있다. 긴 장마 뒤라서 그런지 남쪽을 향해 쭉 뻗은 철길이 오늘 따라 산뜻하게 보인다. 홍보실이라는 낯선 바다로 흘러들어 온지 오늘로서 꼭 일백일 째에 접어든다. 창가를 어슬렁거리며 홍보용 보도자료를 건성으로 읽는다. 오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조금 전 집무실 앞에서 노조위원장을 만나고 부터이다. “어 김기관사님이 여긴 웬일이유?” “어허, 자네야 말로 여긴 어쩐 일로…….아 참, 오늘 노사협의가 있지, 반갑네…….” 한 때 막걸리 잔 부딪히며 고락을 함께 했던 옛 동지를 십년 만에 만났다. 사장 집무실 앞인지라 만남은 어색했고 짧았다. 먹먹한 손을 놓고 돌아 서는데 끝내 가슴 한 쪽을 짓누르던 그 무엇이 둔탁한 파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