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시 방 359

패치워크/ 정채원

냉정한 벽과 침대를 이어 붙일 거야 너의 중세와 나의 르네상스를 마주잡고 들들들 박음질을 해야지, 아래층과 위층을 계속 이어 붙여 칸칸이 잠버릇이 다른 고층 아파트를 만드는 거야 9층에서 누가 따귀를 때리니 5층 아기가 자다 깨어 앙앙 울어대고 정원에서는 목련이 터지더군 꽃은 필 줄도 알지만 질 줄도 알지 아기가 운 그날부터 딱 열하루째 날 우수수 오줌 싼 기저귀 꼴로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지 죽은 교황과 갈릴레이를 악수시킬 수 있다면 떨어진 꽃잎이 다시 가지 위로 올라붙을까 지는 꽃과 피는 꽃을 이어 붙인다면 반은 울고 반은 웃는 얼굴 꽃보다 아름다운 꽃이 될까 할머니는 자꾸 딸꾹질을 하고 복사꽃은 부풀어오르네 늑대가 울면 바다코끼리가 헐떡거리고 1층이 이사 가는 날 13층이 집수리를 시작하더군 아, 요..

그룹명/시 방 2022.08.11

빈 방/마경덕

우묵한 집,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누가 살다 갔나. 오래된 적막이 나선형으로 꼬여 있다. 한 줌의 고요, 한 줌의 마른 파도가 주홍빛 벽에 걸려 있다. 조심조심 바다 밑을 더듬으면 불쑥 목을 조이는 문어의 흡반, 허둥지둥 불가사리에 쫓겨 참았던 숨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뽀글뽀글 물갈피에 쓴 일기장을 넘기면… 빗장을 지른, 파도 한 방울 스미지 않는 방. 철썩 문 두드리는 소리에 허리 접힌 불안한 잠이 있고. 파도가 키운 둥근 나이테가 있고 부우― 부우― 저음으로 가라앉은 호른소리, 떨리는 어깨와 부르튼 입술도 있다. 모자반숲 파래숲 울창한 미역숲이 넘실대고 프렌치호른에 부르르 바다가 젖고 밤바다의 비늘이 반짝이고 외로운 나팔수가 살던 방, 문짝마저 떨어져 나간 소라껍데기, 잠시 세들었던 집게마저 떠난 ..

그룹명/시 방 2022.08.11

푸른 독/ 이 경

눈 뜬 감자에는 푸른 독이 있다 이미 하늘을 보아 버렸으니 온 몸에 시퍼런 독이 시작됐으니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몸 되었으니 거름 받아 잘 썩은 흙을 다오 핏줄 속에 사나운 어둠을 길들여 하얗게 꽃 피울 하늘을 다오 눈을 뚫고 나온 푸르고 둥근 힘이 세상의 허기를 채울 수 있다면 뜬 채로 두 눈을 묻어도 좋아라 무딘 칼로 눈을 도려내며 손바닥에 묻은 감자의 흰 피 내게 언제 감자눈 같은 꿈 있었나 흙으로 덮어 주어야 꽃이 피겠다

그룹명/시 방 2022.08.11

기다림에 지친 그대에게 / 유한나

​ ​ ​ ​ 당신의 얼굴이 달맞이 꽃잎이 되도록 너무 기다리지 마세요. ​ 당신의 얼굴이 동백 꽃잎이 되도록 너무 사랑하지 마세요. 당신의 얼굴이 찔레 꽃잎이 되도록 너무 안달하지 마세요. 기다림이란 푹푹 꺼져가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꽃잎처럼 다치기 쉬운 것, 안달한다는 것은 이별을 재촉하는 것. 먼저 사랑한다는 일엔 개척자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더 많이 기다려야 한다는 일엔 어머니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혼자서 안달한다는 일엔 숨을 돌이키는 지혜가 필요가 필요합니다. 기다림에 지친 그대여 사랑이 오기 전에 당신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면 어떡합니까? 오늘밤엔 별을 보듯 한 발짝 물러서서 그를 보세요.

그룹명/시 방 2022.04.20

일요일 심장에게/ 비스와바 쉼보르스

고마워, 내 심장 투덜거리지도 않고 소란 피우지도 않으며 타고난 근면함에 대해 어떤 칭찬도 보상도 요구하지 않아서. 너는 1분에 70번의 공덕을 쌓고 있지. 너의 모든 수축과 이완은 세상을 두루 여행하라고 열린 바다로 조각배를 밀어 보내는 것과 같지. 고마워, 내 심장 매 순간순간마다 나를 남들과 구별되는 존재로 만들어 주어서. 꿈에서조차 독립된 존재로. 너는 계속 확인해 주지. 내가 꿈속으로 영영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날개가 필요 없는 마지막 비상 때까지는. 고마워, 내 심장 나를 디시 잠에서 깨어나게 해 주어서. 비록 오늘은 일요일, 안식을 위해 만들어진 날이지만 내 갈비뼈 바로 아래에서는 영원한 휴식 전의 분주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지.

그룹명/시 방 2022.03.29

전구를 갈며 / 함민복

전구를 갈며 / 함민복 잠시 빛을 뽑고 다섯 손가락으로 어둠을 돌려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는 더 밟게 못 박히고 십자가는 삼십 촉만큼 더 확실히 벽에 못 박힌다 시계는 더 잘 보이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고 의자는 그대로 선 채 앉아 있으며 침대는 더 분명하게 누워 있다 방안의 그림자는 더 색득해지고 창 밖 어둠은 삼십 촉만큼 뒤로 물러선다 도대체 삼십 촉만큼의 어둠은 어디로 갔는가 내 마음으로 스며 마음이 어두워져 풍경이 밝아져 보이는가 내 마음의 어둠도 삼심 촉 소멸되어 마음이 밝아져 풍경도 밝아져 보이는가 어둠이 빛에 쫓겨 어둠의 진영으로 도망쳤다면 빛이 어둠을 옮겨주는 발이란 말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벽에 못 박혀 있는 깡마른 예수여 연꽃에 앉아 법당에 앉..

그룹명/시 방 2022.03.13

오늘을 경매하다/신진련

오늘을 경매하다 늘 바닷 오늘을 경매하다 길은 늘 바닷가에서 끊어지고 달리는 발자국들이 모이는 자갈치 새벽은 푸른 가슴을 열고 뭍에 오른 파도 소리를 잠재운다 경매사가 종을 울리는 공판장 지친 트롤선이 마악 부려놓은 생선 비린내를 어루만지는 손가락이 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기지개 켜듯 피어나는 꽃잎들 자갈치 꽃이 핀다 손가락이 만든 꽃잎은 바다의 기호 접은 수첩 뒤에서 바다의 주소를 옮겨 적는 동안 뭍에 내린 물 냄새가 옷을 갈아입는다 가장 짜릿한 향기를 위해 손가락 끝에서 제 몸을 터뜨리는 물꽃들 접었다 폈다 새로운 기호로 태어나는 자갈치 꽃봉오리마다 아침이 만개하고 있다 소금꽃 여자 바다를 입고 살았습니다 종일 아가미를 떼느라 휘어진 손가락 마디에는 따개비 같은 상처가 굳은살로 박혀있습니다 몸에..

그룹명/시 방 2022.03.08

빛멍/이혜미

돌이켜보아도 무례한 빛이었다. 최선을 다해 빛에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응고되지 않는 말들, 왜 찬란한 자리마다 구석들이 생겨나는가. 너무 깊은 고백은 테두리가 불안한 웅덩이를 남기고. 넘치는 빛들이 누르고 가는 진한 발자국들을 따라. 황홀하게 굴절하는 눈길의 영토를 따라. 지나치게 아름다운 일들을 공들여 겪으니 홀로 돋은 흑점의 시간이 길구나. 환한 것에도 상처 입는다. 빛날수록 깊숙이 찔릴 수 있다. 작은 반짝임에도 멍들어 무수한 윤곽과 반점을 얻을 때, 무심코 들이닥친 휘황한 자리였다. 눈을 감아도 푸르게 떠오르는 잔영 속이었다.

그룹명/시 방 2022.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