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18

2017시니어문학상 특선/빈집/배정순

어느 날 통로 현관 앞에 폐기 처분하듯이 마구잡이로 끌려 나온 이삿짐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속 불편한 사람이 오물을 토해내 놓은 듯 뒤죽박죽이었다. 꽤 괜찮은 물건들도 더러 있 었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끄는 건 윤이 자르르 흐르는 장 단지였다. "장 단지가 참 곱네요." 했더니, 이삿짐센터 인부가 "필요하면 가져 가이소" 한다. 탐이 나는 단지를 골라 얼른 엘리베이터 입구에 가져다 놓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다 싶어 주인을 찾았더니 만날 수 가 없다. 인부의 말이 장독의 주인은 윗집 할머니라고 했다. 순간 흠칫했다. 횡재했다고 좋아하던 마음이 싸 늘히 식어 밀물처럼 빠져나갔다. 단지를 슬그머니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장 단지로..

마당도배 / 박노욱 - 2019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수필 당선작

귀찮기만 했던 마당을 도배하던 일이 그립다. 이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럴까.​ 마른 마당은 늘 평온하다. 비가 내리면 사정이 달라진다. 며칠을 마다하지 않는 비나 모다깃비가 쏟아지면 진흙탕이 된다. 비온 후 울퉁불퉁해진 마당을 삽이나 널빤지로 평평하게 고르는 일을 마당도배라고 불렀다. 옛날 마당은 요즘의 아파트 주차장보다는 우리 가족만의 공간인 거실과 더 가까웠다. 거실을 도배하듯 마당도배가 필요한 시절이었다.​ 갖가지 이유로 마당은 곰보가 된다. 아이들의 발자국은 나무랄 수 없다. 들일하고 돌아온 삼촌의 리어카 바퀴자국도 어쩔 수 없다. 수탉이 광기를 부린 자리와 강아지나 고양이 발자국까지도 봐 줄 수 있다. 막걸리에 건들 취하신 아버지가 남긴 갈지자 흔적은 마음이 짠하기도 했다. 고삐를..

아버지 게밥 짓는다 / 김옥자 - 2020년 매일신춘문예 당선작

달무리 속으로 언뜻언뜻 구름이 흘러들다 사라지는 밤, 정월대보름 놀이를 하느라 한껏 들뜬 여흥이 가시기전 경광등을 켠 경찰차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제복을 입은 경찰이 차에서 내리더니 보호자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농한기를 맞아 도시에 사는 지인들과 관계의 밥을 짓고 집으로 돌아오다 아버지는 속도의 바퀴에 무참(無慘)하게 부딪쳤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오빠와 언니에게 당부의 말도 일러 둘 겨를도 없이 그 분들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 위중했던 병세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어른들의 말이 적응되고도, 근 1년여의 투병생활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진 대퇴부까지 석고 깁스를 하고 목발에 의지한 채 집으로 오셨다. 한 집안의 대들보이자 기둥처럼 튼튼했던 몸이 사고의 후유증 때문인지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

카테고리 없음 2022.09.22

이불의 숨결 / 이정자

해맑은 날씨에 눈이 부시다. 봄물이 번져가는 벚나무 둥지에 꽃망울이 브로치처럼 앙증맞다. 간절기 이불을 빨래하고 의류 건조기 안에 넣으려다 꺼낸다. 이불을 베란다 창틀에 툭 걸쳐놓고 하늘을 바라보니 나비 구름이 흘러가며 유혹한다. ‘이불은 햇살 좋은 날, 마당 어귀 담에 널어서 말리는 게 최고야.’ 하는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아득한 날, 나의 요람은 헌 이불이었다. 어머니는 푹신한 이불을 마주하면 “네가 태어나던 순간이 떠오른다.”라고 하며 애잔한 눈빛이다. 할머니는 태아의 탯줄을 자르고 이불로 핏덩이를 감싸서 밀쳐 두었다. 아버지는 외동아들인데 내리 딸이 태어나 푸대접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서운함이 웅크리고 있다. 하지만 파란만장한 엄마의 일생을 들춰보면 가슴 먹먹한 일들이 스르르 풀린..

겹 / 윤애자

어두컴컴한 집안에 발을 들이다가 깜짝 놀랐다. 베란다 쪽 유리창문이 스크린처럼 환해서다. 가까이 가보니 입주를 앞둔 건너편 아파트에서 일제히 불을 켜 놓았다. 마지막 점검인지 과시용인지는 모르지만 장관이다. 1600세대의 직육면체에서 뿜어내는 압도적인 불빛은 며칠간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길 건너 골목시장 자리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문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보상이 끝나 대부분의 점포가 문을 닫은 지도 몇 해 되었다. 신천 가는 길에 그 앞을 지나다 보면 마치 도심 속의 섬 같았다.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데다 낮고 허름한 점포는 비닐에 봉해져 누렇게 삭아가고 있었다. 과일가게와 철물점 한 곳이 문을 열어놓기는 했지만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 버리..

귀소(歸巢)/ 이경화 - 제39회 근로자문화예술제 문학제 금상

저 멀리, 대나무 숲 사이로 어렴풋이 고택故宅이 보인다. 스산하게 부는 바람에 요동치는 대나무 숲 사이 로 고풍을 한껏 자랑하며 서 있는 고택의 모습 결코 심상치 않다. 대나무 숲 사이에 고택이라, 꼭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기분이다. 이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던 본향本鄕이었던가. 30년 만에 다시 찾은 고택이건만, 왠지 불가촉한 거리에서 몸과 마음이 뱅뱅 맴도는 기분이다. 솟을대문 앞에 선다. 처마는 마른 속을 훤히 드러내며 풍화에 의해 이미 삭아내려 버렸다. 한 때 권력과 부 의 상징이었던 높디높은 담벼락엔 능소화가 한껏 피어올랐다. 솟을대문을 열고 기화요초들로 무성해진 마 당에 들어서니 대나무 숲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이 내 몸과 마음 곳곳을 훑고 지나간다. 마당을 거닐며 세월의 설진屑塵이 ..

불멍 / 이동이

치솟는 불길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자유분방하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불사르듯 푸른빛으로 일렁인다. 오직 타오르기 위한 일념으로 장작을 에워싸는 불길, 그 현란한 불꽃의 몸짓에 홀린다. ‘타다닥, 타닥’ 장작이 타면서 불티가 날아오른다. 밤의 장막에 별처럼 박혔다가 화르르 쏟아져 붉은 수정되어 구른다. 잠시 반짝이다 시나브로 흙과 동화되고 만다. 느리게 반짝이다 사라지는 불꽃은 노인의 인생 꽃인 검버섯을 닮았다. 그 꽃도 저렇게 시들거리다가 가뭇없이 사그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 시간 이 고요. 불길 따라 흐르고 불길 따라 머문다. 어느 순간 나를 내려놓자 내가 없다. 실존하는 형체는 이미 내가 아니다. 환하게 부서져 내리는 불빛에 산화되어 버렸다. 딸네는 매주 금요일이면 아이 셋을 데리고 멀리 ..

불멍 / 이동이

치솟는 불길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자유분방하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불사르듯 푸른빛으로 일렁인다. 오직 타오르기 위한 일념으로 장작을 에워싸는 불길, 그 현란한 불꽃의 몸짓에 홀린다. ‘타다닥, 타닥’ 장작이 타면서 불티가 날아오른다. 밤의 장막에 별처럼 박혔다가 화르르 쏟아져 붉은 수정되어 구른다. 잠시 반짝이다 시나브로 흙과 동화되고 만다. 느리게 반짝이다 사라지는 불꽃은 노인의 인생 꽃인 검버섯을 닮았다. 그 꽃도 저렇게 시들거리다가 가뭇없이 사그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 시간 이 고요. 불길 따라 흐르고 불길 따라 머문다. 어느 순간 나를 내려놓자 내가 없다. 실존하는 형체는 이미 내가 아니다. 환하게 부서져 내리는 불빛에 산화되어 버렸다. 딸네는 매주 금요일이면 아이 셋을 데리고 멀리 ..

홑눈과 겹눈/송귀연

대낮인데도 다람쥐쳇바퀴 돌듯 몇 번씩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매번 딸네 집을 찾을 때마다 길눈도장 확실히 찍어둬야지 하지만 생각은 그때 뿐, 또 이 모양새다. 홑눈의 길치가 가진 치명적 약점이다. 잠자리는 겹눈에 육각형처럼 생긴 수만 개의 낱눈이 붙어 있다. 이 낱눈들이 렌즈 역할을 하여 360도 시야 확보가 가능하다. 어릴 적, 울타리 끝에 앉은 잠자리를 잡으려고 숨죽이며 다가갔지만 매번 놓치고 만 것도 그 때문이다. 나비의 겹눈은 넓은 범위를 보기 때문에 예쁜 꽃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색깔구분이 가능한 겹눈은 어떤 사안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데 유효하다 하겠다. 어릴 적 엄마는 사물에 대한 시계가 단순했던 것 같다. 슈퍼우먼 같은 엄마였지만 한 가지 못마땅한 게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원하는 일..

서소희/가마

전시장 유리벽 안에 박제되어 있는 물건은 어디선가 본 듯하다. 분명 의자같이 생겼는데 의자는 아니다. 그리고 사람이 앉기에는 작다. 모양을 보면 작은 가마다. 팔걸이와 등받이에는 당초문양을 그려 곱게 단청을 했다. 안내문구에는 ‘영여(靈輿)’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다. 이승의 혼백(魂帛)을 저승으로 옮기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라고 한다. 영혼이 타는 가마다. 영혼이 사용한다는 것은 저승과 이승을 연결해 준다는 뜻이다. 순간적으로 좁쌀 같은 소름이 돋는다.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 것일까. 저승과 연결된 무엇이 저 위에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 가마에 앉으면 이 세상의 모든 집착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뿐히 저 세상으로 떠나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허나 저 세상은 죽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