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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소(歸巢)/ 이경화 - 제39회 근로자문화예술제 문학제 금상

테오리아2 2022. 9. 22.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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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대나무 숲 사이로 어렴풋이 고택故宅이 보인다. 스산하게 부는 바람에 요동치는 대나무 숲 사이

 

로 고풍을 한껏 자랑하며 서 있는 고택의 모습 결코 심상치 않다. 대나무 숲 사이에 고택이라, 꼭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기분이다. 이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던 본향本鄕이었던가. 30년 만에 다시 찾은 고택이건만,

 

왠지 불가촉한 거리에서 몸과 마음이 뱅뱅 맴도는 기분이다.

 

솟을대문 앞에 선다. 처마는 마른 속을 훤히 드러내며 풍화에 의해 이미 삭아내려 버렸다. 한 때 권력과 부

 

의 상징이었던 높디높은 담벼락엔 능소화가 한껏 피어올랐다. 솟을대문을 열고 기화요초들로 무성해진 마

 

당에 들어서니 대나무 숲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이 내 몸과 마음 곳곳을 훑고 지나간다. 마당을

 

거닐며 세월의 설진屑塵이 켜켜이 내려앉은 안채와 사랑채, 곳간과 행랑채를 차례차례 톺아본다. 세월의

 

흔적과 상처들이 고택 곳곳에 남아 있기는 하나 지난날 융성했던 가문의 권세를 어렴풋이 엿볼 수 있다.

 

나 이젠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고 감당하기 힘든 적요로 가득 차 버린 고택의 모습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온 설움에 그만 눈물을 쏟고 만다. 다시 돌아오리라 다짐하고 떠

 

났던 30여 년 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허나 온전히 않은 모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 가

 

슴 한 편이 한없이 쓰리고 아프다.

 

 

안채에 올라 대청마루에 걸터앉는다. 금방이라도 전개(부엌)에서 소천하신 어머니가 달려 나와 병든 내 몸

 

을 꼭 끌어 안아줄 것만 같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사랑채 창살문을 열고 '이녁아' 라고 부르시며 헤헤 웃

 

으실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세월을 거슬러 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인간이 어

 

찌 흐르는 세월을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세월은 흐르고 흘러 내 나이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나이를

 

훌쩍 지나버렸다. 인생무상이 느껴진다.

 

 

그나마 다행이다. 폐가가 되기 전에 고택으로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다. 빈집은 사람이 살지 않은 집이 아

 

니던가. 언제든지 돌아와 다시 살 수 있는 집이 빈집 아니던가. 그와 달리 폐가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비이

 

. 살고 싶어도 다시 살 수 없는 것이 폐가가 아니던가. 행여나 폐가가 되어 버렸을까 걱정이었는데, 만년

 

萬年이 지났어도 빈집으로 남아 있어주어 고맙기 그지없다.

 

곳간 주위엔 녹슨 옛 농기구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 중 오래된 지게가 눈에 띈다. 석양이 질 무렵, 아버지가

 

어린 날 지게에 태우고 산밭을 내려오시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아버지는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집안에 태어

 

났지만, 대방가를 꿈꾸기 보단 그저 농사짓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평생 농부로서의 삶을 살다가 가셨다.

 

려받은 재산 많았으나 워낙 인심 좋고 정이 깊다 보니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눠주고 가셨다. 자식들에게 변

 

변한 재산을 남겨주지 못하셨지만, 그 누구하나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어머니 역시 기품 있는 귀부인

 

이었으나, 이타심이 남 달라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셨다. 특히 손이 빠르고 재주가 좋아 일로는 어머니를

 

따라 잡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런 부모님 슬하에서 자랐던 내 소싯적은 정말 꿈같이 행복했었다.

 

 

그러나 남편을 만난 후로 내 인생은 깊은 허방에 빠져 들었다. 남편은 냉혈한冷血漢이었고 샤일록 같은 인

 

간이었다. 잔정도 잔재미도 없는 차디찬 사람이었다. 착한 마음 하나 믿고 혼인했는데, 물려받은 재산이 그

 

의 성품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남편이 역마살이 끼어 밖으로 돌며 화간을 일삼을수록 난 허허로움으로 가

 

득한 빈집이 되어갔다. 내 마음이 폐가가 되기 전에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지만, 전 재산을 탕진한 남편

 

은 그만 객사하고 말았다. 결국 내 마음은 사람이 결코 살 수 없는 폐가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제야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깨닫게 되었다. 죽고 싶어도 남은 자식들을 위해 꿋꿋이 살 수 밖에 없었다.

 

누구를 원망할 시간도 없이 앞만 바라보며 자식들을 위해 살았다. 자식들 다 제 짝 찾아 출가시킨 후 내게

 

결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왔다. 암이었다. 암이 내 몸이 찾아든 것이었다.

 

 

집도 사람처럼 나이를 먹어 늙어가는 모양이다. 고택 곳곳에 나이 먹은 흔적들로 가득 찼다. 풍화로 인해

 

고택 곳곳에도 깊은 주름들이 패였다. 특히나 허물어진 장독대 위엔 성한 장독이 하나도 없다. 그토록 어머

 

니가 아끼셨던 장독들이 아니던가. 그나마 장독대 옆 앵두나무는 여전히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에 휘뚝휘뚝 거리는 키 작은 앵두나무의 모습이 삼삼해 보인다.

 

 

곳간 앞에 넘어져 있는 바지랑대가 눈에 들어온다. 바지랑대를 보고 있으니 온갖 빨래가 널린 빨랫줄을 힘

 

겹게 받치던 바지랑대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어머니는 바지랑대처럼 살라 하셨다. 제 아무리 양 어깨에

 

큰 짐을 짊어지게 되더라도 부러질지언정 휘지 말라 하셨다.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바지랑대처럼 살지 못

 

한 느낌이다. 삶의 무게에 너무 많이 휘어 버린 느낌이다.

 

 

암은 내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잡아 흔들었다. 홀로 힘겨운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내 육신은 황폐해질 대

 

로 황폐해지고 말았다. 자궁을 들어내고 암 유착이 심한 방광을 들어내고서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옆구리에 요루를 만들어 소변을 받아내야만 했다. 평생 소변주머니를 달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암은 정상인이었던 날 장애인으로 만들고서야 진정이 되었다.

 

나 반백년을 정상인으로 살다 남은 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현실이 그리 녹록치가 않았다. 죽고 싶

 

었다. 혀라도 깨물고 죽고 싶었다. 허나 이놈의 육신은 여전히 삶에 대한 미련으로 가득했다. 죽지 못해 산

 

다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었다.

 

 

고택은 모든 것을 비워낸 듯 보인다. 30년 전 주인을 잃고 홀로 자리를 지키며 인고의 시간을 견뎌온 고택

 

은 모든 것을 비워내고 빈집이 된 듯하다. 허나 이제 내가 다시 돌아왔으니 고택은 더 이상 빈집이 아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다시 채워 넣으면 되는 것 아닌가. 삶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오욕五慾으로 가득 찼

 

던 삶을 온전히 비워내야만 새로운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암에 걸렸다 하여 괴로울 것

 

도 아니고 장애인이 되었다 하여 절망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

 

. 모든 것을 비워낼 때에 비로소 새로운 것을 채워 넣을 수 있는 법이다. 온전하게 비울 때 마음이 자유로

 

워지는 것이다. 진심으로 자유롭고 싶다.

 

 

고택은 더 이상 빈집이 아니다. 그동안 여백으로 가득 찬 빈집은 조금씩 여유를 찾아갈 것이다. 지나간 시

 

간을 그리워하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다가올 시간을 기다리는 것 또한 또 다른 기쁨이 아니던가. 내 삶

 

역시 모든 것을 비워냈으니 언제고 또 다른 기쁨으로 가득 채워질 터이다. 그 날을 기다리며 이 고통을 묵

 

묵히 견디며 살아갈 것이다.

 

 

산릉선을 따라 석양이 지기 시작한다. 지는 석양을 바라보니 금세 내 두 눈은 석양빛처럼 붉게 물든다.

 

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이 대나무 숲을 휘휘 훑고 지나간다. 바람은 고택 곳곳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후

 

우우 불어 모두 가져간다. 어디 먼지뿐이겠는가. 내 마음 속 더러운 먼지도 모두 가져가는 기분이다. 내 삶

 

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나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고택과 늘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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