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겹 / 윤애자

테오리아2 2022. 9. 2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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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집안에 발을 들이다가 깜짝 놀랐다. 베란다 쪽 유리창문이 스크린처럼 환해서다. 가까이 가보니 입주를 앞둔 건너편 아파트에서 일제히 불을 켜 놓았다. 마지막 점검인지 과시용인지는 모르지만 장관이다. 1600세대의 직육면체에서 뿜어내는 압도적인 불빛은 며칠간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길 건너 골목시장 자리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문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보상이 끝나 대부분의 점포가 문을 닫은 지도 몇 해 되었다. 신천 가는 길에 그 앞을 지나다 보면 마치 도심 속의 섬 같았다.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데다 낮고 허름한 점포는 비닐에 봉해져 누렇게 삭아가고 있었다. 과일가게와 철물점 한 곳이 문을 열어놓기는 했지만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 버리고 간 화분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어도 주위의 삭막한 풍경 때문에 안타까움만 더 했다.

 

공교롭게 내가 사는 아파트 앞으로도 대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부동산 시장의 오랜 불황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해빙기를 맞은 봄날 같았다. 길 건너에 들어설 아파트는 신천과 가까워 공기와 전망이 좋고, 앞에는 대형마트와 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한 문화시설이 많아 경쟁률도 무척 높았다. 주변이 더 복잡해지고 교통체증도 심할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기대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큰길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공사로 인한 불편은 모르고 지냈다. 오히려 자동차 소리와 온갖 전자음에 익숙해진 내 귀에는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새롭게 들렸다. 베란다에서 보면 길 건너 공사장이 훤히 내려다보여서 틈틈이 훔쳐보는 재미도 있었다. 여러 대의 덤프트럭이 비상등을 깜빡이며 오가는 모습이나 노란 안전모를 쓴 인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역동적이기도 했다. 땅 밑 기초공사가 어렵지 땅 위의 공사는 일도 아니라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로 건물의 키가 쑥쑥 자라는 것 같았다. 

 

우리가 지금의 집을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조망권이 좋아서였다. 남편 직장과 가깝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도시를 벗어날 수 있는 북대구IC가 지척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삼면이 탁 트인 시야가 나는 더 마음에 들었다. 동남향의 22층 집은 앞산과 팔공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식탁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라디오를 듣거나 차를 마시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그만이다. 이사 와서 한동안 의문스러웠던 동쪽하늘의 불빛이 갓바위 가는 길이라는 걸 알고는 그 뜻밖의 조우에 숙연해하며 감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길 건너 아파트가 완공되고부터는 그런 재미가 시들해졌다. 공사할 때만 해도 완공 후의 그것이 내 시야를 방해할 줄은 몰랐다. 팔공산의 반을 도둑맞은 것 같았다. 눈만 뜨면 마주하는 하늘도 한 귀퉁이가 잘려나갔다. 무시하고 내가 볼 것만 보려고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는다. 설령 눈에 들어온다고 해도 예전의 풍경이 아니다. 낮에는 신천의 녹지와 하늘을 가리고 밤이면 인공 불빛이 사색을 방해했다.

 

시월 말부터 입주가 시작되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새 보금자리로 옮겨오려는 이삿짐 차량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큰길을 돌아갔다. 입주고객에 한해 할인 행사를 한다는 상가에는 가족단위의 낯선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거리에 낙엽이 뒹굴어 마음마저 서걱대는 11월이다. 팔공산을 넘어 금호강을 스쳐오는 냉기에 벌써부터 옆구리가 시리다. 신기한 것은 매일같이 눈앞에서 거슬리던 아파트가 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불빛도 빈집과 입주한 집은 차이가 나서 누군가의 생활로 이어지는 불빛은 순하고 부드러웠다. 날이 저물어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면 그 빛의 온기가 길 건너 베란다에 서 있는 내게까지 전해졌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길을 가도 옆 사람과 팔짱을 껴야 하고 나지막한 담벼락만 보여도 뛰어 들어갔다. 잠시나마 바람을 피하면서 외투를 여미고 장갑도 다시 끼며 재무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한겨울에 시장을 가거나 볼일을 보고 올 때에는 길목 어디쯤 어느 건물이 제대로 바람을 막아주는지를 꿰고 있다. 그곳에서 느꼈던 아늑함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청객이라고 여겼던 저 아파트도 올겨울 우리를 대신해 금호강 찬바람을 맞을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내 앞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까 싶다. 옆과 뒤, 사방으로 나를 감싸주는 사람들이 있어 이나마 내 삶이 보호받고 따뜻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