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119

맨방 / 추선희

집들이를 다녀왔다. 그 집에는 빈 벽이 거의 없었다. 장식가구가 많았고 가구가 없는 벽 앞에는 분재와 도자기가 도열해있고 조명이 가족사진과 그림을 비춰주고 있었다. 터질 듯 꾸며진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니 마음이 산만하고 묵직하다. 몇 해 전 제주도에 갔을 적에 사진작가 고 김영갑의 갤러리, 두모악에 들른 적이 있다. 하릴없이 쏘다니다 우연히 팻말을 보게 되어 찾아간 것이다. 한때 시골 분교였던 갤러리는 아담했다. 틀만 간직한 채 개조된 건물은 수수했고 작은 운동장은 나무와 조각품들로 아기자기했다. 말년에 루게릭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손수 정원을 가꾸었고 유골도 그곳에 뿌려졌다고 한다. 갤러리는 여느 갤러리와 다르게 천장이 낮고 바닥이 마루였다. 그 덕분에 방안 마냥 포근했다. 드문드문 걸려있는 사진에서는 회..

바람을 기다리는 거미 / 공순해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한 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 (늙은 거미/ 박제영) ​ 화자(話者)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등을 툭툭 치며 말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손은 힘이 들어..

발을 잊은 당신에게 / 김만년

1. 이날까지 당신만 바라보고 살아왔어요. 당신의 육중한 무게에 눌려 숨죽이며 살아왔죠. 십 문반, 당신의 완고한 성채에 갇혀 퀴퀴한 생각만 키워왔어요. 별이 뜨는지 바람이 부는지 문밖의 세월은 몰라요. 젖은 길, 가시밭길, 발바닥 부르트도록 앞만 보고 걸어왔어요. 당신이 휘파람을 불며 들판을 지날 때나 파장 술에 업혀 뒷골목을 휘청거릴 때도 언제나 내 자리는 당신의 바닥이었죠. 젖은 바닥 노천탁자 밑에 쭈그리고 앉아 당신의 생각 없는 발장단에 비위 맞추며 늦은 귀가시간 기다려 왔어요. 긴 세월 당신의 보폭에 순응하며 살아왔죠. 그런데 오늘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드네요. 오늘밤에도 당신 손은 애지중지 살구비누로 씻어주었죠. 발을 발로 씻는 당신의 습관은 세월이 가도 고쳐지질 않네요. 취중이었다고요? 늘 ..

직장의 마지막 기차역 / 이종화

이번 역에선 누가 내릴까. 문이 열리자 승객들은 눈치를 보며 서로의 등을 떠밀었다. 몇 사람이 쫓겨났다. 기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출발했다. 입사 첫날, 나도 이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직장은 참 시끄러운 곳이다. 진실은 대개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고, 소문과 험담엔 은밀한 날개가 달렸다. 누군 누구의 동문, 누구 고향 친구는 누구, 누구는 누구와 같은 교회, 누구 부모가 누구고 그 누구와 누구가 서로 돕는 사이란 말이 삽시간에 퍼졌다. 줄타기 선수들이 짠 촘촘한 거미줄에 참과 거짓은 한데 뒤엉켰다. 다음 기차역에서 누가 내리게 될지 그 거미줄을 보면 알 듯도 했다. 시간이 흘렀다. 나도 제법 많은 역을 지났다. 입석으로 탔지만, 저 끄트머리에 내 자리도 나는 걸까. 어느 날, 막 열차에 오른..

새우눈 / 한경선

바다는 손을 헹구지 못한 채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면서 손님을 맞았다. 무쇠 솥에 불을 때다가 부지깽이 던져두고 뛰어나와 손을 부여잡고 눈물부터 보이던 언니를 닮았다. 갯벌 가까이 있는 바다는 그랬다. 흙과 바람 속에서 뚜벅뚜벅 걷는 사람처럼 꾸밈이 없고 투박했다. 비릿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밴 물이랑을 일궜다. 바다는 온갖 목숨들을 거두느라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것들을 부추기고 쓰다듬고 다독이느라 분주하다. 인적 드문 산골에 터를 잡고 하루하루를 엮어내는 언니는 때 묻은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그저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다. 누구를 그립다고 한 적도 없고 삶이 외롭다고 툭 내뱉은 적도 없다. 올망졸망한 아이들 품고 눈 끔벅거리는 일 소 한 마리 먹이는 것이 사는 일의 전부인 줄 아는 듯했다. 세상 구..

나는 반려동물이다 / 이형국

나는 이리저리 궁상맞게 변명거리만 주절댔다. 아내의 눈동자가 돌아가는 걸 오랜만에 보았다. 분노가 정점을 넘었다는 걸 알아챘다. 공포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변명으로 풀릴 일이 아니기에, 멀뚱멀뚱하니 주인의 눈치를 알아보려는 개꼴이 되었다. 핥고 빨다가 눈에 거슬리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버리는 멍멍이 말이다. ​나는 아내에게 사육되고 있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친구들과 한잔하면서도 "아마도 나는 마누라한테 사육당하는 것 같다."라고 하소연을 늘어놓기도 했다. 마흔 초반이었던가. 미친 듯 나를 풀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퇴근 중에 발작적으로 포항 밤바다를 찾았다가 새벽녘에 돌아와서는 "아내 앞에서 나를 그만 사육하고 이젠 풀어달라."고 외쳤다. 회사도 출근하지 않고 곧바로 집을 나와 버렸다. 가출이..

관계망(關係網) / 김나현

주변은 관계의 망으로 엮여 있다. 사는 일은 거미줄처럼 연결된 망이 확장되거나 축소되는 현상의 연속인 것 같다. 한해를 닫으며 몇 개의 새로운 망이 형성되었다. 좀 더 장기적인 결속을 다져보자고 뜻을 합친 결과다. 굳이 이탈할 명분이 없을 때 발을 슬쩍 걸쳐놓게 된다. 연륜을 더할수록, 사회 활동의 반경이 넓어질수록 이 망의 폭도 비례하여 확장되는 걸 실감한다. 이 망에는 물리적,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썩 친숙하지 않다거나 거리를 두게 되는 사이도 함께한다. 마음이 편하게 기우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언제 보아도 격의 없이 반가운 사이가 있고, 만나는 횟수가 뜸해지며 시나브로 멀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이는 자신이 소속된 망에 대한 애착 여부가 아닌, 구성원 간 ..

카테고리 없음 2022.09.23

마당/탁현수

아침잠을 털어내자마자 서둘러 마당을 쓴다. 이 집으로 이사를 한 후, 비가 오는 날이 아니고는 매일 반복되는 일이다. 밤새 내린 이슬의 감촉이 손끝에 촉촉이 감겨온다. 대빗자루 끝이 흙을 파고들어 그림 아닌 그림이 그려질 만큼 온 힘을 다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당을 쓴다기보다는 미세하게나마 흙을 뒤엎는다고나 할까. ​ 집주인이 되어 아홉 해가 흐른 지금까지 뜰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흙 마당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텃밭 자리를 떼어 내고, 다실(茶室)로 사용할 별채 자리도 제법 잘라갔다. 온 마당 가득 일년초를 심어 사계절 피고 지게 하는 일은 평생의 중요한 숙원사업이건만, 남편은 유실수를 심으려고 호시탐탐 내 땅을 노리고 있다. 더구나 오다가다 들른 동네 사람들은 잡초 때..

구두와 고무신 / 최병진

엄마 손을 잡고 캄캄한 밤길을 걸었다. 대여섯 살 먹은 아이가 겁을 먹을 만도 한데 엄마가 있어서 괜찮았다. 어른들 말을 들으니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인민군이라고 했다. 인민군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인민군에 발각되지 않게 조심조심 빙판길을 걸어야 한다고 엄마는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가죽 구두 굽에서 들리는 “똑똑 딱딱.” 소리가 골짜기에 더욱 크게 울렸다. 아버지가 사주신 구두였다. 한 짝이 언제 없어졌는지 쭈그려 신은 한쪽 발에서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구두 소리에 화를 내며 잰걸음으로 앞질러갔다.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욕을 먹으며 길을 걸었다. 밤하늘에 별들은 잠도 없는지 초롱초롱 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엄마 등에서 동생도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엄마는 앞서가는 사..

불안한 해빙 / 이주옥

봄철 나물 중 흔한 머위는 주로 그늘진 대나무 숲이나 언덕에 자생한다. 대체로 이파리나 줄기를 먹는다. 맛은 쌉싸름하지만 입맛 돋우는 데 좋다는 나물이다. 몸에 좋은 것이 입에 쓰다는 말이 있으니 일부러라도 그 맛을 즐길 일이다. 작고 여린 잎은 데쳐서 된장 양념에 참기름 두어 방울 떨구고 깨소금 솔솔 뿌려 반찬으로 먹으면 별미다. 줄기는 껍질을 벗겨 삶았다가 무치거나 볶거나 탕에 넣어 먹기도 한다. 특히 육개장이나 오리탕을 끓일 때 넣으면 특별한 맛이다. 하지만 나는 삶은 줄기에 생새우와 함께 들깻가루 두 스푼 정도 섞어서 자작하게 볶은 것을 가장 좋아한다. 친정어머니가 보낸 택배 상자 속에 튼실하게 삶아져서 묶인 머위 대가 듬뿍 들어 있었다. 유난히 색깔도 누르스름하고 통통했다. 무슨 요리를 하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