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발을 잊은 당신에게 / 김만년

테오리아2 2022. 9. 23.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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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날까지 당신만 바라보고 살아왔어요. 당신의 육중한 무게에 눌려 숨죽이며 살아왔죠. 십 문반, 당신의 완고한 성채에 갇혀 퀴퀴한 생각만 키워왔어요. 별이 뜨는지 바람이 부는지 문밖의 세월은 몰라요. 젖은 길, 가시밭길, 발바닥 부르트도록 앞만 보고 걸어왔어요. 당신이 휘파람을 불며 들판을 지날 때나 파장 술에 업혀 뒷골목을 휘청거릴 때도 언제나 내 자리는 당신의 바닥이었죠. 젖은 바닥 노천탁자 밑에 쭈그리고 앉아 당신의 생각 없는 발장단에 비위 맞추며 늦은 귀가시간 기다려 왔어요. 긴 세월 당신의 보폭에 순응하며 살아왔죠. 그런데 오늘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드네요.

 

오늘밤에도 당신 손은 애지중지 살구비누로 씻어주었죠. 발을 발로 씻는 당신의 습관은 세월이 가도 고쳐지질 않네요. 취중이었다고요? 늘 허드레 변명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당신,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나를 딛지 않고 어떤 일을 할 수 있죠? 꽃다발을 받거나 악수를 하거나 스테이크를 자르던 당신의 빛나던 손, 그 손의 숨은 조력자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주었나요. 먼 길 함께 걸어온 나를 지긋이 바라본 적이 있었나요. 땅은 당신을 키우고 발은 당신의 일생을 지탱시키죠. 그러니 바닥과 맞닿은 것들은 대개 습하고 천하기 마련이란 당신의 편견은 오류 아닌가요. 느닷없이 쓰레기통을 차서 엄지발가락을 기절초풍하게 만들던 당신의 심술은 또 어떻고요. 발을 쥐고 아파서 쩔쩔매는 꼴이란,

 

당신은 그새 잠들었네요. 하루의 노동을 베고 누운 당신을 보니 조금은 안쓰러운 생각도 드네요. 생각해보면 당신과 사는 동안 행복했던 날이 영 없었던 것은 아니죠. 우리가 천방지축으로 뛰어놀던 시절이었어요. 밤송이에 찔려 엉엉 울던 당신 엄살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네요. 말간 발등이 땡볕에 보송보송 말라가던 시간이었어요. 당신은 신발을 벗어던지고 풍덩, 냇가로 뛰어들곤 했죠. 그땐 나를 끔찍이도 생각해주었죠. 따끈한 금모래로 발마사지를 해주거나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햇살찜질을 해주기도 했죠. 풀밭을 뛰어다니며 나비를 쫓고 천렵도 했어요. 여우비를 맞으며 방천을 달리기도 했죠. 발가락의 촉수는 온통 풀과 꽃과 태양을 향하던 맨발의 시절이었죠. 밤이면 대야 가득 물을 받아놓고 “어이구 이놈아, 발이 이게 뭐꼬!” 하시며 흙 묻은 발을 뽀득뽀득 씻어주던, 나를 금쪽같이 보듬어주시던 당신 어머니의 그 손을 잊을 수 있을까요. 그땐 행복했죠. 그러나 시간은 한곳을 맴돌지 않고 우리들은 자라죠. 자란다는 것은 슬픈 일인가요. 발이 자라면서 당신은 멀리까지 가게 되었죠.

 

2.

멀리 간다는 것은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는 일이고 그것은 아픔이고 슬픔이죠. 풀밭을 떠나면서 당신은 나를 잊었어요. 당신의 고행도 그때부터 시작되었죠. 작은 입들이 당신 신발에 승선하면서 삶의 보폭도 빨라졌죠. 급할수록 질러가던 당신, 언젠가 엇길로 들어 진창에 빠진 날도 있었죠. 허욕을 움켜쥐려다 그만 허방에 빠졌던가요. 그날 당신이 바닥이라고 탄식하며 주저앉았을 때 나는 떠나본 적도 없는 바닥을 걱정해야 했죠. 노심초사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당신의 직립의지를 읽느라 촉수를 곧추세웠죠. 어쩌겠어요. 우선은 먹고사는 일이 급했죠.

 

풍파가 거셀수록 당신과 나는 멀어져갔어요. 우리가 함께 뒹굴던 시간, 신발을 벗어두는 시간, 그러니까 나를 내려다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든 거죠. 언젠가 푸릇한 길 하나 오랫동안 굽어보던 당신, 서른이나 마흔 즘엔 습작노트 한 권 들고 사막이나 새들의 숲으로 가자던 당신의 옛 맹세는 어디로 갔나요. 그러고 보니 당신은 사막을 걷는 낙타였던가요. 발바닥에 사구砂丘처럼 불쑥 솟은 굳은살이 그것을 증명하네요. 당신 파랑 같은 생의 나날들이 굳은살로 새겨지는 동안 당신은 나를 잊고 나는 당신 속에서 시들어왔네요. 당신이 편애하는 손을 바라보며 볼품없이 늙어왔네요. 당신의 보폭에 하루의 운세를 맡기고 오늘도 먼 길 걸어_왔네요. 당신의 손은 현실을 꿈꾸고 나는 당신 해진 신발 속으로 스며들던 한줌 햇살을 꿈꾸던 시간이었죠.

 

신발을 벗어두고 떠나고도 싶었죠. 십 문반 당신의 먹살이 일생을 벗어나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가고 싶었어요. 우리가 맨 마음으로 뒹굴던 그 풀밭을 떠올리기도 했어요. 야생의 발을 찾아 먼 유목의 초원을 꿈꾸기도 했죠. 은어 떼 날아오르는 바이칼이나 자작나무 숲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눈 덮인 오두막도 좋아요. 석 달 열흘쯤 세상으로 가는 문을 닫고 오롯이 당신과 독대하고 싶었죠. 대야 가득 물을 받아놓고 세상에 짓무른 상처 오래도록 다독이고 싶었어요. 순한 햇살에 자적自適하는 당신 모습 보고 싶었어요. 뜨거운 불심지 돋우고 순백의 문장 한 줄 받아 적고도 싶었죠. 사족 없는 맨발이면 어디든 좋아요. 내 온전한 의지로 직립의 풍적風跡을 찍으며 며칠이고 걷고 싶었죠. 무른 발가락에 파릇한 싹이 돋을 때까지, 한번은 내 생각대로 살고 싶었어요. 당신을 풀밭으로 그만 방목하고 싶었던 거죠.

 

3.

곤히 잠든 당신을 보네요. 발을 잊고 잠든 당신 모습이 참 평화로워 보이네요. 당신의 무관심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저 발은 누구일까요. 문득 “소를 타고 소를 찿는다"던 선승의 말씀이 떠오르네요. 말씀의 궁극窮極은 다르지만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랬군요. 처음부터 나였던 당신, 일체一體이면서 딴 마음을 품었던 나, 결국 내가 찾던 풀밭은 당신 신발이었군요. 알고 있죠. 나는 땅땅, 발바닥이란 천형을 선고받은, 당신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당신의 무기수인거죠. 가끔은 초원의 망루를 꿈꾸며 탈옥을 부추기기도 했지만 당신은 조롱박 같은 눈망울들이 달린 저 신발을 결코 벗을 수 없었던 거죠. 발의 인생사가 다 그런 것이었네요.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었네요. 저마다 겹별 하나씩 간직한 채 ‘아’ 하고 입 벌리는 불빛을 찾아가는 가난한 영혼의 유목민들이었네요. 어쩌죠? 이쯤에서 당신을 이해해야 하나요. 행장을 꾸렸다가 다시 푸는 여인의 마음이 이러할까요. 아침이슬을 묻히며 조붓한 오솔길을 걷는 것으로 위안해야 할까요.

 

언젠가 당신 고요히 수평에 드는 날, 욕망도 집착도 울음처럼 잦아드는 날, 그땐 신발을 벗을 수 있겠죠. 그때는 나도 바닥을 떠날 수 있을까요. 홀가분하게 날아오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조금은 낯설기도 한 당신 평안한 얼굴 바라볼 수도 있겠죠. 발‘我’을 잊고 사는 당신, 그때까지 부디 강녕하세요. 참, 발은 꼭 손으로 씻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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