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119

열린 문 / 위상복

비 내리는 오후, 교무실이 갑자기 훤하다. 멋쟁이 중년 여성이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눈길이 쏠린다. 낯설지도 않다. 담임할 때 도움받았던 학부모인가. 아니면 대학 동아리 후배인가. 잠시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선생님, 안녕하세요. K 여고 제자 〇〇예요.”라고 한다. 막내아들 입시 상담차 학교에 들렀다가 내가 있다기에 찾았단다. 반가이 인사를 하더니, 혹시나 몰라볼까 봐 걱정되었는지 학창 시절의 추억도 한 보따리 풀어놓는다. 신임교사 시절의 이야기다. 나른한 봄날, 오후 수업 시간이었다. 점심을 막 먹고 난 뒤라 식곤증이 올만도 한데 아이들의 눈망울이 평소보다 더 또렷했다. 입시를 앞둔 3학년이라고는 하나 딱딱한 의자에 온종일 앉아 수업받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마치 내가 잘 가..

빗속을 거닐며 / 원종린

'검은 비'라는 작품이 전후 일본의 베스트셀러의 으뜸으로 꼽히고 그다음은 '들불(野火)'이라고 한다.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마치 일본 서적의 선전문 같아서 겸연쩍은 생각이 없지도 않은데, 실은 일본에 파견교사로 가 있는 제자가 앞에서 말한 두 권의 책을 보내주어서 읽을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권이 다 값이 싼 문고판이기는 하지만 그 호의가 고맙기 이를 데 없다. 지난날에는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가 일본의 독서계를 풍미했었는데 이번 문고판은 처음 들어 보는 이름들이다. 전후에 저들의 나라에서 출판된 도서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터인데, 그중에서 인기의 서열이 1. 2위라고 하니 적지 않게 호기심이 일었다. '검은 비'는 일본 히로시마 시의 원폭피해(原爆被害)를 다룬 내용이고, ‘들불’은 ..

추젓 항아리 / 장경미 - 2022년 호미문학대전 흑구문학상

입이 푼푼한 항아리에 가을빛이 흥건하다. 각진 소금에 살찐 새우등이 톡톡 터지는 소리가 오후 햇살을 튕긴다. 소금의 짠맛에 구부렸던 고집마저 내려놓았는가. 딱딱하고 날카롭던 껍질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색의 절정을 이루었다. 뽀얗게 우러난 빛깔이 곱기도 하다. 작은 몸에 담았던 바다가 풀어져야 맛의 결정체를 이루는 추젓. 구룡포 조용한 마을 한 자락에서 가을의 깊은 맛을 내던 추젓이다. 배릿한 바다 냄새 속에 꾹꾹 눌러 보내온 추젓을 풀자 고모의 눈물이 철철 흘러넘친다. 소금과 새우가 만들어놓은 뽀얀 국물 속에는 고모의 처절한 삶이 녹아있다. 쉬이 놓지 못하고 떠나보낼 수도 없는 바다가 담겼다. 가을 바다를 넉넉히 품은 추젓을 고종 동생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한 숟가락 듬뿍 떠서 콩나물국에 넣고 휘휘 저으면..

소심한 책방 / 배혜숙

바다 저 너머에 있다는 이상향인 아틀란티스. 플라톤의 대화록에 나오는 전설상의 고대 국가다. 땅은 기름지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낙원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풍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그 전설의 왕국이 서점으로 태어난 곳이 있다. 바로 에게해의 석양을 바라보는 곳, 산토리니 섬의 북쪽 끝에 있는 '아틀란티스 북스'다. 여러 해 전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 한 권을 받았다. 내 꿈이 우리 동네 대양서점의 주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어릴 적 친구가 보내 주었다. 저널리스트 시미즈 레이나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었다. 근사한 사진과 함께 세계 각지의 아름다운 서점 스무 곳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책에 첫 번째로 소개된 곳이 아틀란티스 북스였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서점은 없었다. 언젠가 《..

얼굴 / 김잠복

현관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쭈그렁 망태기 얼굴에 거뭇한 기미가 군데군데 피었다. 희끄무레한 머리카락은 실타래처럼 늘어졌다. 눈동자는 게슴츠레한 데다 볼살이 축 처치고 입은 불퉁하니 튀어나와 턱밑 주름살이 쌍으로 더해져 영락없는 불도그 형상이다. 거기다가 후줄근한 벙거지 모자와 무릎 나온 운동복 차림이니 거지 중 상거지상이다. 사람의 첫인상을 가늠하는 것이 얼굴이다. 얼굴을 보면 그가 살아온 흔적이나 현재의 삶은 물론 인품까지 읽힌다고 하니 집이면 대문이고 상점으로 치면 간판이다. 실제로 내 간판이 이리 비호감이 들 정도니 누가 감히 물건을 사러 들어오겠는가. 보는 순간 질겁해 줄행랑을 치고 싶을 게다. 자신의 얼굴에 자신이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싶다. 젊고 고운 얼굴을 가진 이라도 더..

춤 / 최운숙

한 여인이 펼쳐진 억새밭에서 춤을 춘다. 느릿느릿 일정한 형태도 없이 흐느적거린다. 마치 내면의 슬픔을 끌어내듯 춤이 진행된다. 그녀의 의식에 따라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다 눕는다. 영화 의 시작 장면이다. 친정엄마는 한 번도 당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머니의 매운 시집살이와 아버지의 가벼운 주머니도 말없이 받아냈다. 구성지게 뽑아대는 판소리 여섯 마당이 아버지의 목소리로 주막에서 흘러나왔을 때도, 한나절 내내 약장수와 어울려 다니다 분 냄새 풍기고 들어와도 모른척했다. 남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으나 가족에게는 불같았던 아버지와 달리, 훅 불면 날아갈 듯 한 가랑잎 같은 엄마가 가정을 지키는 것은 사막의 낙타처럼 감내하는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어려..

적도 문학상 대상 수상작/그섬에서 온 편지/신정근

바닷바람이 선선하다. 가끔 성난 바람이 불어와 탁자 위에 놓인 안경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자바 해(Java S ea)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짠 내음이 코 끝을 스치며 맥주의 향과 함께 공기 중에 잘 버무려진다. 내가 머물 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마카사르는 그런 곳이다. 해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태양의 뜨거움만큼 유명하고 더 불어 이곳을 기착지 삼아 드나드는 수많은 배들도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으리라. 이 먼 타국(他國)에 서 나는 나의 고향, 서울을 생각하고 또 그 가을의 맑고 시원한 단풍잎의 싱그러움과 함께 바쁜 도시인(都 市人)들의 거친 숨소리와 ‘또깍또깍’소리 내어 걸어가는 구둣발 소리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시크 한 듯 속도 있는 서울 말씨와 도시 이곳 저곳의 카페에서 스며져 나오는 볶은 ..

최고의 유희 / 백명철-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당선작

올해로서 결혼 사십 년을 맞았다. 고맙게도 그간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왔다. 아내는 나의 일이나 생활습관 등에 대해서 별 말없이 잘 따라 주며 가장의 대우를 해주었다. 그런데 일흔을 넘기고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점차 잔소리가 많아졌다. 나의 어둔함이 자꾸 눈에 뜨인 때문이었다. 한번은 이웃 혼사에 빈 봉투를 축의금으로 낸 일이 있었다. 집에서 정성스레 봉투를 마련했는데 그 안에 돈을 넣지 않은 채 접수했던 것이다. 다행히 다음 날 전후사정을 감지한 혼주가 귓속말로 알려주어 얼른 송금했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황당한 그 사건을 들은 아내는 순간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 후, 아내는 '물가에 내 놓은 아이' 운운하며 부쩍 나의 행동거지에 신경을 썼다. 하지만 듣기 좋은 말도 한 두 번이라고, 급하..

아귀 /윤정인

찬바람이 어시장을 휘돌고 간다. 시리고 헛헛한 속을 데워줄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 장바구니를 들고 나온 참이다. 동태, 대구, 도루묵을 견주다 손질된 아귀가 눈에 들어왔다. 싱싱한 애와 곤, 간과 위 내장도 함께 좌판에 진열되어 있어 보기에도 풍성하다. 겨울이면 어촌에는 아귀가 지천으로 널린다. 한때 동해안 집집의 마당과 옥상에는 오징어가 많이 널렸다. 어느 날부터 오징어가 자취를 감추자 아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머리 떼어내고 내장을 발라내고 빨래처럼 줄에 널어 반 건조시킨다. 멀리서 보면 깃발 같기도 한 것이 무슨 점령군처럼 기세등등하기도 하다. 예전에는 아무도 아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물고기 씨가 마른 요즘에야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다. 거무튀튀한 색깔에 몸체는 두루뭉술한데 험상궂은 머리가 ..

2017시니어문학상 특선/빈집/배정순

어느 날 통로 현관 앞에 폐기 처분하듯이 마구잡이로 끌려 나온 이삿짐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속 불편한 사람이 오물을 토해내 놓은 듯 뒤죽박죽이었다. 꽤 괜찮은 물건들도 더러 있 었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끄는 건 윤이 자르르 흐르는 장 단지였다. "장 단지가 참 곱네요." 했더니, 이삿짐센터 인부가 "필요하면 가져 가이소" 한다. 탐이 나는 단지를 골라 얼른 엘리베이터 입구에 가져다 놓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다 싶어 주인을 찾았더니 만날 수 가 없다. 인부의 말이 장독의 주인은 윗집 할머니라고 했다. 순간 흠칫했다. 횡재했다고 좋아하던 마음이 싸 늘히 식어 밀물처럼 빠져나갔다. 단지를 슬그머니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장 단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