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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시니어문학상 특선/빈집/배정순

테오리아2 2022. 9. 22.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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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통로 현관 앞에 폐기 처분하듯이 마구잡이로 끌려 나온 이삿짐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속 불편한 사람이 오물을 토해내 놓은 듯 뒤죽박죽이었다. 꽤 괜찮은 물건들도 더러 있

 

었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끄는 건 윤이 자르르 흐르는 장 단지였다.

 

"장 단지가 참 곱네요." 했더니, 이삿짐센터 인부가 "필요하면 가져 가이소" 한다. 탐이 나는 단지를 골라

 

얼른 엘리베이터 입구에 가져다 놓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다 싶어 주인을 찾았더니 만날 수

 

가 없다. 인부의 말이 장독의 주인은 윗집 할머니라고 했다. 순간 흠칫했다. 횡재했다고 좋아하던 마음이 싸

 

늘히 식어 밀물처럼 빠져나갔다.

 

 

 

단지를 슬그머니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장 단지로 인해 어르신의 외로움이,

 

증이 나에게 옮겨붙을 것 같아 께름칙했다. 인부들은 이삿짐을 마구잡이로 트럭에 싣고 있었다. 버려지는

 

가재도구가 마치 윗집 할머니 모습 같아 짠했다. 윗집에 올라가 보니 할머니가 계실 때는 벨을 눌러도 열리

 

지 않던 문이 활짝 열려 속살을 훤히 드러내 놓고 있다.

 

우리 집 윗층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다. 층간 소음으로 갈등이 잦은 요즘 아래층에 사는 우리로선 시

 

끄럽지 않아 좋았다. 윗집 할머니가 어떤 분이실까 궁금했다. 이사 떡을 돌리는 데도 유독 윗집만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도 늙어서일까. 은근히 마음이 쓰였다. 그 후로도 먹을거리를 들고 찾아갔지만,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앞집 얘기로는 원래 할머니는 바깥세상이 두렵다며 문을 잘 열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우연히 할머니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교사 출신으로 정년퇴직해 혼자 살고 있으며 명문대를 나와 성

 

공한 두 아들이 있다고 했다. 하루는 분리수거장에서 여느 어르신과 달리 기품이 있어 보이는 할머니를 만

 

났다. 내심 반가운 마음에 "혹여 우리 윗집 어르신이 아니신가요?"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경계하는 표정으

 

로 낯설게 나를 바라보았다. 가냘픈 체형에 외로움이 묻어났다.

 

할머니 뵙지 못한지 멸 달이 지났나 보다. 뜻밖에 할머니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손질하지 않은 반백의 머

 

리는 어깨 위에 어지럽게 늘어져 있고, 옷매무새도 전에 뵙던 모습과는 달랐다. 귀도 어둡다는 분이 물 내

 

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며 우리 집에서 물을 쓰고 있지 않았냐고 물었다. 아랫집에 와 물을 사

 

안은 아닌 것 같아 "어르신 윗집에 가셔서 물어보시지요." 했더니 이미 확인을 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마음

 

에 시설에 들어갈 것을 권했더니 자식들 체면 깎인다며 말도 못 붙이게 했다.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그 자식들은 알까? 내 안의 신체적 변화도 감지하지 못하고 밖에서 원인을 찾고 있

 

다니 보통 일은 아니었다. 역시나 본인은 치매 증상을 갖고 있어서 정신이 없다고 했다. 일흔을 조금 넘은

 

분이다. 다른 노인들처럼 아파트 단지 내의 노인정이라도 나가 사람 냄새를 맡고 살았더라면 저리되지는

 

않았을 텐데, 많이 배웠다는 게 되레 이웃과 어울리는 데 걸림돌이 아니었을까?

 

할머니가 저 지경인데 누구도 돌보는 기척이 없다. 정신없는 중에도 아들 체면 생각하고 시설입소를 거부

 

하던 할머니는 병증이 심해지자 그 아들 손에 의해 요양병원에 들어갔다. 이게 어디 윗집 할머니만의 일일

 

. 오늘따라 묵묵한 윗집의 동정이 썰렁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