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연어 /김 만 년

테오리아2 2022. 12. 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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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김 만 년

 

 

 

한 마리의 날쌘 상어처럼 미끈한 KTX가 출발을 서두르고 있다. 긴 장마 뒤라서 그런지 남쪽을 향해 쭉 뻗은 철길이 오늘 따라 산뜻하게 보인다.

 

홍보실이라는 낯선 바다로 흘러들어 온지 오늘로서 꼭 일백일 째에 접어든다. 창가를 어슬렁거리며 홍보용 보도자료를 건성으로 읽는다. 오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조금 전 집무실 앞에서 노조위원장을 만나고 부터이다.

 

어 김기관사님이 여긴 웬일이유?”

어허, 자네야 말로 여긴 어쩐 일로…….아 참, 오늘 노사협의가 있지, 반갑네…….”

 

한 때 막걸리 잔 부딪히며 고락을 함께 했던 옛 동지를 십년 만에 만났다. 사장 집무실 앞인지라 만남은 어색했고 짧았다. 먹먹한 손을 놓고 돌아 서는데 끝내 가슴 한 쪽을 짓누르던 그 무엇이 둔탁한 파열음을 낸다. 세월이 흘러도 상처는 자라는지, 돌아보지 말자고 애써 외면했던 기억들이 회한처럼 가슴 한쪽을 짓눌러 온다.

 

-분노의 기적

 

스물여섯에 기차를 출발시켰다. 철길을 따라 은륜을 굴리며 사람 사는 마을을 쉼 없이 돌아왔다. 어느 바람 부는 날이나 눈 오는 날에도 내가 살아왔듯이 기차는 달려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먼 하늘에 진눈깨비 내리듯이 추적추적 걸어가는 , 돌아본다는 것은 후회이고 슬픔이었다. 퇴행할 수 없는 기차의 숙명처럼 이미 정해진 궤도를 따라 이십년을 하루같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후회와 슬픔이 홀로 단단해지던 시간이다. 뒤돌아보고 싶다. 그것이 추적거리는 삶이고 부끄러움일지라도, 뒤돌아보면 철길이 보이고 철길 끝 어디쯤에선가 구절초처럼 흔들리고 있을 어머니가 보인다.

 

음습한 반 지하셋방, 아버지의 기침소리와 연탄을 갈던 아내의 작은 손, 동생과의 절연, 파업, 패배, 산자의 부끄러움, 차마 하지 못했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말간 생채기가 드러날 때까지 묵힌 죄들을 올올이 꺼내고 싶다. 저 굴절 없는 햇살에 단단하게 말리어 이제는 온전한 내 삶의 몫으로 담담하게 끌어안고 싶다.

 

한 시절, 찢겨진 깃발 펄럭이며 핏발선 눈동자, 노동자의 검은 레일을 질주하던 때가 있었다. '변형근로제 철폐, 18시간 근로 쟁취, 주휴일 보장등의 구호를 외치며 19946230시를 기해 전국기관차협의회(이하 전기협)주도로 열차를 세운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전기협의 정책을 담당하고 있었다. 집안을 내 팽개치다시피 하며 한 번 집을 나설 때마다 일주일치 양말을 싸들고 단식과 파업의 능선을 넘나들던 때였다. 비록 노동운동에 대한 이론적 토대는 부족했지만 철도라는 변방에서 열악한 근로환경을 뼈저리게 느끼고 무언가 바꾸어야겠다는 열정만은 뜨거웠다. 당시 전기협의 뿌리가 자생적으로 뭉친 현장 노동자들이 중심이었기에 동지적 결속력 또한 남달랐다.

 

내가 노동운동에 집착할수록 집안은 난파직전의 배처럼 위태해져 갔다. 선장이 없는 집안에서 생활의 무게는 고스란히 아내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육남매의 맏며느리로서 편찮으신 아버지, 그리고 시동생들 아이들, 이렇게 일곱 식구의 고단한 삶을 아내에게 맡긴 채 나는 위태한 배를 탈출이라도 하듯이 집회현장을 전전하고 다녔다. 아내는 장남으로서 집안을 돌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극구 말렸지만 그런 아내의 말이 내 귀에 들어 올 리가 만무했다. 졸지에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 때문일까. 결혼 두 달 만인 887.26 파업에 뛰어 들고부터 근 육년을 투쟁과 집회현장을 쏘다녔다. 그러나 아내의 걱정은 다른데 있었다.

 

-두 형제

 

그즈음 아내는 나와 시동생 사이를 오가며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집에 살면서 동생과 근 몇 년을 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 당시 동생은 고문기술자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모 경감이 근무했다던 모 대공분실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동생의 임무는 순수 대공 업무 보다가는 대기업 핵심 노동활동가들의 동향파악을 주로 하는 듯 했다.

 

처음에는 서로의 관점을 존중하면서 사회전반에 걸친 현상들을 주제로 많은 토론도 했다. 그러나 내가 점점 노조활동에 깊숙이 개입되어가자 분위기는 냉랭해져 갔다. 사소한 문제에도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몇 번의 갈등 끝에 피차 말수를 줄이며 서로의 일에 일체 관여를 하지 않았다.

 

언젠가 아버지의 큰 수술이 있던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큰 집회 일정이 잡혀있었다. 아버지의 수술과 집회참석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아버지의 수술을 동생에게 맡긴 채 집회장으로 갔다. 1부 행사로 지도부 구속결단식이 함께 잡혀있었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으면 사정을 모르는 조합원들에게 공연히 오해를 받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결국 동생과 나는 크게 다투었다. 아니 절연을 선언했다.

 

형이 장남으로서 그럴 수 있어! 엄마가 누구 때문에 그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럴러면 왜 장가는 갔어, 조카들은, 그리고 아버지는! 형은 블랙리스트 8번이야, 이대로 가면 파면이란 말이야 파면…….”

 

이 자식이 노동자 때려잡는데 근무하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어딜 형한테 대들어!"

 

나도 모르게 동생의 뺨을 후려쳤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퍼붓는 동생의 거센 항변과 돌아가신 어머니 까지 들먹이며 형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하자 일순간 쌓인 감정들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그것으로 동생과의 관계는 끝이었다. 꼭 필요한 말은 아내가 눈치껏 중개를 했다.

 

파면이라는 동생의 말에 아내가 충격을 받았는지 친정 쪽에서 걸려온 걱정전화에 아내는 자주 눈물을 찍었다. 시어머니 상중이라 결혼식도 제대로 못 치르고 어머니가 쓰시던 목걸이 하나를 예물삼아 난파직전의 가정에 나하나 믿고 시집왔는데, 이중으로 마음고생까지 하는 아내가 안쓰러웠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 도리가 없었다.

 

철도파업시한이 임박하자 정부는 연일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며 으름장을 놓았다. 전기협은 불법단체이기 때문에 파업즉시 핵심주동자는 전원 구속시킨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는 듯 철도청은 파면자를 대체한다며 즉시 기관사 내부공모에 들어갔다.

 

7.26 파업, 단식투쟁, 부당전출 등, 그동안 몇 번의 고비는 있었지만 파면이라는 단어가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오기는 이번이 처음이 있었다. 동생도 포기를 했는지 일체 말문을 닫았다. 밥상 하나를 사이에 둔 동생과의 거리가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멀었다.

 

-파업, 그리고 전출

 

지하철과 연대파업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6230시를 기해 철도가 먼저 파업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정부는 강공책으로 나왔다. 철도청은 파업시한 까지 단 한 번의 교섭신호도 보내오지 않았다. 아니 딱 한번 교섭을 일방적으로 통보해 온 적이 있었다. 협상참석여부를 놓고 용산 비대위본부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있는데 이미 언론에서는 노측의 교섭회피라는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측 간부들이 노측 대표들을 기다리는 영상장면과 함께 말이다. 대화와 타협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다분히 국민여론을 의식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정부의 강공책은 거의 융단폭격에 가까웠다. 언론동원, 가족에게 회유전화, 유언비어 유포, 내부분열 유도, 급기야는 용산 파업지도부에 공수특전사부대(기술요원)까지 상주시켰다. 이러한 강공책에도 불구하고 파업대오는 강경했다.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기관차 팔천대오는 집결조와 산개조로 나뉘어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힘은 거기까지였다. 파업 3일 만에 전선 곳곳에서 이상기운이 감지되었다. 이미 수도권만 직위해제 자가 200명을 넘고 있었다. 25일 아침 보라매공원에서 수배중인 비대위원장을 비밀리에 만나 명동성당에서 마지막 집결투쟁을 요구했으나 이미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부 임원회의에서 어렵게 이미 직위해제 된 임원들을 중심으로 삭발과 조계사 집결투쟁을 결의하고 의장과의 연결을 시도 했지만 그마저 허사가 되었다. 지원투쟁을 약속한 재야시민 단체도 오리무중이었다.

 

그렇게 그해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여름은 시작되었다. 전기협은 법외단체라는 한계 속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투쟁의 패배로 조직자체가 붕괴되었다. 한번 약세를 본 사측에서는 아예 운동의 씨 말리기 작업에 들어갔다. 파업 불참자들은 거 보라는 듯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고 열렬 조합원들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며 치욕과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단위지부의 지도력까지 공중분해 된 상황에서 조합원들은 줄줄이 전기협 탈퇴 각서라는 항복문서를 쓰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눈물을 쓰윽 닦고 패배의 상처를 삭이며 분노의 레일을 질주해 갔다. 나를 포함해 출근이 거부당한 직위해제자들은 다시 복직을 꿈꾸며 사삼삼오오 강으로 산으로 휴가 아닌 휴가를 떠났다. 어쩌면 철도에 들어와서 첫 공식휴가를 얻은 셈이었다.

 

어쩐 일인지 파면자의 명단 속에 내 이름이 없었다. '만약에 잘못 되면 아버님 모시고 그냥 시골 가서 살자.' 손바닥만 한 땅도 없었지만 징계위 출석을 앞두고 아내를 다독였던 말이다. 그즈음 심신이 무척 지쳐있을 때였다. 파면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3감 이상의 중징계자들은 전출이라는 이중고를 당하고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2감을 받은 나는 지방전출은 가까스로 면했지만 산자로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자넨 어떻게 용케도 안짤렸네.”

 

어느 술자리에선가 동료가 하던 말이다. 비수를 꽂는 상처였다. 미안했고 답답했고 억울했다. 떠나고 싶었다. 부끄러움과 상처와 회한만 남았다. 조합원들은 무관심과 냉소주의로 돌아섰다. 폐허의 깃발만 나부끼고 동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즈음 나는 <참된 시작>이라는 어느 노동자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었다.

 

엄혹한 겨울도 두꺼운 껍질도/제 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것이다. 끝까지 가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처절한 자기성찰이었다. 전망이 없던 그해 여름, 그렇게 한권의 책을 가슴에 꼬옥 안았다. 사람들은 그를 변절자라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안동소주 한 병의 화해

 

일산으로 근무지를 옮기고부터 삶에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그것은 주말농장에 대한 애착이었다. 열 평 남짓한 채마밭에 상치 열무 겨자채 방울토마토 강낭콩 등, 이른 봄부터 만물상을 차려놓고 한 촉 한 촉 움트는 생명들을 보며 참 많은 행복을 느꼈다. 농작물은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지만 나는 사실 이 농작물들이 나를 키운다고 생각했다. 파란 손바닥을 내밀며 자라는 초록 이파리들을 보면 왠지 겸손해지기도 하고 흙을 만지노라면 모난 마음 둥글어 지는 것도 같았다. 고개를 들면 하늘이 있고 구름이 있고 새들이 날아간다. 적개심으로 이글거리던 눈빛도 차츰 선해져 갔다. 철길이 곡선으로 에둘러 가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해 보기도 한다. 분노는 갔고 그리움만 남았다.

 

미루었던 문학공부도 틈틈이 했다. 노동현장에서 느낀 체험이나 불합리한 점들을 잡지나 신문 기고를 통해 나름대로 노동조합에 대한 부채를 조금이라도 탕감해 보려고 애를 썼다. 모처럼 아내가 행복해 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동안 동생도 결혼을 해서 새 둥지를 틀었다. 여전히 철도환경은 열악했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왔다. 해고자들도 하나 둘 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노동조합도 민주노조의 기틀을 확고히 세웠고 활동가들도 젊은 운동권 출신으로 세대교체가 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당신 삼촌한테 너무 심하게 대하면 안돼요. 삼촌한테 큰 신세 진거 알기나 하세요?"

어머니 산소 문제로 전화통을 붙잡고 동생에게 언성을 높이던 것을 보고 아내가 작심한 듯 나에게 던진 말이었다. 신세는 무슨 신세냐고 반문하면서도 나는 무언가 집히는 데가 있어 아내를 다그쳐 물었다.

 

당신한테는 절대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이젠 어지간히 세월도 흘렀고, 당신도 알고는 있어야겠기에……,당신 그때 파면 될 뻔 했잖아요, 그게…….”

 

아내는 얼른 뒷말을 얼버무렸다.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그 무엇이 있었다. 아내를 재차 다그쳐 물었다.

 

형수요! 형한테는 절대로 비밀로 해 주소. 대공파트에 있어봐야 말단 경찰인 제가 무슨 힘이 있니 껴! 오늘 안동소주 한 병 사들고 징계위원장 한테 가서 무릎 꿇고 왔니더! 내가 보증할테니 우리 형 한 번만 살려 달라고 말일시더!”

 

징계위가 열리기 전날 동생이 술을 잔뜩 먹고 와서 울먹이며 아내에게 털어 놓던 말이란다. 나는 순간 무언가 한 대 얹어 맞은 듯이 머리가 띵해져 옴을 느꼈다. 혹시나 하는 직감이 딱 들어맞았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치밀어 올라왔다. 동생의 얼굴과 옛 동지들의 얼굴이 동시에 교차되어갔다. 지난 세월, 마음의 금을 긋고 동생을 외면해 왔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오가는 길목에서 그래도 덤덤하게 악수를 해 주는 옛 동지들이 고마웠다. 며칠 후 나는 동생에게 한 통의 전화를 했다.

 

별일 없나, 요번 일요일 날 아이들 데리고 한 번 다녀가라. 저녁이나 같이 먹자

 

-다시 한 마리의 연어를 꿈꾸며

 

이십년이 넘도록 승무생활을 했으니 이제는 기관사 생활에 어지간히 넌더리가 날 때도 되었건만, 나는 웬일인지 가감간만 잡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아내한테 종종 만년기관사라는 놀림을 받아왔다. 그동안 몇 번인가 홍보실 근무 제의가 있었지만 이름처럼 만년기관사로 남겠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한 번쯤 넓은 바다로 나가서 새로운 경험을 해 보라는 아내와 동료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바람은 늘 엉뚱한 곳에서 불어왔다.

 

년 초에 투신으로 인한 사상 사고를 겪었다. 그것도 오일 간격으로 같은 열차 같은 시간대에 연속적으로 두 번씩이나 일어났고, 두 명 모두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십년 만에 처음 겪은 일이었다. 삼일의 위로 휴가 동안 심한 무기력증과 공한증에 시달렸다. 무슨 귀신이 붙었는가 하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고순간의 환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이들 보기도 죄스러웠다. 처음으로 직업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무슨 운명인지 그즈음 홍보실에서 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가도 좋다. 이런저런 조건들을 붙이며 얼마간이라도 함께 근무하자는 요지였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터라 잠깐 외도한다는 마음으로 덜컥 결정하고 말았다.

 

망망대해로 밀려 온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빠르고 이질적이었다. 야생마처럼 철저히 현장만 떠돌던 체질이라 홍보실은 태생적으로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정체성 문제였다. 현장과 경영진의 양 극단을 동시에 보면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불가능 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스러웠다. 현장성, 노동자성을 잃지 않겠다고 아무리 다짐해 본들 자리가 사람을 바꾸는 것임을 현재 뼈아프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홍보실에 가기 전 어느 동료가 나에게 해 준 말이 떠오른다.

 

 

기차를 타고 밖을 내다보면 기차는 가만있고 전봇대가 뒤로 움직이는 것 같지. 우리는 움직이는 것은 전봇대가 아니고 기차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다고 전봇대가 서 있고 기차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 진실을 제대로 보려면 기차에서 내리는 수밖에. 그러면 움직이는 것은 기차라는 것이 아무 생각 없이도 분명하게 드러날 테니까.”

 

쭉 뻗은 철길너머로 아침햇살이 따갑게 내리쬔다. 철길을 걸어가는 일하는 사람들의 어깨가 듬직하다. 이 세상을 열어가는 정겨운 사람들이다. 불현듯 가슴이 뜨거워진다. 돌아가리라. 비록 고독한 철길이지만 그래도 철길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내가 있었기에 오늘도 기차는 달리는 것이라고, 삭막한 人情들을 따뜻하게 연결시켜주는 두 줄기 철길의 중심을 그래도 내가 달려 온 것이라고, 돌아가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옛 동지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리라. 남겨진 철길의 여정을 완주해야겠다. 주말농장이 있고 기적소리가 있고 동료들의 자잘한 웃음소리가 있는 내가 살아 온 일터로, 바다를 박차고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의 연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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