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어쩔, 파스/ 김근혜 수필가

테오리아2 2023. 11. 8.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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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에 낯선 중년 부인이 서 있다. 본 듯, 아는 듯, 마는 듯한 사람이다. 웃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한쪽 손엔 파스가 들려 있다. 그 꼴이 가관이다. 울퉁불퉁한 전라가 숨김없이 드러난다. 여성 스모 선수가 전쟁터에 나가기 직전 모습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자신이 봐도 봐줄 만한 꼴이 아닌지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끔은 벽이 돼야 하는 자신이 웃프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자주 아프다. 근육통이 새삼스럽지 않은 나이다. 아픈 부위에 파스를 붙인다. 잠시 통증이 진정된 듯 하나 부작용으로 피부 발진이 온다. 붙어있어도 떼어내도 가렵다. 강력한 접착제는 뗄 때가 더 고통스럽다. 일방적인 사랑처럼. 사랑이 너무 뜨거우면 불에 데듯이 파스도 뜨거운 것과 함께하면 화상을 입는다. 아픔을 견디고 억지로 떼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약효 없이 끈적거릴 때다. 스쳐 지나가는 꼬물거림, 나도 한때는 화끈거리는 사랑이 있었다.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파스를 붙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럴 땐 혼자 사는 것이 불편하다. 혼자 사는 이들이 파스 붙일 때가 가장 외로울 때라고 했다. 어떤 이는 방바닥에 파스를 펴놓고 몸을 그 부위에 밀착시킨다고 한다. 하나 노선이 빗나가는 건 고사하고 멀쩡한 부위에 엉겨 붙어서 떼기도 힘들다고 푸념한다. 마치 싫은 사람이 치근거리며 들러붙어 있는 느낌이라나.

끙끙거리다 결국엔 포기하고 만다. 그런 날엔 화풀이 대상이라도 되는 듯 애꿎은 파스를 집어 들고 벽에다 내동댕이친다. 그것도 모자라서 칼날 같은 말을 쏟아낸다. 나는 누구에게 화풀이 하는가. 오랫동안 케케묵은 먼지 같은 감정의 찌꺼기가 올라온다.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들까지 다 깨워서 사건들을 파헤치고 분노를 쏟아낸다. 파스는 낄낄거리며 약이라도 올리듯이 벽에 철썩 달라붙어 주무시고 계신다. 엉키고 구겨진 채로.

 

아픈 이들을 위해 태어났으면 그만한 예의를 갖출 것이지 건방지다. 자신에게 고개라도 숙이길 바라는 것인가. 세상 공부를 다 끝낸 양, 인간을 부린다. 절박한 인간의 등에 올라타서 반란이나 일으키고 분노를 심어 놓는다. 괘씸하기 그지없다. 이건 분명 항명이고 굴욕이다.

 

인생은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와 같아,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엔 아무 의미도 없어. 어쩔, 파스(어쩌라고, 파스나 붙여)”

TV를 많이 봤는지 신조어로 명령한다.

 

인생이 걸린 문제인 양 목숨을 건다. 감히 인간에게 손바닥만 한 게 덤비다니……. 파스 하나 붙이는 일에 감정 소모가 크다. 때론 굿바이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내 속내를 현미경으로 보듯 훑고 있어서다. 자신이 나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걸 벌써 알아챈 것 같다. 수를 들켰으니 내 꼬리가 절로 내려간다. 교관이 따로 없다. 아웅다웅하다 서로가 길들고 길들어 가겠지.

 

도와줄 이 하나도 없을 때만 쑤시고 손이 닿지 않는 부분만 통증이 온다. 차라리 마음이 아프면 가슴팍에다 붙일 수나 있지. 난 배가 아파도, 심장이 쓰려도 파스를 붙인다. 그런 곳에 파스를 붙이는 내가 너무 웃긴다고 웃는데 난 슬프다. 그 말이 상처를 건드려서 덧나기도 한다.

 

욱신거리는 등의 통증은 짐을 나눠서 질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집안일을 조금만 해도 등으로 오는 신호, 빨간불이 켜진다. 사력을 다해 파스를 붙이려고 숨을 고른다. 팔이 짧아서 도착 지점까진 멀고도 긴 여정이다. 팔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잠시 몸을 푼다. 그리고 손과의 호흡을 맞춘다. 거울을 보며 각도를 잡고 등을 더듬는다. 손가락 사이에서 대롱거리다 통증 부위를 비껴가고 만다. 닿을 듯 말 듯, 끙끙거리다 결국엔 바닥으로 떨어지는 파스. 사랑이 다 해서 버리고, 버려지는 것 같다. 아쉬워 다시 주워들었다가 끊어진 인연에 애쓰는 듯해서 마음을 접었다.

 

파스는 여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존재감을 과시하려 든다. 정거장마다 다 거치고 몇 번의 죽음 끝에 겨우 길을 찾는다. 몸에 닿는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시원하다 못해 얼음장 같은 느낌에 온몸이 둥글게 말린다. 일체가 머물고 속살까지 끈질기게 파고드는 화끈거림이 오그라들었던 몸을 공처럼 부풀린다. 닿지 않는 뼈 마디마디, 구석 자리까지 기운이 퍼진다. 지끈거리던 삶의 통증이 손바닥만 한 파스 한 장에 녹아내린다.

 

-좋은수필 2023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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