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글

푸네기 아리랑- 김근혜

테오리아2 2018. 4. 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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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네기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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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 정리를 하다 통장을 뒤졌다. 남편은 몹시 불안한 듯 보였다. 갑자기 통장을 보여 달라고 하니 슬금슬금 피한다. 이십여 년 동안 살면서 통장을 보자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럴 만도 했다.

 

아주버니는 교통사고로 한쪽 눈을 다쳐서 직장을 잃었다.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술로 나날을 보내다 고향으로 내려갔다. 시동생들은 아주버니가 자리 잡을 동안 생활비를 보태기로 했다. 동생들이 보태주는 것을 처음에는 체면치레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당연히 여겼다. 문중들의 남는 땅을 경작했지만, 경험이 없는 터라 실패를 거듭했다.

 

벼농사만으로는 별 수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듬해에는 동네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수박농사를 지었다. 몇 년 동안은 그럭저럭 수익을 냈다. 수입이 짭짤해지니 용기를 얻어서 수박밭을 확장했다. 옆의 땅을 빌려 참깨도 뿌리고 나름대로 정성을 기울였다. 농사에 재미를 붙이고 마음이 안정된다 싶었는데 이상기온으로 피해가 컸다. 불볕더위로 수박은 열매도 작고 생으로 익어 피수박이 되었다. 저온현상으로 참깨는 참깨대로 쭉정이가 되어 아주버니는 홧김에 땅을 갈아엎었다.

 

시동생들은 농부의 마음을 알 턱이 없었다. 씨앗 값 정도만 생각하고 농작물 하나하나에 들인 수고와 땀과 시간을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위로한답시고 한 말에 아주버니는 화를 벌컥 냈다. 농사꾼은 한 해의 수확으로 일 년을 먹고산다며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운 것이 수확도 못 하고 뒤집어엎는 심정을 아느냐고 역정을 냈다. 견디다 못해 술 먹는 날이 늘어갔다. 시부모님은 그런 아주버니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뒷감당은 시동생들이 했다. 땅도 사주고 소도 사주며 집안의 장남이 하루라도 빨리 마음잡기를 바랐다.

 

셋째 동서는 화병이 나서 몸져누웠다. 빚도 많은데 아주버니를 돕느라 속이 곪았다. 시동생은 결혼 전부터 시댁을 돕느라고 빚을 져놓은 것이 많았다. 동서에게는 빚진 것을 속이고 결혼했다. 속 좋은 동서는 그럴 수 있다며 툭툭 털어냈다. 힘든 형편에 아이 둘을 양육하는 것은 무리라며 하나만 낳았다.

 

시동생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보너스에다 가끔 들어오는 부수입까지 동서 몰래 아주버니에게 주다가 들켰다. 도장 찍자는 말이 오가고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다른 동서들의 삶도 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속으로 삭이며 참고 기다렸다.

 

셋째 동서가 아주버니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동서의 모진 말이 가슴을 훑었는지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보다 못한 남편이 아주버니를 위해 블루베리 재배에 관련된 서적을 사다가 틈틈이 익혔다. 블루베리가 잘 자랄 수 있는 땅도 살피러 다녔다. 묘목을 사다 심고 가꾸면서 추이를 살폈다.

 

블루베리 꽃눈이 달렸다. 전지할 일손이 부족하다는 구실로 가족 모임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나무의 영양 생장을 위해 꽃눈을 제거하는 것은 필수였다. 꽃눈은 잘라내야 할 불필요한 부분이듯이 가족들이 아주버니에게 가졌던 좋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서로 말은 하지 않고 있었으나 아주버니 때문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꽃눈을 자르면서 응어리졌던 부분들을 같이 버렸다. 동서들의 가위 소리도 힘찬 걸 보니 내 마음과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 사랑과 희망의 꽃눈만 남겨두고 겹겹이 쌓여 있었던 원망과 분노를 사정없이 잘라냈다. 날카로운 가위 앞에선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꽃눈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밟혔다. 아주버니는 우리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꽃가지 하나를 꺾어서 슬며시 건넸다.

 

블루베리는 어둡고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 예쁜 열매를 달았다. 조롱조롱 매달린 블루베리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가족은 기뻐서 얼싸안았다. 블루베리는 꽃도 아름답고 열매도 앙증맞게 귀엽다. 사랑스러운 자식이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고 있는 것 같다. 아주버니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해 있던 동서들도 블루베리의 아름다움에 빠져 넋을 잃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가족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견디어 낸 사랑의 결실 같아 뿌듯했다.

 

아주버니는 언제 몸살을 앓았느냐는 듯이 어깨를 툭툭 틀었다. 물가에 내놓을 수 없을 만큼 위태위태했던 사람이 이젠 튼실한 나무가 되어 있다. 수확의 기쁨과 사랑하는 사람을 숨겨두고 몰래 만나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고 있다. 술에 찌들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블루베리 꽃처럼 연보랏빛 삶이다. 블루베리를 판매하며 전국을 누비는 아주버니의 환한 미소를 볼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동네 어르신들도 아주버니의 재기를 축하해 주었다. 이장님은 사시 합격생이라도 나온 듯 싱글벙글하며 확성기에 목소리를 높였다. 아주버니가 블루베리를 처음 수확하던 날은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마을회관에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가 승전가처럼 들렸고 시끌벅적한 소리는 잠자던 동네를 들뜨게 했다. 생전 얼굴도 내밀지 않던 욕쟁이 할머니까지 신발을 끌며 나왔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도시에선 꿈도 꾸지 못할 소박한 냄새다. 마을회관이 어르신들의 공간에서 중년층들의 공부방으로 변해갔다. 블루베리 성공담이 입소문으로 전해지면서 다른 동네 사람들도 재배법을 배우러 아주버니를 자주 찾게 되었다.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도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도 훗날을 대비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참석했다. 2의 인생을 꿈꾸는 자들로 마을회관은 젊어졌다. 푸네기 형제들의 좌충우돌 성공담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남편이 몇 그루의 통장 나무를 개설한 사실을 이실직고했다. 은퇴 후의 삶을 블루베리 묘목에 갈무리해 둔 것이라고.

 

* 푸네기 - 가까운 제 살붙이를 낮게 부르는 말.

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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