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혜 수필가 33

뽁뽁이-김근혜

뽁뽁이 김근혜 요즘 뽁뽁이가 인기다. 유리나 깨지기 쉬운 물건을 싸는 포장지가 난방용 단열재로서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비닐에 볼록볼록 튀어나온 것을 장난삼아 봉숭아 씨앗 터뜨리듯 톡톡 터뜨리던 에어캡이 바람막이 노릇을 한다. 우리 집은 남향이라 태양열로 인해 낮 동안은 난방하지 않아도 추운 줄 모르고 지낸다. 저녁 한 차례만 난방해도 훈기가 돈다. 그래도 북쪽에 있는 아이들 방은 해가 들지 않기 때문에 웃풍이 좀 있다. 아이들 방에 장미꽃 그림이 있는 뽁뽁이를 붙였다. 썰렁해 보이던 방이 봄을 맞았다. 추운 겨울임에도 아이들 방은 장미향이 가득한 5월이 되었다. 뽁뽁이를 보니 주택에서 살던 때가 생각난다. 허허벌판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은 모든 것을 날려버릴 기세였다. 집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지붕을 ..

근* 글 2018.04.04

탈, 탈, 탈-김근혜

탈, 탈, 탈 김근혜 그들을 만났다. 처음 만난 그들에게선 은행 냄새가 심하게 나서 숨을 고르기 힘들었다. 음식 찌꺼기도 삶의 슬픔처럼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그런 얼굴로 활짝 웃으며 반기는 모습은 이슬을 머금은 나팔꽃 같았다. 얼결에 따라 웃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마음이 들킬까 봐 억지로 입꼬리를 추어올렸다. 넘어질 듯 달려와 반길 때면 거부감은 눈 녹듯 사라지고 고마움에 덩달아 달려가게 되었다. 저리 반겨준 사람이 있었던가. 살붙이도 그런 적이 없었다. 이젠 그들보다 내 가슴이 먼저 뛴다. 달팽이에게 가슴이 베인 설중화 수선, 한 몸에 머리가 두 개인 샴쌍둥이 루드베키아, 탯줄이 잘린 등심붓꽃, 그들은 탈頉이 있다고 발치를 당해 여기저기 떠돌며 활착하는 꽃들이다. 나는 사회복지시설에서 선천성 장..

근* 글 2018.04.04

“돼!”-김근혜

“돼!” 김근혜 장자는 인격화된 사람, 신격화된 사람, 성인화된 사람, 세 가지 모습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인격화된 사람이란 자기가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 즉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요즘 시대에는 자신을 알리는 것이 비즈니스다. 장자의 말이 시대에 맞지 않을 수 있으나, 명함을 받다 보면 동네 통, 반장한 것까지 상세하게 나열해서 거부감이 일 때가 있다. 적당한 범위 내에서 자신을 알리는 지혜로움이 필요할 것 같다. 자신이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인격화되지 못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비슷하다. 자기 과시를 잘하고 영웅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단체 생활에서는 늘 큰소리를 내며 자신의 주장을 앞세운다. 관철되지 않으면 마음이 뒤틀려서..

근* 글 2018.04.04

우산-김근혜

우산 김근혜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할머니 몇 분이 우산을 쓰고 간다. 그 옆에 어정쩡하게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따라가는 또 한 할머니가 있다. 허리까지 굽어 잰걸음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갑자기 내린 비로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나 보다. 함께 걷는 사람들은 우산 씌워 줄 생각은 없는지 걸음만 재촉한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너는 우산도 없느냐고 한마디 던진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감정이 섞인 말투다. 노인정에 같이 있다가 나온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보기가 안쓰러워서 빨리 할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우산을 씌워드릴까 하다가 마음을 더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우산도 없느냐는 소리가 귀에서 떠나질 않는다. 흘려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말이..

근* 글 2018.04.04

아버지께 올리는 속건제(贖愆祭)-김근혜

아버지께 올리는 속건제(贖愆祭) 김근혜 아버지는 땅을 팔면서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렸다. 외지인이 와서 공장을 짓는다며 땅값을 비싸게 준다고 했다. 귀가 여린 아버지는 그 꾐에 계약금만 받고 땅문서에 덜컥 도장을 찍었다. 쉰을 넘긴 아버지가 맨손으로 일어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산을 잃어버린 심정이 오죽했을까. 목숨을 끊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곡기를 입에 대지 않고 벽만 보고 있는 날이 많아졌다. 자다가도 화가 차오르는지 가슴을 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럴 때마다 조바심이 나서 아버지 방을 기웃거렸다.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닥쳐도 흔들리면 안 된다고 밥상머리에서 누누이 강조하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세상이 다 짐으로만 보인다며 등을 점점 바닥에 누였다. 밝은 달도 떠나고 맑은 바람도 불어..

근* 글 2018.04.04

나는 염산이었을까-김근혜

나는 염산이었을까 김근혜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느 작가의 발표 글이 자신의 글과 비슷하다고 했다. 부랴부랴 지인의 글과 비교하며 읽어 보았다. 어느 부분에선가 읽었던 대목이 스쳤다. 지인은 그 작가와 만난 자리에서 얘기를 나눈 것 같다. 작가의 글과 자신의 글이 비슷한 것 같다고. 다행하게도 지인은 그날 밤 작가와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고 했다. 지인의 진심 어린 사과를 작가도 순순히 받아들인 것 같다. 작가를 미워했던 마음이 눈 녹듯 가라앉고 좋아지기 시작했다며 미안해했다. 지인의 새로운 면을 보았다.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면 관계가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일이란 벌리기는 쉬워도 수습하기는 어려운 일 아닌가. 자신의 잘못된 점을 바로 인정할 줄 아는 지인이 아름답게 보였다. 수업 갈 때면 ..

근* 글 2018.04.04

줄-김근혜

줄 김근혜 햇살 머금은 강물 위로 하얀 나비 떼가 나폴나폴거린다. 소슬한 바람을 타고 뱃사공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맞춰 나룻배가 닻을 내릴 것만 같다. 강원도 황지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봉화에서 흘러드는 내성천, 문경의 금천 물줄기가 만나 삼강을 이룬다. 서로 다른 세 갈래의 물길이 합류하는 간이역이 합수머리이다. 지금은 4대강 개발로 흔적은 간 곳 없고 한 줄기 물살만이 역사를 품은 채 유유하다. 사그락사그락 댓잎 소리를 들으며 선비가 걸어갔을 법한 역사의 뒤안길로 내 발자국도 따라간다. 담장 너머로 조선 시대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이 동양화처럼 펼쳐진다. 주막과 더불어 몇백 년은 됨직한 회화나무엔 솜털 구름이 다리쉼을 하고 있다. 주모가 버선발로 쫓아 나와 반길 것만 같고 가마솥에선 길손을 기다리는 국..

근* 글 2018.04.04

사치스러운 신음-김근혜

사치스러운 신음 김근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손수레에 실린 파지, 술병, 깡통, 잡동사니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쪽으로 쏠려 있다. 미끄러운 빙판길에서 할머니는 손수레 모는 일조차 힘에 부쳐 곧 넘어질 것 같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쌓아둔 폐지를 가져가라고 할머니에게 사무실 비밀번호를 가르쳐 줬다. 그런데 쓰고 있는 가재도구를 몽땅 가지고 갔다. 직원들과 밥도 해먹고 라면이라도 끓일 요량으로 솥 몇 개, 수저 몇 벌 등을 갖춰두었었다. 깨끗이 닦아두지 않았더니 버리는 것으로 알았나 보다. 사무실에서 가져간 가재도구가 쇠붙이라서 횡재했다고 감사의 말을 거듭했다. 온종일 다녀도 몇천 원 벌기가 쉽지 않고 헛걸음하는 날이 더 많다고 했다. 얼마 전에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본 ..

근* 글 2018.04.04

욱수천의 봄-김근혜

욱수천의 봄 김근혜 생목 오르는 봄, 사람들은 느린 걸음으로 마을을 떠났다. 노을만이 지붕 위에 머물다 산을 넘었다. 그들은 울지 않았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두 시대가 공존하고 있다. 건너편에는 다 쓰러져 가는 슬레이트집 몇 채가 힘에 겨운 듯 버티고 있고 맞은 편 아파트촌에는 고급 승용차가 수시로 드나든다. 욱수천 개발 공사로 몇몇 집은 이사를 하였는지 헐리고 없다. 보다 못한 빈자의 뜰엔 컨테이너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소 울음만 귀에서 맴돌고 낡은 외양간엔 늙은 트럭 한 대가 우두커니 서 있다. 소는 사람과 더불어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한 존재다. 살림살이 밑천이고 만년 머슴으로 집안의 장남 격인 소를 마지못해 팔았을 주인의 마음은 어떠할까. 놀라운 일이다. 나무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톱보다..

근* 글 2018.04.04

어깨가 아파요-김근혜

어깨가 아파요 김근혜 요즘 아이들의 축 처진 어깨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늘 피곤함에 지쳐 있는 어두운 모습이다. 깔깔거리며 소란을 피우는 아이들이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늘 허덕인다. 저녁 7시에 집에 돌아간다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를 만나고는 적잖이 놀랐다. 조그마한 어깨에 매달린 책가방이 아이를 땅으로 자꾸만 내려 앉힌다. “어깨가 아파요”라는 말에 무심히 지나칠 수 없어서 책가방을 들어주었다. 묵직하니 등짐 같다. 비단 그 아이만의 얘기는 아니다. 내 아이의 일이고 세상 모든 아이의 말이다. 세상 짐에 짓눌려 있다는 말 같아서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래, 너희가 아픈 건 어른들 탓이야.’ 이 학원, 저 학원을 돌다가 해가 뉘엿해질 무렵에야 귀가하는 아이가 남의 일 같지 ..

근* 글 2018.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