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글

탈, 탈, 탈-김근혜

테오리아2 2018. 4. 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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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혜

  

들을 만났다. 처음 만난 그들에게선 은행 냄새가 심하게 나서 숨을 고르기 힘들었다. 음식 찌꺼기도 삶의 슬픔처럼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그런 얼굴로 활짝 웃으며 반기는 모습은 이슬을 머금은 나팔꽃 같았다. 얼결에 따라 웃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마음이 들킬까 봐 억지로 입꼬리를 추어올렸다.

 

넘어질 듯 달려와 반길 때면 거부감은 눈 녹듯 사라지고 고마움에 덩달아 달려가게 되었다. 저리 반겨준 사람이 있었던가. 살붙이도 그런 적이 없었다. 이젠 그들보다 내 가슴이 먼저 뛴다.

 

달팽이에게 가슴이 베인 설중화 수선, 한 몸에 머리가 두 개인 샴쌍둥이 루드베키아, 탯줄이 잘린 등심붓꽃, 그들은 탈이 있다고 발치를 당해 여기저기 떠돌며 활착하는 꽃들이다. 나는 사회복지시설에서 선천성 장애를 가진 어린 꽃들에게 미술치료 봉사를 한다.

 

오래전부터 어머님은 맞벌이 부부가 부러운지 전업주부인 나를 사뭇 찔러댔다. 어머님은 아들을 위해 잠들지 못하는 바람이었다. 산다고 살아왔는데 돌아보니 세상에서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밥이나 얻어먹는 탈많은 여자가 되고 말았다. 이 집안에 등재되지 않은 격절된 외로움에 한기가 돌았다.

 

흘려버리면 그만인 말이 귀에 갇혀 윙윙거렸다. 귓속 작은 털마저도 진동을 거스르지 못하고 수초처럼 흔들렸다. 작은 풀잎의 움직임에도 가슴이 눌렸다. 어떻게라도 버티기 위해 발을 내밀었지만 허공을 딛는 듯했다. 숱한 지혜가 쌓여 있는 도서관에도 오후 다섯 시 인생에게 길을 가리키는 책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딘가에 활착해야 했다. 그러나 세상의 퍼즐은 이미 아귀가 맞추어져 있었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해도 흔적이 남지 않는 인생에 회의감이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이리저리 이력서를 내보았으나 선뜻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보란 듯이 일어서고 싶은데 내 삶은 오랜 장마로 는적는적 곪아가고 있었다.

 

해는 어둠을 걷어내는 걸 잊은 걸까. 공황장애가 왔다. 환자 취급당할까 봐서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었다. 내 삶은 촘촘한 현실에서 구두점이 찍히지 않은 문장처럼 허술했다. 열등감과 마음병을 덮어버리려고 겉치장을 했다. 몸에는 비단 치마를 두르고 가슴은 한껏 부풀렸다. 을 숨기려 탈假面을 썼다. 짓시늉은 잠시 위안이었을 뿐, 위장한 봄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때로는 바람 때문에 갈 길이 바뀌기도 하나 보다. 오랜 겨울잠을 자면서 허물 벗는 법을 생각했다. 나그네에게 가장 행복한 일은 아직 걸을 길이 남아 있다고 하지 않던가.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심리치료 공부를 했다. 자신을 치유하고 또,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오랫동안 쉬었던 머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전문 용어들이 머리에서 튕겨 날아갔다. 임신 초기에 겪던 울렁증이었다. 스트레스로 체력이 소진하여 병이 도지기도 했으나 포기하면 더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 이를 물고 버텼다.

 

그들이 보고 싶어서 다시 사회복지시설에 나갔다. 나와 같이 허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라 더 애정이 갔다. 미술 심리 작업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은 네모나 세모였다. 무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무늬 같아 마음이 아팠다. 세상과 마주하기 싫은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자화상을 그릴 땐 크레파스로 까맣게 까맣게 덧칠하며 자꾸만 덮었다. 삶도 망각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하물며 상처이랴. 내가 세상이 두려운 것처럼 그들의 허물도 바깥으로 나오기 싫은지 자꾸만 몸을 움츠렸다.

 

낮고 어두운 환경에서도 그들은 웃는 법을 먼저 배웠는가 보다. 일상어인 듯 아파도 웃었다. 웃음은 연고처럼 내 마음의 상처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겉으로는 내가 그들의 마음에 약을 바르지만 치유되는 건 나였다. 꿈에서도, 밥 먹을 때도, 잠잘 때도 그들은 내 옆에 있었다. 눈곱이 떨어지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도, 고춧가루가 낀 채로 활짝 웃는 표정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탈을 쓰지 않은 순수함 때문이리라.

 

길들지 않은 그들이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늦은 답례이나 그들을 따라 웃어보기로 했다. 거울 앞에서 입을 조금 조금씩 벌려 보았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게 아니었다. 내 표정은 백제 석공의 쪼고 깎은 미소였다.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고 속이려 했던 행동이 부끄러웠다. 거짓의 껍데기를 벗겨 내야 그들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신체는 나보다 건강하진 않으나 마음만은 천사 같은 그들이 내가 쓰고 다니던 가면을 벗어던지게 했다. 그렇게 은폐했던 비밀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

 

까맣게 파묻었던 그림과 눈을 맞춘다. 호기심에 가득 찬 생명이 손을 높이 든다. 말을 걸자 닫힌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옹알거린다. 그림 밖에 더 넓고 아름다운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표본 상자에 갇힌 그림에 바깥세상을 이야기하며 선악과를 먹였다.

오래도록 파묻었던 자신을 벗기까지 겨울이 두 번 지났다. 절망의 입자들이 떠돌더니 껍질 밖으로 나왔다. 새로운 세상이 신기한지 내 눈은 연신 까만 눈을 반짝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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