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글

사치스러운 신음-김근혜

테오리아2 2018. 4. 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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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스러운 신음

  김근혜

 

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손수레에 실린 파지, 술병, 깡통, 잡동사니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쪽으로 쏠려 있다. 미끄러운 빙판길에서 할머니는 손수레 모는 일조차 힘에 부쳐 곧 넘어질 것 같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쌓아둔 폐지를 가져가라고 할머니에게 사무실 비밀번호를 가르쳐 줬다. 그런데 쓰고 있는 가재도구를 몽땅 가지고 갔다. 직원들과 밥도 해먹고 라면이라도 끓일 요량으로 솥 몇 개, 수저 몇 벌 등을 갖춰두었었다. 깨끗이 닦아두지 않았더니 버리는 것으로 알았나 보다. 사무실에서 가져간 가재도구가 쇠붙이라서 횡재했다고 감사의 말을 거듭했다. 온종일 다녀도 몇천 원 벌기가 쉽지 않고 헛걸음하는 날이 더 많다고 했다.

 

얼마 전에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본 후라,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직 쓰는 것인데 왜 가지고 갔느냐고 다그쳤다. 할머니는 미안해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그 일 이후로는 자잘한 집기류는 숨겨 놓았고 사무실도 함부로 맡기지 않았는데 후회할 일이 생기고 말았다.

 

할머니는 아흔의 노모,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딸과 한 칸짜리 월세방에서 살고 있었다. 할머니의 삶도 불행이 닥치기 전까지는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이 평범했다. 남편이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죽고 딸은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정신 이상이 왔다. 딸을 고치려고 좋다는 병원은 다 다녔지만 허사였으며 남은 재산마저 투자하다 실패했다. 마흔 넘은 딸은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네 살배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 일이 누구에게 닥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으랴. 오해했던 것이 미안해서 종이 한 장이라도 더 보태려 애썼다. 주머니에선 만 원짜리 몇 장이 혹시라도 할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나오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할머니는 비록 파지나 고물을 주워서 살고 있지만, 몸이 건강해서 감사하다고 했다. 장애를 가진 딸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어머니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소중한 가족이며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이 세상에 하찮은 존재가 있을까. 사람이든 사물이든 쓰임새가 있는 존재로 태어났다. 누군가에겐 쓸모없는 것들이 어떤 사람들에겐 소중하고 희망이 되고 있다. 할머니의 유모차를 보며 문득 깨닫게 된다. 할머니가 유용하게 쓰는 유모차조차도 그 가치를 다했다고 버렸을 테지만 할머니에게는 생계유지에 필요한 도구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세계적인 여성잡지 엘르편집장이었던 장 도미니크 보비는 뇌일혈으로 침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삼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보비는 잠수복과 나비라는 책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불평과 원망은 행복에 겨운 자의 사치스러운 신음입니다.”라고 했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은 조금만 힘들어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처럼 신음한다.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선 당연한 것으로 여겨 고마운 줄 모른다. 늘 몇 퍼센트 부족분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한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아, 부끄러움에 작은 몸이 더욱 수그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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