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김밥, 옷을 벗다/김근혜

테오리아2 2022. 5. 1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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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간다. 날카롭게 갈아야 흠집을 내지 않고 단번에 자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의 응어리가 밥알처럼 붙어 나온다. 김밥은 싸는 것보다 잘 쓰는 기술이 필요하다. 사람의 감정도 단번에 잘라버리지 않으면 칼에 묻어 나오는 밥알 같아서 끈적거림이 늘 따라다닌다.

 

김밥을 싼다. 한 톨 한 톨의 밥알은 하얀 이팝꽃을 뿌려 놓은 것 같다. 햇살에 구운 한 폭의 먹장구름으로 가지런히 누워 있는 맨살들을 덮는다. 낱글자들이 빠져나오지 않게 조심스럽게 돌돌 만다. 긴 드레스 입은 여인들이 은빛 수레 위에 조용히 눕는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입안에서 방긋이 터진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김밥 속 같았다. 쓴소리를 잘하는 우엉인 언니와 조그만 일에도 잘 삐치고 얼굴이 붉어지는 당근인 나, 누가 뭐라고 하든 무던한 시금치인 남동생과 태생부터가 금수저인 쇠고기 오빠가 있었다. 없어서는 안 될 중재자인 단무지인 어머니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김인 아버지, 이렇게 몸 비비며 함께 살았다. 캄캄한 하늘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가족과 함께 기댈 수 있어서 두렵지 않았다. 가진 것이 없어도 서로 손 잡고 있으면 따뜻했다.

 

엄마는 가족의 개성에 맞게 입맛을 두루두루 맞추려고 애썼다. 때론 김에 각종 재료를 넣고 김밥을 싸듯이 가족을 멍석말이도 했다. 입맛이 까다로워서 무던히도 엄마 속을 썩였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난 나 대로 반찬 투정을 했으니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살면서 까다로운 성격도 두루뭉술하게 섞여 갔다. 부모님 사랑의 힘으로 김밥 속의 지정 좌석이 바뀌는 날도 있었다. 때론 화합이 안 돼서 옆구리가 터지기도 했지만, 엄마는 다양한 색깔의 가족을 보듬고 쓰다듬었다. 입맛을 포기하고 고분고분 몸을 눕히는 일에 길들었다. 김에 착 달라붙어 슬기로운 사회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태평양을 건너온 아들은 집에 오면 오래도록 머물다 간다. 코로나 현상이 아니라도 요즘은 컴퓨터가 있는 곳이면 일터가 따로 없다. 화상으로 회의하고 SNS로 소통하는 편리한 시대다. 혼자 이국땅에서 매일 시켜 먹는 아들이 짠해서 잡아둘 수 있는 기한까지 잡아두다 보니 6개월 정도 체류한다.

 

밥을 챙겨 주고 식탁 언저리에서 지켜본다. 입에 맞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기 위해 귀를 세운다. 예상은 늘 빗나간다. 힘들게 음식 준비한 마음도 모르고 몇 숟갈 뜨다 만다. 입에 맞는 음식이 없다는 무언의 행동이다. 그런 날은 두 번 밥을 하게 한다. 안타까움과 스트레스가 겹쳐 온다. 갖은 재료에 옆구리가 터지려는 불퉁한 마음을 넣고 꾹꾹 눌러 김밥을 싼다.

 

삼대의 입맛이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 까다롭기 한이 없다. 나를 닮아서 그렇다고 자책을 하다가도 화가 올라올 때가 있다. 스트레스로 빠져나가는 혼을 신경안정제로 겨우 붙잡아 앉힌다. 판사도 세끼 찾아 먹는 남편에게 한 끼는 본인이 해결하라고 했던 이혼 조정 판결이 생각난다. 자식이니까 세끼를 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래저래 받은 스트레스를 정리한다. 살면서 이 맛, 저 맛 다 봤지만 매서운 칼맛 한번 보라고 김밥에 화풀이한다. 예고장을 보내고 숫돌에 쓱쓱 칼을 간다. 성질을 잘못 건드렸으니 맛 좀 보라며 은근히 위협도 한다. 단단히 각오하라고 눈짓을 하고 서서히 팔목에 힘줄을 세운다. 사무라이의 절도 있는 동작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칼을 수직으로 힘차게 들어 올린다. 잔뜩 겁먹은 김밥은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다. 김밥이 졸지에 죄인이다. 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살풀이하듯 칼춤을 추며 김밥 허리에 칼을 들이대었다가 떼는 동작을 몇 번 한다. 그러다 호흡을 멈추고 단칼에 댕강, 김밥은 살려 달라.” 소리칠 틈도 없이 한 생을 마친다. 묵직하게 갇혀 있던 아드레날린이 훅 날아간다. 잘려 나간 몸통에 참기름을 반지르르하게 바르고 깨를 뿌려서 접시에 담는다.

 

가늘지 않은 뱃살의 둘레, 배짱 좋게 입주해 있다. 까맣게 덮고 있던 김밥, 옷을 벗는다. 살다 보면 들이기만 한 살의 잔여물을 훅 비워내고 싶을 때가 있다. 여러 가지 색깔의 김밥 속이 내 삶의 문신이다. 불필요한 지방 덩이리가 빽빽하게 우거져 숲을 이뤘다. 비좁은 공간은 삶의 여백이 보이질 않는다. 억지로 키 높이를 맞추려고 단명할 뒤꿈치를 세우던 일이 파닥거린다. 자잘한 삶의 잡티는 명품 화장품으로 덮어 순간의 말감을 유지했다. 헐렁한 옷으로 포장했던 D형 몸피, 기운이 순할 리 없다. 그들이 쌓여 한 뼘씩 땅을 넓혀서 갔고 뚱뚱이 김밥이 되었다. 그러다 역류한 기운이 빠져나가면 꼬마김밥이 되곤 했다. 피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이었다. 삶에선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됐다.

 

알몸으로 섰다. 덧옷을 입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몸의 지도가 속속들이 눈에 들어온다. 채우기에만 바빴던 지난 세월이 거울에 비친다. 꽉 참 속의 텅 빔. 공허가 느껴진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영양분 없는 공갈빵이라 해야 하나. 뼈대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운 것 같다. 그래도 누드 김밥보다는 낫지 않은가. 밥알이 김 밖으로 나와 있어서 순백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지만 속내는 검다. 김 한 장의 차이가 극명하다. 앞면과 뒷면만 바꿔 쌌을 뿐인데 선명한 페르소나, 결국 삶도 이런 게 아닐까.

 

김밥 속은 알콩달콩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혼자는 독단적으로 살아갈 수 없기에 모여 산다. 자유 안에서 방임이 허락되고 방임 안에서 구속이 존재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때론 시기 질투하며 살아간다. 낯선 자들이 서로 뒤엉켜 사는 작은 세상이다. 어디서 어떻게 살았든 여기선 모두가 평등하다. 가진 자나 빚진 자, 직위의 높낮이, 학벌, 인맥 따윈 없다. 김에 말려서 검은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똑같다. 맨살로 뭉치고, 때론 김밥으로 이해하며 살아간다. 김밥도 인간사회처럼 규율이 있다. 함께 섞여 협동하고 도려낼 부분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잘려 나가기도 한다.

 

오늘도 삶의 터전으로 달린다. 김밥의 행렬이 줄줄이 밀려 있다. 나도 그 대열 속으로 들어간다. 일에 쫓겨 밥 먹는 일조차 여유롭지 않다. 카페라테 한 잔과 김밥 한 줄을 사서 허둥거리며 차를 몬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은은한 커피 향이 몸을 부축한다.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는 순간이다. 나도 모르게 손이 김밥으로 향한다.

 

-2022년 에세이 포레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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