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60

푸른 얼·룩-김근혜

푸른 얼·룩 김근혜 블라우스에 묻은 얼룩이 표백제를 써도 지워지질 않는다. 왼쪽 가슴에 남은 흔적 같다. 그 기억을 지우려고 손에 더욱 힘을 주고 문질러 본다. 손목만 욱신거린다. 열 몇 살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니 자태가 아름다운 여인이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조등으로 걸린 엄마의 빈자리가 늘 허전하던 때여서 그 자리를 대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새엄마는 나이 차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날씨처럼 변덕이 심했다. 불협화음 사이에서 늘 조마조마한 나날이었다. 벗어나고 싶어서 날이 새기가 무섭게 학교로 달려갔다. 집이 싫어서 달렸고 그 여인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서 또 달렸다. 묵은 때가 많은 빨래는 삶아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듯이 내 유년이 되돌릴 수 없는 얼룩으..

근* 글 2018.04.04

6월의 江-김근혜

6월의 江 김근혜 6월이 아름다운 이유는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영령들과 참전용사들의 뜨거운 피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파트 담 너머로 붉게 핀 장미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픔 없이 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충혼탑을 보며 숙연해지는 이유도 그들의 고귀한 생명으로 지켜낸 나라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6월 25일이면 아픈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던 날이니까요. 안동에서 살던 작은아버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학도병으로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갔고 황해도 해주에서 살던 어머니는 남하하다가 가족과 생이별을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동족상잔의 희생자입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아픔과 어머니의 슬픔을 함께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작은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면 지금은 아흔을 바라보는 ..

근* 글 2018.04.04

용돈이 없어서-김근혜

용돈이 없어서 김근혜 어느 가난한 목사님의 사연에 카네이션 그림이 올라왔다. 화가도 기가 죽을 만큼 그림 솜씨가 대단했다. 고등학생 아들이 용돈이 없어서 어버이날 선물을 카네이션 그림으로 대신한 것이라고 했다. “용돈이 없어서…”란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다. 용돈이 없다고 불평하지 않고 그림 꽃으로 대신한 자녀가 기특하고 대견했다. 큰아이가 어버이날 선물이라며 안개꽃과 큰 상자를 내민다. 내용물은 갱년기 여성이 먹는 음료다. 홍삼제품이니 가격도 만만찮았을 것 같다. 딸아이의 형편을 아는 나로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취업준비생이라 용돈도 없는 아이가 어떻게 마련했는지 궁금했다. 어버이날에 맞추어서 이벤트란 이벤트엔 모두 응모했다고 한다. 웬만한 사연으로는 당첨되기 어려운 것을 아는지..

근* 글 2018.04.04

가짜와 진짜/장미숙

그녀의 허리가 두루뭉술하다. 허리에 동여맨 앞치마가 중년 아저씨 바지처럼 밑으로 축 처졌다. 앞치마를 튕겨내 버린 뱃살이랑이 두둑하다. 허벅지도 터질듯하다. 자세히 보니 얼굴에도 살이 붙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변해버린 그녀의 몸이 오늘따라 유난히 둔해 보인다. 오전 열 시가 안 되었건만 그녀는 벌써 빵을 세 개째 먹어치웠다. 그리고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유난히 음식을 빨리 먹는다. 빵 한 개가 사라지는 건 불과 몇 초,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는 말이 딱 맞다. 그녀의 자제력은 오늘 통제 불능이다. 시작하면 제어가 안 된다. 결국, 포만감을 느끼고서야 멈추는 그녀의 식욕이 무섭다. 아마 생리가 곧 시작되려나 보다. 올해 마흔 살이 된 그녀, 아담한 키에 귀여운 얼굴을 가졌..

아주머니와 카스테라-장미숙

오랜만에 온 아주머니는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한발을 질질 끌다시피 가게로 들어서는 아주머니가 카스텔라 두 봉지를 들고 계산대로 왔다. 그이는 내가 묻기도 전에 한숨부터 풀어놓았다. “아유 힘들어, 다리가 아프니까 더 힘드네.” 뭔가를 갈구하는 눈빛, 아주머니의 눈에 가득 들어찬 무력함을 나는 외면하고 싶었다. 잘 웃지 않는 아주머니를 대할 때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늘 깊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과연 그 얼굴에 웃음이란 게 들어있기나 한 걸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다리는 왜 그러세요?” 아주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욕탕에서 넘어졌는데 뼈가 금이 갔다나 뭐래나. 힘들어 죽겠어요. 아유, 힘들어.” 아주머니는 그간의 일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난타-장미숙

예고도 광고도 없다. 무대 장치며 조명도 없다. 음악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의상이며 분장도 자유롭다. 자신의 개성과 취향대로 연출한다. 주연과 조연이 따로 없다. 모두가 주연이면서 조연이다. 감독의 역할도 중요치 않다. 누군가 그날의 공연을 끌고 가면 그만이다. 관객 수나 관객의 취향을 아랑곳하지 않는 게 이들 공연의 특징이다. 첫 공연은 열 명으로 구성된 삼사십 대의 젊은 엄마들이다. 그녀들에게는 초등학생인 자녀가 있고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학교에서 공개수업이나 회의가 열렸던 모양이다. 요즘 젊은 엄마들은 자식이 다니는 학교에 필요 이상의 적극성을 보인다. 자식에 대한 관심은 활력과 비례하는지 그녀들 얼굴에는 통통 튀는 건강미가 살아 있다. 공 연은 비극이기보다 희극적 요소가..

사진, 또 하나의 언어-김근혜

사진, 또 하나의 언어 김근혜 징후다. 답답해서 밥이 목구멍에 걸린다. 산맥들이 꿈틀거리며 탈출을 꿈꾼다. 좋지 않은 호흡기 탓에 서랍 안에서 꿈이 늙을 때가 많다. 방랑벽이 있는 사람이 겨울을 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견디는 재간은 나이인 것 같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무작정 시동을 건다. 이사 온 지 삼 개월이 지나가는데 낯설다. 감기로 인해 실내에서 지내다 보니 가을이 떠나고 없다. 직장을 그만둔 후론 사진을 찍는다. 영혼이 피사체에 빠져 일체가 될 때 느끼는 희열이 나를 바깥으로 밀친다. 누군가가 지나쳐버린 하루를 담고, 내가 사랑하는 파도도 넣으며 위안을 얻는다. 검은 상자 안에서 빨간 알약, 파란 펭귄, 다 닳은 지팡이가 나온다. 그들의 호흡이 멈추기 전에 재빨리 하드웨어에 저장한..

근* 글 2018.02.27

귀 멀미-김근혜

귀 멀미 김근혜 귀耳가 저녁에는 더 바쁘다. 예불시간에 맞춰 종이라도 치려는 건지. 커다란 눈을 단 산악자전거가 찌르릉거리며 귓속을 이러저리 달리는 느낌이다. 전입신고도 하지 않고 입성한 그에게 정거장이 돼주기로 했다. 왼쪽으로 누워야 겨우 내려오는 차단기도 마다하고 두근거리며 그를 기다리는 날이 생겼다. 전깃줄 우는 소리, 파도 소리, 매미 소릴 내며 쉼 없이 조잘거리는 귓속. 그가 요동칠 땐 이상하게 첫사랑이 떠올랐다. 귓속을 어지럽히던 그가 잠시 침묵을 하는 동안 금단현상이 왔다. 그 적막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나쁜 사람과 함께 하면서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것처럼. 어린 시절 외롭게 자란 탓도 있다. 난 황혼 무렵을 사랑하지만 미워도 한다. 해거름, 대문 밖에서 가족을 기다..

근* 글 2017.09.20

꽃보다 9

꽃보다 9 김근혜 교회 앞마당에 들어섰다. 헌혈차와 몇 개의 부스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자주 있는 일이라 예사로 넘기고 본당으로 향하고 있는데 “원장님”하는 목소리가 귀에 익다. 학모로 만나 지금까지 정을 나누고 있는 지인이다. “장기기증하실 거죠? 저도 했어요. 남편한테 권했는데 내가 서약서 쓰는 동안 도망가고 없네요. 큭큭.” 뜬금없는 지인의 말에 깜짝 놀랐다. 뭔가 옹색한 변(辯)이라도 늘어놓는 게 순서일 텐데 이럴 때 내 입심은 발휘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스로 향하고 있는 내 발걸음이 신기했다. 서약서를 받아들었다. 글씨가 작아 잘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하는 것이니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모두 표시했다. 얼떨결에 하긴 했는데 무슨 내용..

근* 글 2016.02.03

목포문학상 너와집-김이랑

너와집 김동수 죄라도 지었을까. 유배라도 떠난 듯 너와집은 두메에 있다. 산촌박물관에 전시된 집은 박제일 뿐, 그 영혼을 찾으려면 숨 가쁘게 오르내리는 주가곡선株價曲線에서 뛰어내리고 쿵쾅거리는 세상일랑 하루쯤 버려야 한다. 도시를 벗어나 산 넘고 물 건너는 길에 유랑민의 노래 몇 소절 뿌리면 좋다. 저만치 누가 온들 돌아오는 사람이겠냐는 듯 너와집은 무덤덤하다. 화려한 삶을 꿈꾸지 않았으니 허름해도 좋고, 빈틈없는 삶을 바라지 않았으니 허술해도 괜찮다며 매무시를 여미지도 않는다.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이 없으면 어떻고 물 한 그릇 건네는 이 없으면 또 어떤가. 먹어보고 입어보라는 새빨간 장삿속에 넋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니 얄팍한 지갑 걱정이나 마음의 무장일랑 내려놓고 자적自適에 들어본다. 새끼 짊어지고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