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가짜와 진짜/장미숙

테오리아2 2018. 3. 2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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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허리가 두루뭉술하다. 허리에 동여맨 앞치마가 중년 아저씨 바지처럼 밑으로 축 처졌다. 앞치마를 튕겨내 버린 뱃살이랑이 두둑하다. 허벅지도 터질듯하다. 자세히 보니 얼굴에도 살이 붙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변해버린 그녀의 몸이 오늘따라 유난히 둔해 보인다.
  오전 열 시가 안 되었건만 그녀는 벌써 빵을 세 개째 먹어치웠다. 그리고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유난히 음식을 빨리 먹는다. 빵 한 개가 사라지는 건 불과 몇 초,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는 말이 딱 맞다. 그녀의 자제력은 오늘 통제 불능이다. 시작하면 제어가 안 된다. 결국, 포만감을 느끼고서야 멈추는 그녀의 식욕이 무섭다. 아마 생리가 곧 시작되려나 보다.
  올해 마흔 살이 된 그녀, 아담한 키에 귀여운 얼굴을 가졌다. 그녀는 나와 빵집에서 오 년째 함께 일한다. 샌드위치를 싸는 게 그녀의 일이다. 그녀의 노동시간은 하루 열 시간, 일주일에 하루 쉬니 주 60시간 근무하는 셈이다. 온 매장을 휘젓고 다니는 나에 비하면 사방 1m 공간이 그녀의 활동반경이다. 하루에 두어 번 지하 화장실을 가는 거 빼고 그녀는 같은 자리를 맴돈다. 초인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노동력이다.
  그녀는 아침을 안 먹는다. 점심도 안 먹는다. 일일 일식을 하기 때문이다. 온종일 굶었다가 저녁에 하루 식사량을 몰아서 먹는다. 하지만 그녀의 일일 일식은 삼 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니 그녀의 몸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
  요 몇 달 동안 그녀의 의지는 바닥을 쳤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었다. 출근하자마자 빵을 먹기 시작하면 적어도 서너 개는 먹어치워야 만족했다. 문제는 그녀의 후회와 자책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는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하곤 했다. 삼사 개월을 주기로 그녀의 그런 생활은 반복되고 있다.
  그녀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생리 전에 폭식이 심해진다. 그럴 때 그녀는 꼭 다른 사람 같다. 숨죽이고 있던 또 다른 그녀가 툭 튀어나와 다른 그녀를 삼켜 버린 듯하다. 그녀는 그렇게 매일 자신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자신과 싸우는 중이다. 도대체 어떤 게 그녀의 진짜이고 가짜인 것일까. 온갖 유혹에 흔들리며 갈등을 일으키는 또 다른 존재, 그건 비단 그녀에게만 있는 건 아닐 게다.
  나는 그녀와 달리 빵을 먹지 않는다. 하지만 커피의 유혹에 흔들린다. 노동의 지루함과 피곤을 이겨내기 위해 하루 한잔 커피를 마신다. 문제는 카페인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위장의 반란이다. 그녀처럼 나도 커피를 끊었다 마시기를 반복한다. 내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나와 겉으로 보이는 나는 늘 대립상태다.
  오랫동안 감정노동을 하다 보니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종잡을 수 없을 때도 있다. 가끔은 기계처럼 자동으로 무한 반복되는 내 목소리가 낯설다. 감정이 담긴 목소리, 감성이 실린 목소리, 진심이 들어있는 목소리, 짜증이 묻어있는 목소리가 쳇바퀴마냥 돌고 돈다. 그중에 나의 본질은 어느 것일까.
  손님들의 태도와 표정, 목소리 또한 어느 게 진짜인지 알 수 없다. 웃는 얼굴, 화난 얼굴, 무표정한 얼굴, 차가운 얼굴, 따뜻한 얼굴들과 내 얼굴이 마주친다. 무례하거나 거만한 태도, 정중하거나 친근한 태도에 따라 내 감정도 수시로 변한다. 내 속에 숨어 있는 가짜들의 활동이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 상대방은 내 얼굴에서 가짜를 볼까, 진짜를 볼까.
  지난달, 시댁 계모임이 있었다. 일주일에 하루밖에 쉴 날이 없는 내게 계모임은 떨칠 수 없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쉬어야 하는 날 쉬지 못하는 건 내게 큰 고통이다. 거기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댁 식구들과의 모임이란 어깨에 바위를 올려놓은 것 같았다.
  가부장적인 시댁 남자들은 가만 앉아서 시키기 바쁘고, 연로한 시누이들 또한 몸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펜션에서 일박이일 동안의 시간이 한 달만큼이나 길게 느껴진 건 심리적인 반감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그들을 겪어본바, 희망 같은 건 버린 지 오래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저 내게 그 시간은 견뎌내는 것에 불과했다.
  즐기는 쪽에 있지 못한 나는 몸도 마음도 뙤약볕 마른풀처럼 널브러졌다. 밥벌이를 위한 노동도 버거운데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 또다시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몸이 아우성이었다. 그런데도 내 겉모습은 웃고 있었다. 불화를 피하고자 길든 또 다른 내가 능숙한 연기를 펼친 것이다. 가짜의 행동은 나를 위한 것인지, 타인을 위한 것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일들은 수시로 일어난다.
  세상의 불합리함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또 다른 나는 강자 앞에서 비겁해지기도 한다. 고용주(雇用主)와 고용인(雇傭人)의 차이는 힘의 논리로 이어진다. 또한, 보이지 않는 힘을 아우르기도 한다. 고용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참을성 주머니가 커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가치판단이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고개를 숙여야 할 때 진짜인 나는 어디론가 숨어 버린다. 그렇다고 숨어버린 진짜를 비난할 수 있을까. 가짜와 진짜가 어우러져 서로를 다독거려줘야 할 일은 수없이 일어난다.
  가짜로 살아갈 것인가, 진짜로 살아갈 것인가는 정답이 없는 시험지 같다. 상황에 따라 어떤 행동에 대한 가치는 스스로 판단할 일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가짜로 살아가는 일이 편할 때도 있다. 상대방을 칭찬하고 추켜 세워주다 보면 가짜의 얼굴에서 진짜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 마음에 환히 퍼지는 감동을 만난다. 가짜마저 보듬어 안는 순수는 마음의 때를 한 꺼풀 벗겨낸다.
 
  만약 그녀가 빵을 먹지 않고, 내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일이 좀 더 쉬울까. 그렇게 된다면 반전이 일어날 수도 있으리라. 내가 빵을 탐해 비만해지고 그녀가 커피 때문에 속이 쓰릴 것인지 그 누가 알겠는가. 가짜와 진짜가 실은, 진짜와 가짜인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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