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60

아버지께 올리는 贖愆祭/ 조선일보 에세이 : 2014.10.08

아버지께 올리는 贖愆祭(속건제·허물을 씻기 위한 제사)/김근혜 수필가 아버지는 땅을 팔면서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렸다. 외지인이 와서 공장을 짓는다며 땅값을 비싸게 준다고 했다. 귀가 여린 아버지는 그 꾐에 계약금만 받고 땅문서에 덜컥 도장을 찍었다. 전답(田畓)을 처분해 자식들을 도시에서 공부시킬 요량이었지만 한순간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쉰을 넘긴 아버지가 맨손으로 일어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 재산을 뺏긴 심정이 오죽했을까? 혼이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벽만 보고 지냈다. 어린 자식들과 눈 맞추는 걸 제일 두려워했다. 어머 니가 살아 계셨다면 아마도 생병이 나서 지레 돌아가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부농(富農)의 장남으로 할아버지의 커다란 우산 아래에서 비바람을 모르고 살았다. 풍류나 즐기..

반곡지/김근혜수필가

반곡지에 들렀다. 비에 젖은 연둣빛 버드나무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봄의 눈짓에 화답하듯 새들의 지저귐도 정겹다. 나뭇잎은 4월을 벗으려는 듯 군데군데 초록 띠를 두르고 있다. 반곡지를 사진에 담으려는 사람들 등쌀에 도화밭은 몸살을 앓은 흔적이 역력했다. 무심한 발자국에 상처난 도화 송이를 어루만져 본다. 애써 마음을 넓혔을 도화가 기특해 보인다. 나뭇가지 몇 개 꺾어 경계를 만든 주인의 애타는 심정이 울면서 웃었던 건 아닐까. 반곡지는 유일한 쉼의 장소가 되었다. 세상 어디에도 있는 연못이지만 여기는 특별하다. 4월의 반곡지는 ‘Deep Purple의 April’이 수면 위로 흐른다. 웅장하고 경쾌하면서 클래식한 리듬이, 잠자는 영혼을 쩡쩡 깨운다. 반곡지에 와서 이 선율에 빠져보라. ..

인생항해/김근혜 수필가

인생 항해 김근혜 작은 아이는 착한 해커이다. 중학교 다닐 때, 우연히 접하게 된 삼촌의 프로그래밍 책이 인생 항해의 출발점이 되었다. 남들이 많이 가지 않은 길을 가기 위해 처녀항해의 닻을 올렸다. 대양에서 낚아 올리는 C언어는 어린 아들을 잡아당기는 미늘이었다. 암호 같은 언어와 의사소통을 하면서 세상을 배워가고 있었다. 호기심이 건넨 열정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신나는 여행이었을 것이다. 사춘기 소년이 소녀를 만났을 때의 설렘 같은 기분이었으리라. 해킹 공부는 소심한 아이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게 하는 무대였다. 자신감에 찬 날은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가끔 책과 투닥거릴 때는 절교라도 할 것 같아 옆에서 지켜보는 내내 조마조마한 적도 많았다.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는 아이가 기특했다..

벽/김근혜 수필가

장기읍성 둘레길이다. 나지막한 성벽은 여인의 허리선처럼 굽이굽이 감아 돌고 있다. 훤히 드러낸 등허리를 밟고 지인과 자분자분 걷는다. 한 층 한 층 쌓아 올린 성벽은 각기 다른 얼굴로 정겹게 서 있다. 푸른 이끼 속에서 새싹은 움을 틔우려고 발길질한다. 발아래 엎드린 동해가 유난히 굼실거리며 금방이라도 달려올 기세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낮은 집들이 어미 날개 아래 든 병아리 같다. 포근함이 밀려드는 오후다. 지나가는 여행객의 말소리가 외딴집의 담을 넘었는가 보다. 반가움에 뛰쳐나온 할머니가 여행객의 말을 받는다. 사람 구경하기가 얼마나 귀했으면 길손들의 발목을 잡을까. 할머니의 풍기는 인상으로 봐서 젊은 날은 담벼락에 심어둔 매화만큼이나 고고했을 것 같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읍성에 얽힌 전설을 엉거주춤..

수선집을 엿보다/김근혜 수필가

수선집을 엿보다 빈자리가 휑해 보인다. 수선집 여인의 옆자리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그녀의 남편은 바람이 되어 다른 집에 머문다. 그 여파로 웃음을 잃었다. 무채색의 하루하루를 안고 사는 생기 없는 삶이 눈동자에 맺힌다. 찔려도 속이 없던 사람이 점점 바늘이 되어 간다. 신혼 초에 홈패션을 배웠다. 학원에서는 주로 부업이나 창업자들을 위해 공업용 재봉틀을 사용했다. 속도가 엄청 빨라서 손과 발의 호흡이 맞지 않았다. 바늘에 찔린 상처가 궂은살이 되었다. 신혼생활에서 덧난 불협화음이 목에 걸려 떠돌고 있었다. 황폐한 마음을 털어버리기 위해 취미생활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묵직하게 걸려 있던 것들이 점점 사라져 갔다. 그제야 둥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재봉틀 페달을 조심스럽게 밟으면서 삶의 의미를 한..

카테고리 없음 2021.12.15

등, 무꽃 피다/김근혜 수필가

등에 무꽃이 허옇게 폈다. 꺾어서 맛을 본다면 아마도 달싸한 맛이 나지 않을까. 눈여겨보지 않아도 싹을 틔우고, 물을 주지 않아도 꽃을 피운다. 사람 등에만 피는, 소금기를 먹고 자라는 꽃. 삶의 각질로 이루어진 꽃, 아름다운 향을 지니고도 어둠 속에 있어서 더 쓸쓸해 보인다. 삶은 답안지가 없는 문제집이며, 눈치 없이 문제를 떠안기기에 바쁘다. 루터 안에 갇힌 삶의 등을 벗기려 애써본다. 문제를 풀었는가 싶으면 매듭이 지고 또 다른 형식의 난제가 로그인된다. 등은 엉켜있는 실타래다. 등은 의지와 상관없이 울고, 웃으며, 밥의 의미를 새기게 한다. 생생한 삶의 터에서 쉼 없이 돌아가는 회전의자다. 가녀린 등도 가족 앞에선 꼿꼿함으로 위장하고 균형을 잡기 위해 몸부림친다. 가족을 지키느라 생의 나들목에선 ..

길에 서다 /김근혜 수필가

길에 서다 김근혜 차들이 게걸음이다. 땅을 장사지내는 조문 행렬에 고속도로가 마비다. 불도저는 늙은 땅을 풀어헤쳐 새살을 파느라 여념이 없다. 목덜미를 물린 땅은 하늘을 향해 굉굉 소리를 낸다. 딸려 나온 벚나무가 잇몸을 드러내고 고통을 견디고 있다. 컬러 사진이 누렇게 바래져도 여전히 가야 할 길은 그대로다. 길을 걸으면서 끝을 찾고 마지막이라 말하면서 허공을 향하는 넝쿨손. 욕망으로 중독된 세상에서 엇길로 가다 발이 빠진다. 아버지의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어린 시절 멀리서 울리던 교회당 종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남들보다 쉽고 편하게 가는 사람들, 지름길로 가지 않아도 빠르게 간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지 않아도 매화는 핀다.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 무엇이 될까 고민하지..

카테고리 없음 2021.11.25

걸음 지우개/김근혜 수필가

살아온 걸음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프고, 슬프고, 모나고, 잘못된 것은 모두 지워 버리겠지요. 좋은 기억만 가지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가슴에 아픔 몇 자락은 다 숨기고 살지 않을까요. 구태여 곱씹을 필요는 없지만, 느닷없이 튀어나와서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 슬픔도 있습니다. 동창회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볼 때마다 젊어집니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피노키오도 아닌데 코 높이도 자꾸 달라집니다. 그들의 살아온 자취가 자꾸 지워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동화책에서 읽었던 신비한 샘물을 마시고 오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점점 젊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아기가 되는 건 아닌지 은근히 걱정도 됩니다. 얼굴은 자신의 살아온 모습이 담겨 있는 그릇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모양이 변하는 것..

깊은 방/ 장미숙

‘덜컹’ 문이 닫히면 빛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전등 스위치를 찾느라 낮에도 벽을 더듬거려야 했다. 센서 등도 없고, 불빛이 흘러나오는 곳도 없었다. 불은 필요에 의해서만 밝힐 수 있었다. 여자와 아이는 차가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작은 유리창을 통해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차가 지나갔으며 자전거 바퀴가 굴러갔다. 창이 워낙 작아 단면만 보일 뿐 위의 세상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도 햇빛이 들어오는 유일한 곳이었다. 아이는 중학생, 제멋에 겨워 한창 까불 때이건만 어둠에 갇혀 버렸다. 벽에 발길질하는 아이를 여자는 바라보았다. 아이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원장님은 나만 미워해. 맨날 야단만 치고….” 아이는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집에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여자는 그런 아이가 불안했다. ..

카테고리 없음 2021.09.22

옆집 남자/장미숙

저 늙은 남자는 오늘도 나를 슬프게 한다. 등이 조금만 덜 굽었더라면,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손이 조금 덜 뭉툭했더라면, 인사할 때 고개를 너무 숙이지 않는다면, 한쪽 다리를 절지 않는다면 나는 덜 슬프겠다. 하지만 그는 등이 살짝 굽었고, 키는 보통에도 미치지 못하고, 손은 거칠고 투박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주인에게 고개를 너무 깊이 숙여 인사한다. 그리고 걸음걸이가 약간 부자연스럽다.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지 때로 궁금하게 만든다.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닐 때마다 그의 어깨를 쫙 펴주고 싶고, 고개를 깊이 숙이지 않도록 뒷덜미라도 붙잡고 싶다. 오늘도 그를 보았다. 내 자전거가 그의 앞을 지나갈 때 그는 건물 사이 골목에 있었다. 매일 같은 옷에 같은 가방에 같은 신발을 신고 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