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60

제복의 심리학 / 이성환

모처럼 비행기를 탄다. 가족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위한 2박 3일 일정이다. 행락객으로 제법 붐비는 공항에서 제복 차림의 사람들과 마주친다. 왠지 그들에게 정감이 간다. 업무 시간에 멋진 옷을 입고 일하는 건 그들만의 특권이다. 공항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복장은 믿음이 가고 신뢰를 준다. 내근직의 근무복도 보기 좋지만, 조종사나 승무원들의 제복은 더 맵시가 있다. 깨끗하게 다림질되어 있으니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들은 항공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더더욱 언행에 신중할 것 같다. 얌체 같은 승객에게도 친절할 수밖에 없는 건 제복 때문이다. 서비스 정신이 투철해서라기보다는 비행기의 안전을 위해 손님의 비위를 맞춘다. 기내에서 난동을 부리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까닭이다. 제복은 어떤 집단의 가치..

달팽이 뒷간 / 노혜숙

'달팽이 뒷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지붕 대신 한 평 하늘을 들였고, 문 대신 서원 뜰 한 자락을 들였다. 이끼 낀 진흙 돌담은 달팽이처럼 안으로 휘었고, 풍화의 흔적이 스민 잿빛 이엉은 서원 지붕과 어우러져 한 풍경을 이루었다. 그 옛날 머슴들의 배설과 애환이 질펀하게 부려지던 '통시'의 공간. 뒷간 옆엔 배롱나무 꽃이 천연스럽게 붉었다. 10리 길을 걸어 들어가야 진면목을 알게 된다던가. 팔월의 병산서원(屛山書院)은 몽환적이었다. 염천의 농익은 볕처럼 붉은 꽃들이 서원 안팎에 흐드러져 피었다. 풍경 속에 건물이 있고 건물 속에 풍경이 들어와 한통속이 된 듯 조화로운 전경이었다. 입교당(立敎堂)에 올라 바라보는 만대로 풍광은 서원의 백미였다. 시선을 들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우뚝 선 병산(屛山)을 한..

소금밥 / 원준희

소금으로 밥을 먹었다. 해방을 맞이한 조선인 동네는 술렁이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났다는 기쁨보다 고국으로 들어가냐, 또는 남느냐 결정하는 것이 먼저고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서로 묻고 답하느라 법석이었다. 만주는 조선보다 절기가 빨라 들녘에는 벼가 누릇누릇 익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힘들게 마련한 농토이지만 공산당 정권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무엇보다 신앙생활을 무섭게 탄압한다는 풍문도 나돌고 있어서 결국 우리도 친척들과 같이 떠나기로 했다. 고향을 떠나 먼 곳에 이민 와서 겨우 기반을 잡고 이제 살만했는데 다시 떠나야 한다는 것이 서글프고 아쉬웠다. 집과 농토를 헐값에 넘기고 가축을 팔아 여비를 마련하여 긴 여행에 필요한 옷· 이불· 취사도구· 양식 외에 미숫가루· 엿· 육포· 반찬· 볶은 ..

촉/노 정 희

여자는 예민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하다. 비가 올 것 같으면 뼈마디가 쑤시고 기온이 내려갈 것 같으면 발목이 시리다. 그뿐인가, 남편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촉’이라는 범상치 않은 감각기관은 늘 고주파 더듬이를 세우고 있다. 요즘 대주(大主)의 행동이 이상타. 이 추위에, 더구나 저녁때에 손수 세차를 하는가 하면, 일요일 저녁에 모임에 간다며 바지에 칼날을 세운다. 어떻게 할까, 정면 돌파로 직진하면 미리 대응하여 막아설 수 있으니 우회해야 하나. 이 격랑의 수압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는지 생각이 생각의 끈을 문다. 격랑의 바닷물에 빠져 마냥 허우적거리기보다는 무언가 부유물이라도 잡아야 한다. 신년 빨간 날짜에 여행을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다. 바다 쪽이 좋겠지, 남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

‘라떼’는 ‘말’이야/서금복

밤 10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출근길에 통화했으면 됐지 뭐 하러 밤에 또 하나 싶어서 건조한 목소리로 “왜?” 했더니 “엄마!” 하는 목소리가 축축하다. 오래전, 부대에서 동계훈련을 받고 들려줬던 목소리와 똑같아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아들은 며칠 동안 혹한과 싸우다 그만 동상에 걸려 병원에 왔다고 했다. 그때 “엄마!”라고 부르던 그 목소리와 닮은, 괴롭고 지친 목소리였다. 그 후에 이런 목소리를 들려준 적이 없었는데 웬일인가 했더니, 직장 생활 10년 만에 자존감이 이렇게 무너지긴 처음이라고 했다. 주말에도 출근해야 하는 일의 양도 양이지만, 그보다는 무조건 ‘나 때는 말이야’로 밀어붙이는 힘을 막아내기 버겁다고 했다. ‘오죽하면 내게 전화했을까’ 싶어 이것저것 물어보지만, 아들이 시시콜콜히..

무 / 이은희

역시나 녀석을 찾고자 뒤적인다. 나는 생선 조림을 먹을 때면 으레 녀석을 제일 먼저 찾는다. 날것의 싱싱함을 찾아볼 순 없지만, 그의 남다른 맛을 나의 혀는 여전히 기억한다. 누군가는 씹는 맛도 없는데 무에 그리 좋아 찾느냐고 말할지도 모르리라. 그것은 무의 맛을 진정 모르는 사람의 소리이다. 무란 녀석은 한마디로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든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전부를 가져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의 맛도 확연히 달라진다. 생선 조림의 무는 생선의 자양분과 바다의 향기를 그대로 끌어안아 짭짤한 맛으로 변신한다. 또 김장 김치의 속에 박은 무는 어떠한가. 결이 삭은 무의 맛은 시원하고 새큼달큼하다. 무를 직접 먹어봐야 알지, 어찌 그 맛을..

팽나무/장미숙

그 집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범상치 않은 형태의 나무였다. 나무는 기와집을 배경으로 뒤꼍에 당당히 서 있었다. 예사로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나무가 아니었다. 시원스레 가지를 쭉쭉 뻗지도 않았고,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드리운 것도 아니었다. 갓 피어나기 시작한 청춘의 파릇함도, 장년의 노련한 능청스러움도 없었다. 깊은 연륜으로 다져진 범접할 수 없는 기가 느껴졌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는 늙은 몸이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달관한 신선처럼 신비한 기운이 뻗쳐 나왔다. 나무는 뒤틀린 채 완벽하게 둘로 갈라진 형태였다. 멀리서 보면 마치 두 그루가 마주 보고 있는 듯했다. 밑동을 살펴야만 한 그루의 나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무는 서로 바깥으로 원을 그리면서 안..

타인앓이/김근혜

슬픈 시로 다가오는 그 남자. 오늘도 어김없이 그 카페에 액자처럼 걸려 있다. 초췌한 몰골, 파란 입술, 근심어린 눈빛은 진이 다 빠져나가 속이 빈 고목 같다. 땅에 닿아야 할 뿌리가 허공에 떠 있다. 중력마저 무력하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낯선 만남을 하고 있다. 붙박이가 된 남자가 궁금해서 나도 자주 찾곤 한다. 우린 무성영화의 주인공이다. 난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잔혹한 도둑, 프로크루스테스다. 그 남자를 내 잣대에 올려놓고 늘이고 줄이고 한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재단하고 자르고, 깁고, 고쳐 쓴다. 그 남자 좌석 옆자리에서 커피를 마신다. 오후 서너 시경의 카페는 한산하다. 무료해서 커피잔에 꽂힌 빨대를 돌린다. 삶의 운전대라도 되는 양 좌회전했다가, 유턴하며 운전 연습을 한다. 그러다 카페..

샌드위치를 싸며 / 장미숙

칼을 들고서 경계를 생각한다. 남겨야 할 것과 버릴 것을 가늠 중이다. 사는 일이란 매일 뭔가를 버리고 남기는 일의 반복일지도 모르겠다. 도마 위에 아직 상품의 가치가 없는 가공 전의 제품이 놓여 있다. 이제 막 재료를 조합해 놓은 원형의 상태, 다듬지 않은 물건이다. 양은 오히려 넉넉하다. 그대로 판매한다면 수고를 들이지 않고 음식물쓰레기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정해진 규격과 모양이 있으니 가공을 거쳐야 상품으로 거듭난다. 성질과 감촉, 색과 크기가 다른 재료들은 이제 하나의 맛으로 통일될 것이다. 글쓰기에서의 주제와 다를 바 없다. 소재와 제재, 구성과 단락, 문장과 어휘가 어우러져 의미를 생성하듯이 말이다. 주제가 중심을 잡아야 작품이 안정적이다. 샌드위치도 각각 독특한 맛이 있다. 양과 크..

앙금이 속살거리다/김근혜

팥죽을 만들기 위한 시간은 동백이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팥의 앙다문 입술이 벌어지기까지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하다. 자신이 깨고 나오기까지 호흡조절에 힘쓴다. 그때부터는 동안거다. 참지 못하고 벌컥 화를 내는 순간 팥은 설익고 만다. 붉디붉은 팥은 같은 콩과 식물인데도 콩들과 잘 섞이지 못한다. 콩은 둥글둥글하고 모난 데가 없어서 누구와도 잘 어울린다. 모서리에 베여도 훌훌 털고 쉽게 일어나는 힘을 가졌다. 팥은 야무지면서 단아하고 차가운 느낌이다. 도도한 인상이 거부감을 일으킨다. 너그러운듯하나 속 좁은 여인네 같고, 포용과 배려보다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으로 보인다. 소심한 팥은 세상의 바람과 맞서지 않는다. 지혜롭게 보이지만 그의 속은 앙금으로 까맣다. 돌덩이 같은 팥이 스스로 껍질을 벗고 나올 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