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아버지께 올리는 贖愆祭/ 조선일보 에세이 : 2014.10.08

테오리아2 2022. 1. 13. 19:21
728x90

아버지께 올리는 贖愆祭(속건제·허물을 씻기 위한 제사)/김근혜 수필가

 

 

 

아버지는 땅을 팔면서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렸다. 외지인이 와서 공장을 짓는다며 땅값을 비싸게

준다고 했다. 귀가 여린 아버지는 그 꾐에 계약금만 받고 땅문서에 덜컥 도장을 찍었다. 전답(田畓)을

처분해 자식들을 도시에서 공부시킬 요량이었지만 한순간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쉰을 넘긴 아버지가 맨손으로 일어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 재산을 뺏긴 심정이 오죽했을까?

혼이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벽만 보고 지냈다. 어린 자식들과 눈 맞추는 걸 제일 두려워했다. 어머

니가 살아 계셨다면 아마도 생병이 나서 지레 돌아가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부농(富農)의 장남으로

할아버지의 커다란 우산 아래에서 비바람을 모르고 살았다. 풍류나 즐기고 시나 쓰던 귀공자였다. 막

내 나이 겨우 일곱 살, 아버지는 먹이 물고 날아드는 어미 제비를 기다리는 새끼처럼 아비만 기다리

는 네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 후 친구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조그만 대서소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식구들 입에 풀칠도 어려운

급료였으니 짬짬이 막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삽자루 한 번 쥐어보지 않은 손에는 물집이 가실 날

없었고, 거북이 등처럼 휘어진 등에는 붙이는 신신파스 자국으로 언제나 얼룩이 져 있었다. 아버지는

하루도 편히 다리를 펴지 못하고 사셨다. "큭큭" 마른기침을 하며 "아이고, 허리야!" 하고 습관처럼 튀

어나오는 신음소리를 자식들은 '아버지는 다 그러려니…' 무심히 넘기며 물어오는 먹이를 넙죽넙죽

받아먹고 자랐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의 몸은 나뭇등걸처럼 뒤틀리고 가벼워졌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를 자식들이 등에 업을 차례가 됐지만 병들고 늙은 아버지를 선뜻 나서서 보살펴

드리겠다는 자식이 없었다. 서로 모시지 않겠다고 자신의 삶을 변명하기에 바빴다. 쇠잔해진 아버지

는 귀찮고 무거운 짐으로 변했다. 어느 누구 등에도 기대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 일로 급기야 자

식들이 볼썽사나운 다툼까지 하게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신문에서 가끔 보게 되는 병든 노부모 모시

는 일로 벌어지는 끔찍한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섬뜩한 생각마저 들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

다.

그래도 형제 중에 셋째인 내가 형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아 조심스럽게 남편의 의중을 떠보았다. 예상

은 했지만 흔쾌히 승낙해 주어 참으로 고마웠다. 이십여 년 전, 방 두 칸짜리 신혼집에서 첫딸을 낳고

살 때였다.

빠듯한 월급에서 새 식구를 들이는 일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더구나 환자인 장인을 사위가 받아들

이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아버지는 한겨울에도 참외 수박을 찾으셨다. 나도 갓난아이까

지 딸린 입장에서 아버지 병 수발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목욕 수발을 해 드리며 극진히 모시

는 남편은 이런 상황을 견뎌내려 무던히 애썼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아버지가 오신 지 반년이 지나자 남편도 점점 지쳐갔다. 차츰 퇴근 시간이 늦어졌다. 그럴 수 있다고

이해는 하면서도 야속했다. 어느 날 자정을 넘어서 술에 취해 들어온 남편에게 울며 푸념을 해댔다.

그 밤, 홧김에 형제들에게도 한바탕 퍼부었다. "다 같은 자식인데 왜 나만 이 고생을 해야 하느냐?"고

전화로 따졌다. 하지만 편안히 잠드신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금세 후회가 밀려왔다. 당신이 가장 의

지하고 싶은 딸인데….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아버지를 전에 사시던 시골집으로 모셨다. 아버지의 결정이었다. 내려가

시고 이내 돌아가셨다. 대부분 노인이 그러하듯 아버지도 자손들 얼굴 보며 오순도순 살다 가는 마지

막 길을 원하셨다. 하지만 사방팔방 둘러봐도 그럴 형편이 못 되니 자식들 짐을 덜어주려고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 못된 자식들은 현대판 고려장인 줄 뻔히 알면서도 제 새끼 끌어안고 살기에 바빠 모

르는 척했다.

"아이들이 극구 말리는데도 내 집이 편해서 내가 내려왔다"고 하시더라는 동네 분들의 전언을 듣고

부끄러워 차마 낯을 들 수 없었다. 유품을 정리하는데 낡은 공책에 써놓은 시 같은 메모가 있었다. 미

리 준비하신 유언장 비슷한 내용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렇게 비참하고 힘든 일인 줄 몰랐다. 내 목숨 하나도 어쩌지 못하고 너희에게 짐

만 된 것 같아 미안하구나. 너희 사남매 키우면서 힘든 적도 많았지만 한 번도 무거운 짐으로 여긴 적

은 없었다. 너희가 없었다면 사기를 당했을 때 벌써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수레가 언덕을 오를 때

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너희는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삶을 지탱하게 하는 소중한 보

물이었다."

눈앞이 뿌예져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살아 계실 때 잘 해 드리지 못한 죄책감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힘들어도 끝까지 모셨더라면 그렇게 회한에 울부짖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아버지 돌아가시고 스무 번의 해가 바뀌었다. 100세 시대를 맞아 건강하고 활기찬 노인들을 자

주 대하게 되니 고희(古稀)도 못 넘기고 고생만 하다 가신 아버님 생각이 뼈에 사무친다. 뒤늦게나마

산소에 엎드려 용서를 빌고 싶지만 이제 와서 그럴 용기조차 나질 않는다. 간곡한 심정으로 속건제

(贖愆祭·허물을 씻기 위한 제사)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