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혜 106

우리가 되는 법-김근혜

우리가 되는 법 김근혜 우리가 되는 법’이란 작품이 눈길을 끈다. 이완이라는 작가의 미술품인데 오브제들을 모아서 저울 위에 올려두고 무게를 똑같이 맞추어 놓았다. 저울의 눈금에 호기심이 인다. 마네킹 몸통과 다리, 생수통, 도자기는 하나같이 성한 데가 없다. 똑같은 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많아 보였다. 서로 다른 개체가 함께 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잘리고 재결합하면서 다른 사물이 되어 있다. 마네킹의 팔, 다리가 잘려나간 부분에서는 섬뜩하기도 했다. 모난 부분을 버려야 목적에 맞는 무엇이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희생 없이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사랑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여러 오브제가 섞여 있는 미술품을 보며 다문화가정의 성현이가 떠오른다. 필리핀 어머니를 둔 성..

근* 글 2018.04.04

책의 현주소-김근혜

책의 현주소 김근혜 “문자왔숑.” 반가운 마음도 잠시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찬물 세례가 얼굴로 쏟아진다. “정기구독은 무립니다. 앞으로 책은 보내지 말아 주세요.”, “구독 기간이 끝나면 향후 책은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책을 받는 일이 언제부터 불쾌한 일이 되었을까. 번거롭고 귀찮은 존재로 전락했을까. 형편없는 물건 받은 것처럼 짜증 섞인 어조다. 보낸 사람의 얼굴을 생각해서 유순하게 말할 수는 없을까. 한 달에 몇 권을 받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해는 가지만 상대방의 마음도 헤아려서 정중하게 거절한다면 유쾌한 인간관계가 되지 않을까. 그래도 “고맙습니다.”라는 문자로 대신한다. “누가 책을 보내라고 했나, 오는 책이 너무 많아서 읽을 시간이 없다, 책 같지도 않은 책은 뜯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근* 글 2018.04.04

부부나무-김근혜

부부나무 김근혜 욱수산은 소소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좋다. 어느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작은 들풀조차도 환희를 자아내게 한다. 하찮게 보이는 돌멩이도 디딤돌이 된다. 돌돌 거리는 냇물 소리는 또 어떠한가. 세상과 겉놀던 마음을 말끔히 씻어 준다. 돌탑을 보면서 짧으나마 느끼게 되는 숙연함, 오 형제, 삼 형제 나무를 지나 산 중턱에 이른다. 잘 닦아 놓은 계단 길을 오르다 갑자기 울퉁불퉁한 돌무더기 길을 만난다. 돌부리가 많은 산이어서 넘어지지 않을까 조심조심 산에 오른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구청에서는 뭘 하고 있느냐’는 식으로 투덜거렸는데 등산길은 묵언 수행의 여정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왔다. 질펀한 길도 있고 평평한 길도 있다. 오르막을 한참 오르면 잠시 쉬어 갈 수 있게 너럭바위도..

근* 글 2018.04.04

일등주의-김근혜

일등주의 김근혜 마음에 불을 안고 사는 건 아닐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상대방이 보면 별것 아닌 일도 나에겐 중요하고 큰일이 된다. 불의하고 불공정한 것에 대해서는 참을성이 부족하다. 속에 가두어두었던 불이 불쑥 튀어나와 활활 타오르곤 한다. 지나고 보면 후회된다. 지인은 눈만 슬쩍 감으면 편할 일을 왜 자처해서 힘들게 사느냐고 충고한다. “그냥 모른 척하고 있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난 홧김에 사고를 치고 말았다. 피땀 흘려 쌓은 탑이 일등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내 수고와 노력은 일등 앞에서 자존심이 갈가리 찢어졌다. 말로만 듣던 일등주의, 일등만 인정하는 세상에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리고 말았다. 일등만 부추기는 사회에서 선選..

근* 글 2018.04.04

반곡지-김근혜

반곡지 김근혜 반곡지를 사진에 담으려는 사람들 등쌀에 복숭아꽃이 몸살을 앓는다. 제 스스로 저어할 수 없는 꽃송이의 옹알이가 아린 오후다. 그래도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마음 넓혔을 것을 생각하니 기특하다. 나뭇가지 몇 개 꺾어 경계를 만든 주인의 애타는 심정이 울면서 웃었던 건 아닐까. 세상 어디에도 있는 연못이지만 반곡지는 특별하다. 유명한 출사지로 알려지기 전부터 나만의 장소였다. 슬픈 일, 화난 일도 이곳에 오면 편안해진다. 특히 4월의 반곡지는 Deep Purple의 April이 수면 위로 흐른다. 웅장하고 경쾌하면서 클래식한 리듬이 잠자는 영혼을 쩡쩡 깨운다. 반곡지에 와서 이 선율에 빠져 보라. 까닭 없이 외로울 때도 이곳에 와 보라. 마르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 같은 샘 하나 있으니. 누이 같..

근* 글 2018.04.04

인연

인연 김근혜 삶은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이다.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무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함께 했지만 바람처럼 스쳐간 이들도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이면 인연에 대한 생각해 보게 된다. 전화번호부의 이름을 쭉 훑어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름달처럼 떠오른다. 그중에서 동생뻘 되는 나이지만 오빠 같은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 L 씨다. L 씨는 소소한 일에까지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다. 칼럼을 쓸 때의 일이다. 신문에서 내 글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어왔다. 격려 덕분에 분발할 수 있었다. 자기 일도 바쁜데 남의 일에 정을 낼 사람이 얼마나 되랴. 조그만 일에도 살갑게 전화해서 다독이고 살아갈 힘을 준다. 그의 따스한 정 덕분에 한 해를 잘 버텼는지도 모른다. 전화번호부에서 영원히 제명한 아..

근* 글 2018.04.04

응답하라, 치매-김근혜

응답하라, 치매 김근혜 100세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 쟁점이 되고 있는 노인 문제를 보면, 오래 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 욕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중에서도 치매가 머리를 혼란하게 한다.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의 무차별적인 반란을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 며칠 전 연예인 조부모 자살 사건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신이 준 수명까지도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대다. 빈곤과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심지어는 가족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그림이다. 애년(艾年)을 사는 나도 앞으로 다가올 은퇴와 치매 문제를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닌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 치매 환자를 찾는 현수막이 하나, 둘 늘어간다. 몇 달이 지나도 철거되지 않는 현수막을 보며 그들이 어디로..

근* 글 2018.04.04

유통기한-김근혜

유통기한 김근혜 미풍 한 줄기처럼 다가온 그녀. 보랏빛 들국화였다. 무리 속에 있어도 유달리 눈에 드는 미소는 마음을 끄는 자석이었다. 시름을 담은 눈빛 속에서도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가 선물이라며 대추 엑기스를 내밀었다. 가을부터 주겠다고 했는데 잊고 있었다며 긴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주는 것만 잊은 것이 아니고 유통기한도 깜빡했나 보다. 유통기한이 넉 달이나 지나 있었다. 차마 아름다운 마음에 미안함을 얹기 싫어서 함구했다. 살다 보면 입에 자물쇠를 채워야 하는 날도 있다. 그녀의 정이 담긴 엑기스를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 내 마음에 그녀를 담아 둔 것처럼. 오래 알고 지낸 지인도 그런 적이 있었다. 가끔 만나 차도 마시고 마음도 나누는 사이다. 한번은 벌레 먹은 복숭아..

근* 글 2018.04.04

푸른 얼·룩-김근혜

푸른 얼·룩 김근혜 블라우스에 묻은 얼룩이 표백제를 써도 지워지질 않는다. 왼쪽 가슴에 남은 흔적 같다. 그 기억을 지우려고 손에 더욱 힘을 주고 문질러 본다. 손목만 욱신거린다. 열 몇 살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니 자태가 아름다운 여인이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조등으로 걸린 엄마의 빈자리가 늘 허전하던 때여서 그 자리를 대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새엄마는 나이 차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날씨처럼 변덕이 심했다. 불협화음 사이에서 늘 조마조마한 나날이었다. 벗어나고 싶어서 날이 새기가 무섭게 학교로 달려갔다. 집이 싫어서 달렸고 그 여인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서 또 달렸다. 묵은 때가 많은 빨래는 삶아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듯이 내 유년이 되돌릴 수 없는 얼룩으..

근* 글 2018.04.04

6월의 江-김근혜

6월의 江 김근혜 6월이 아름다운 이유는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영령들과 참전용사들의 뜨거운 피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파트 담 너머로 붉게 핀 장미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픔 없이 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충혼탑을 보며 숙연해지는 이유도 그들의 고귀한 생명으로 지켜낸 나라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6월 25일이면 아픈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던 날이니까요. 안동에서 살던 작은아버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학도병으로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갔고 황해도 해주에서 살던 어머니는 남하하다가 가족과 생이별을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동족상잔의 희생자입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아픔과 어머니의 슬픔을 함께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작은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면 지금은 아흔을 바라보는 ..

근* 글 2018.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