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글

책의 현주소-김근혜

테오리아2 2018. 4. 4. 09:05
728x90

책의 현주소

  김근혜

 

자왔숑.” 반가운 마음도 잠시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찬물 세례가 얼굴로 쏟아진다. “정기구독은 무립니다. 앞으로 책은 보내지 말아 주세요.”, “구독 기간이 끝나면 향후 책은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책을 받는 일이 언제부터 불쾌한 일이 되었을까. 번거롭고 귀찮은 존재로 전락했을까. 형편없는 물건 받은 것처럼 짜증 섞인 어조다.

 

보낸 사람의 얼굴을 생각해서 유순하게 말할 수는 없을까. 한 달에 몇 권을 받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해는 가지만 상대방의 마음도 헤아려서 정중하게 거절한다면 유쾌한 인간관계가 되지 않을까. 그래도 고맙습니다.”라는 문자로 대신한다.

 

누가 책을 보내라고 했나, 오는 책이 너무 많아서 읽을 시간이 없다, 책 같지도 않은 책은 뜯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항간에 돈다. 책이 없는 집은 문이 없는 가옥과 같고 책이 없는 방은 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 키케로는 말했는데 책의 신세가 이렇게 버림받을 줄은 몰랐다.

 

편집 일을 본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전화나 문자로 많은 사람을 만난다. 책을 받아서 기쁘다고 하면 내가 책이라도 만들어낸 것처럼 뿌듯해진다. 마지못해 받은 것처럼 거절하는 이나 조그만 실수를 두고 몇 날 며칠 따지는 분을 만날 땐 보람보다 회의가 느껴진다. 독자도 많지 않고 책 만드는 일도 만만치 않다.

 

나는 책 욕심이 많다. 읽을 시간이 없더라도 책을 선물 받으면 감사하게 생각한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 보면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날 때도 더러 있다. 그럴 땐 중고라도 산다. 한 권 두 권 사 모은 책이 책장에 들어갈 틈이 없다. 서재가 복잡해서 바닥에 몇 줄씩 웅크리고 지낸다. 그 모습이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날 때도 있다. 자리가 없어 구석에 내쳐져도 체통을 잃지 않는 게 책이다. 그 꿋꿋한 매력에 사로잡혀 없는 시간이라도 내서 읽게 된다.

 

책 중에서도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계간 잡지의 경우는 푸대접이 더 심하다고 한다. 지방지는 아무리 뛰어나도 폄하를 당하기 일쑤이고 매호 발송되는 책이 독자의 손을 거치지도 않고 고물상으로 팔려 나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정성을 들인 작가의 작품도, 예술혼도 고물상에서는 무가치하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이 대접받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애쓴 수고도 힘겹게 보탠 쌈짓돈도 파쇄기에 잘려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많은 작가의 신분과 영혼이 한낱 고물상에서 이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책을 사랑하지 않고 외면한 결과인 것 같아 책임감이 든다.

 

포장지도 벗지 못한 채 사장되는 책의 비명이 먼 훗날, 내 책이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한다면 심혈을 기울인 작가의 노고를 함부로 폐기 처분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제 몸을 사른 나무도 가엾다. 나무의 희생까지 생각한다면 책은 분명 소중히 여겨야 할 숨 같은 존재이다. 이건 나만의 생각일까.

 

'근*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자를 씹다-김근혜  (0) 2018.04.04
우리가 되는 법-김근혜  (0) 2018.04.04
부부나무-김근혜  (0) 2018.04.04
일등주의-김근혜  (0) 2018.04.04
반곡지-김근혜  (0) 2018.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