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혜수필가 75

어디가 끝?

어디가 끝? 키 작은 문어 머리 H네 암자. 코딱지만한 데 사람들은 들끓어. H는 입담이 좋고 잘 삐져서 ‘아줌마’로도 불려. 사람들 끌어모으는 재주가 남달라서 시주가 떨어지질 않아. 그한테 가면 쉽게 명예를 살 수 있어서 돈을 싸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 돈은 많은데, 물건은 제 구실을 못하고 명예는 얻고 싶은 사람들. 그러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지. 그의 손을 거치면 도금한 것 같이 돼서 수상작이 될 때가 많아 그러다 보니 그의 손을 빌어 명예를 얻는 거지 난 그를 교주라 불러. '선생'과 '교수'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교수'라 불러 교주의 암자는 점점 커져 갔지. 알량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돈을 많이 주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암자에 명부를 새겨주지. 돈을 조금 준 사람은 도마 위의 생선이야. ..

근* 글 2018.03.16

아내 사용 설명서/김근혜

아내 사용 설명서/김근혜 내 이름은 아내입니다. 함부로 다루거나 힘을 남용하면 금방 흠이 납니다. 유리그릇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어 주세요. 탈이 나면 평생 툴툴거립니다. 고장이 났을 땐 즉시 고치는 게 좋습니다. 버려두면 수리할 수 없어집니다.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건성으로 들어서 같은 얘기를 몇 번씩 하면 화가 납니다. 시시콜콜한 말이라도 추임새를 넣어가며 공감해 주세요. 아내들의 수다는 자가 치료인 생존수단입니다. 가슴의 울림까지 들어준다면 더 행복하겠지요. 사냥꾼 모드가 작동해서 빨리 일어나고 싶을 땐 간단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의사를 전달해보세요. 주의할 것은 해결사 탐지기를 작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내는 답을 구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남편과 같이 있고 싶고, 자신의 말을..

근* 글 2017.02.13

꽃보다 9

꽃보다 9 김근혜 교회 앞마당에 들어섰다. 헌혈차와 몇 개의 부스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자주 있는 일이라 예사로 넘기고 본당으로 향하고 있는데 “원장님”하는 목소리가 귀에 익다. 학모로 만나 지금까지 정을 나누고 있는 지인이다. “장기기증하실 거죠? 저도 했어요. 남편한테 권했는데 내가 서약서 쓰는 동안 도망가고 없네요. 큭큭.” 뜬금없는 지인의 말에 깜짝 놀랐다. 뭔가 옹색한 변(辯)이라도 늘어놓는 게 순서일 텐데 이럴 때 내 입심은 발휘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스로 향하고 있는 내 발걸음이 신기했다. 서약서를 받아들었다. 글씨가 작아 잘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하는 것이니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모두 표시했다. 얼떨결에 하긴 했는데 무슨 내용..

근* 글 2016.02.03

파도 소리 들으며 솔 숲에서 잠들어 볼까나-김근혜

파도 소리 들으며 솔숲에서 잠들어 볼거나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마실 승인 2014.11.07 계절을 느낄 수 없는 동해, 해안도로를 따라 넘실 넘어가 본다. 휘드린 내 운명을 틀고 틀어서 바다에 잠재운다. 속이 후련해진다. 파도는 사탕 발린 유혹처럼 거침없이 끌어당긴다. 못 이긴 체 알몸으로 서서 가을의 허기를 채워 볼까나. 어느 가을, 월송정 앞바다에서 연인이 바다를 거닐고 있었다. 십 원짜리 동전 한 개가 남자 눈에 띄었다. 둘은 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네 잎 클로버를 찾듯 모래를 뒤적이다 몇 개 더 주워 가슴에 넣었다. 동전엔 샤머니즘의 흔적이 거무튀튀하게 남아 있었다. 아마도 용신에게 바친 동전이었나 보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파도에 쓸려온 것들이 많았다. 모래 틈에서 뭔가 반짝이는 물체가 눈에 띄었다..

근* 글 2014.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