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혜수필가 75

반곡지/김근혜수필가

반곡지에 들렀다. 비에 젖은 연둣빛 버드나무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봄의 눈짓에 화답하듯 새들의 지저귐도 정겹다. 나뭇잎은 4월을 벗으려는 듯 군데군데 초록 띠를 두르고 있다. 반곡지를 사진에 담으려는 사람들 등쌀에 도화밭은 몸살을 앓은 흔적이 역력했다. 무심한 발자국에 상처난 도화 송이를 어루만져 본다. 애써 마음을 넓혔을 도화가 기특해 보인다. 나뭇가지 몇 개 꺾어 경계를 만든 주인의 애타는 심정이 울면서 웃었던 건 아닐까. 반곡지는 유일한 쉼의 장소가 되었다. 세상 어디에도 있는 연못이지만 여기는 특별하다. 4월의 반곡지는 ‘Deep Purple의 April’이 수면 위로 흐른다. 웅장하고 경쾌하면서 클래식한 리듬이, 잠자는 영혼을 쩡쩡 깨운다. 반곡지에 와서 이 선율에 빠져보라. ..

인생항해/김근혜 수필가

인생 항해 김근혜 작은 아이는 착한 해커이다. 중학교 다닐 때, 우연히 접하게 된 삼촌의 프로그래밍 책이 인생 항해의 출발점이 되었다. 남들이 많이 가지 않은 길을 가기 위해 처녀항해의 닻을 올렸다. 대양에서 낚아 올리는 C언어는 어린 아들을 잡아당기는 미늘이었다. 암호 같은 언어와 의사소통을 하면서 세상을 배워가고 있었다. 호기심이 건넨 열정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신나는 여행이었을 것이다. 사춘기 소년이 소녀를 만났을 때의 설렘 같은 기분이었으리라. 해킹 공부는 소심한 아이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게 하는 무대였다. 자신감에 찬 날은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가끔 책과 투닥거릴 때는 절교라도 할 것 같아 옆에서 지켜보는 내내 조마조마한 적도 많았다.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는 아이가 기특했다..

벽/김근혜 수필가

장기읍성 둘레길이다. 나지막한 성벽은 여인의 허리선처럼 굽이굽이 감아 돌고 있다. 훤히 드러낸 등허리를 밟고 지인과 자분자분 걷는다. 한 층 한 층 쌓아 올린 성벽은 각기 다른 얼굴로 정겹게 서 있다. 푸른 이끼 속에서 새싹은 움을 틔우려고 발길질한다. 발아래 엎드린 동해가 유난히 굼실거리며 금방이라도 달려올 기세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낮은 집들이 어미 날개 아래 든 병아리 같다. 포근함이 밀려드는 오후다. 지나가는 여행객의 말소리가 외딴집의 담을 넘었는가 보다. 반가움에 뛰쳐나온 할머니가 여행객의 말을 받는다. 사람 구경하기가 얼마나 귀했으면 길손들의 발목을 잡을까. 할머니의 풍기는 인상으로 봐서 젊은 날은 담벼락에 심어둔 매화만큼이나 고고했을 것 같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읍성에 얽힌 전설을 엉거주춤..

수선집을 엿보다/김근혜 수필가

수선집을 엿보다 빈자리가 휑해 보인다. 수선집 여인의 옆자리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그녀의 남편은 바람이 되어 다른 집에 머문다. 그 여파로 웃음을 잃었다. 무채색의 하루하루를 안고 사는 생기 없는 삶이 눈동자에 맺힌다. 찔려도 속이 없던 사람이 점점 바늘이 되어 간다. 신혼 초에 홈패션을 배웠다. 학원에서는 주로 부업이나 창업자들을 위해 공업용 재봉틀을 사용했다. 속도가 엄청 빨라서 손과 발의 호흡이 맞지 않았다. 바늘에 찔린 상처가 궂은살이 되었다. 신혼생활에서 덧난 불협화음이 목에 걸려 떠돌고 있었다. 황폐한 마음을 털어버리기 위해 취미생활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묵직하게 걸려 있던 것들이 점점 사라져 갔다. 그제야 둥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재봉틀 페달을 조심스럽게 밟으면서 삶의 의미를 한..

카테고리 없음 2021.12.15

등, 무꽃 피다/김근혜 수필가

등에 무꽃이 허옇게 폈다. 꺾어서 맛을 본다면 아마도 달싸한 맛이 나지 않을까. 눈여겨보지 않아도 싹을 틔우고, 물을 주지 않아도 꽃을 피운다. 사람 등에만 피는, 소금기를 먹고 자라는 꽃. 삶의 각질로 이루어진 꽃, 아름다운 향을 지니고도 어둠 속에 있어서 더 쓸쓸해 보인다. 삶은 답안지가 없는 문제집이며, 눈치 없이 문제를 떠안기기에 바쁘다. 루터 안에 갇힌 삶의 등을 벗기려 애써본다. 문제를 풀었는가 싶으면 매듭이 지고 또 다른 형식의 난제가 로그인된다. 등은 엉켜있는 실타래다. 등은 의지와 상관없이 울고, 웃으며, 밥의 의미를 새기게 한다. 생생한 삶의 터에서 쉼 없이 돌아가는 회전의자다. 가녀린 등도 가족 앞에선 꼿꼿함으로 위장하고 균형을 잡기 위해 몸부림친다. 가족을 지키느라 생의 나들목에선 ..

길에 서다 /김근혜 수필가

길에 서다 김근혜 차들이 게걸음이다. 땅을 장사지내는 조문 행렬에 고속도로가 마비다. 불도저는 늙은 땅을 풀어헤쳐 새살을 파느라 여념이 없다. 목덜미를 물린 땅은 하늘을 향해 굉굉 소리를 낸다. 딸려 나온 벚나무가 잇몸을 드러내고 고통을 견디고 있다. 컬러 사진이 누렇게 바래져도 여전히 가야 할 길은 그대로다. 길을 걸으면서 끝을 찾고 마지막이라 말하면서 허공을 향하는 넝쿨손. 욕망으로 중독된 세상에서 엇길로 가다 발이 빠진다. 아버지의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어린 시절 멀리서 울리던 교회당 종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남들보다 쉽고 편하게 가는 사람들, 지름길로 가지 않아도 빠르게 간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지 않아도 매화는 핀다.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 무엇이 될까 고민하지..

카테고리 없음 2021.11.25

홀로나기-김근혜

홀로나기 김근혜 가을은 여인의 가슴을 애연(哀然)하게 한다. 삶을 빚던 봄과는 달리 철썩 파도가 때리고 가는 느낌이다. 외로움이 불쑥불쑥 문턱을 넘나든다.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캄캄하고 텅 빈 공간에서 느껴지는 황량함이 두려워 선뜻 들어서기가 망설여진다. 열었던 문을 다시 닫고 거리로 나선다.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홀로나기 연습 중이다. 처음엔 혼자 있는 것이 홀가분해서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간섭할 사람이 없어 좋고 행동도 자유로워 눈치 보지 않아도 되었다. 삼 대가 도를 닦아야 누릴 수 있는 호강이라며 부러워들 했다. 혼자 오래 살다 보니 음식도 사 먹는 편이 많다. 어쩌다 만나는 가족이 반갑고 즐거워야 하는데 요리할 일이 스트레스로 여겨질 때도 더러 있다. 그런데 이젠 가..

근* 글 2018.04.04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김근혜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김근혜 내 차례가 되었다. 생애사를 절반도 읽지 않았는데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봇물이 터지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내 옆에 앉은 그녀가 남편 얘기를 하기 전까지는 평온하기만 했다. 그녀는 부잣집 마나님처럼 아주 고왔다. 젖은 땅이라곤 한 번도 밟고 살았을 것 같지 않은 온화한 모습이다. 그녀 남편은 직장이 없어서 놀고 있는 처지다. 먹을 것이 없어 아등바등하면서도 돈을 빌려 술을 마시고 동네가 시끄러울 정도로 주정도 하지만 그녀는 언젠간 남편이 변할 거라며 기도만 한다고. 그녀가 흘려야 할 눈물이 내 팍팍한 삶과 만나서 이입되었나 보다. 감추어두었던 아픔이 요동치며 다투어 흘러내렸다.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어쩌면 내가 믿는 신께서 이런 기회..

근* 글 2018.04.04

우리가 되는 법-김근혜

우리가 되는 법 김근혜 우리가 되는 법’이란 작품이 눈길을 끈다. 이완이라는 작가의 미술품인데 오브제들을 모아서 저울 위에 올려두고 무게를 똑같이 맞추어 놓았다. 저울의 눈금에 호기심이 인다. 마네킹 몸통과 다리, 생수통, 도자기는 하나같이 성한 데가 없다. 똑같은 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많아 보였다. 서로 다른 개체가 함께 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잘리고 재결합하면서 다른 사물이 되어 있다. 마네킹의 팔, 다리가 잘려나간 부분에서는 섬뜩하기도 했다. 모난 부분을 버려야 목적에 맞는 무엇이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희생 없이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사랑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여러 오브제가 섞여 있는 미술품을 보며 다문화가정의 성현이가 떠오른다. 필리핀 어머니를 둔 성..

근* 글 2018.04.04

책의 현주소-김근혜

책의 현주소 김근혜 “문자왔숑.” 반가운 마음도 잠시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찬물 세례가 얼굴로 쏟아진다. “정기구독은 무립니다. 앞으로 책은 보내지 말아 주세요.”, “구독 기간이 끝나면 향후 책은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책을 받는 일이 언제부터 불쾌한 일이 되었을까. 번거롭고 귀찮은 존재로 전락했을까. 형편없는 물건 받은 것처럼 짜증 섞인 어조다. 보낸 사람의 얼굴을 생각해서 유순하게 말할 수는 없을까. 한 달에 몇 권을 받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해는 가지만 상대방의 마음도 헤아려서 정중하게 거절한다면 유쾌한 인간관계가 되지 않을까. 그래도 “고맙습니다.”라는 문자로 대신한다. “누가 책을 보내라고 했나, 오는 책이 너무 많아서 읽을 시간이 없다, 책 같지도 않은 책은 뜯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근* 글 2018.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