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바람든 무로 굴러 본 세상 / 권남희

테오리아2 2022. 9. 2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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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는 잘 보관해야 한다. 신문지에 꼭 싸서 두어도, 비닐 랩으로 싼 후 냉장고에 갈무리해 두어도 일주일 이상 지난 뒤 잘라 보면 바람이 들거나 물러 있다.

무는 양상추나 샐러리 등 비싼 야채처럼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지만 요리를 할 때 여러모로 쓰임새가 있다. 국물이나 매운탕을 시원하게 맛낼 때나 생선 찜, 갈비찜, 설렁탕에 곁들여 먹는 큼직한 깍두기, 갈비집에서 빼놓지 않고 내놓는 무채, 초절임 무쌈, 포기김치 담글 때 켜켜이 박는 무채 등 갖가지로 변신한다.

대충 보관해 두었다가 괜찮겠거니 하며 요긴하게 쓸려고 꺼내 보면 겉모습은 틀림없는 무인데 속은 구멍이 숭숭 뚫려 솜방망이가 되어 있다. 꼭 무로 요리를 해야 제 맛이 나는 경우에 무는 그렇게 망가져 있다. 바람든 무는 무슨 요리를 해도 아무런 맛이 나지 않고 푸석하다.

어머니는 봄날이면, 겨우내 저장해 둔 무를 꺼내 손질하느라 댕겅댕겅 잘라내면서 혼자말을 중얼거렸다. “바람든 무수는 먹잘 것이 없당께. 무말랭이도 모돼. 꼭 자식 하나 건사 못하고 늙어빠져 혼자 궁글어 댕기는 영감탱이 같당께…….”

나의 삼십대는 바람든 무나 다를 바 없었다. 허깨비의 삶처럼 바람이 뚫고 간 자리는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지 않아 가볍기 짝이 없었다. 차돌처럼 단단하더던 나의 속도 믿음을 잃어버리자 무엇에든 흔들렸다. 내 생각에 깊이가 없어지다 모든 행동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약해지고 귀도 얇아져서 누군가 조금만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해도 상처를 받아 만나지 않고 혼자 지내기 일쑤였고 조금만 따뜻하게 대해 주어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여우하고는 살아도 소하고는 못 산다다.’ 나의 반쪽은 내게 함부로 말을 해대며 이리 차고 저리 굴렸다. ‘내가 망가질수록 좋고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어느 날부터 나는 삶을 함께 하는 반려자가 아닌, 소보다 못한 천덕꾸러기였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무뚝뚝함과 눈치껏 아부하지 못하는 나의 태생을 원망하기도 했다.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려 버려 밀도가 없어진 내 생활은 어떤 삶의 양식에도 중심을 두지 않은 채 바람을 탔다. 예쁜 꽃을 보면 무작정 사들여 놓지만 가꾸지 못해 자꾸 죽고 그것조차도 내게는 상처로 남고 절망이 되고 말았다. 겉멋을 부리며 여행을 떠났는데도 그것은 가출처럼 공허한 후유증을 남겼다.

나의 슬픔에 취해 무작정 타인에게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맹목적인 사람으로 바뀌어 갔다. 심약해진 채 나를 받아 줄 이성 친구가 없을까 세상을 기웃댔다. 세상은 야박하여 바람든 무를 단번에 알아 보았다. 무의 소원은 한 가지 따뜻함이었지만 그들은 호락호락하게 무가 바라는 정을 주지 않았다. 마치 물건을 고를 때 혹시 싸구려 인데 속아서 사지 않나, 겉은 멀쩡한 과일이 속이 썩지 않았나 들러 보고 가벼움을 알아채기 위해 뒤적일 때처럼 이리 재 보고 저리 테스트 하면서 마음을 열지 않았다. 가식을 덮은 독한 술에 고도로 위장된 영혼 없는 사랑만 있을 뿐이었다.

바람든 데다 강추위에 어는 꼴이었다. 차라리 쓰레기 더미에 묻혀 쓰레기가 내는 열기에 자신을 맡긴 채 새싹을 내는 일이 더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쓰레기를 뿌리 삼아야 내 삶을 피울 수 있어 만만치 않았다. 이혼으로 끝난 바람든 무.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다가 상처투성이로 돌아온 무. 동병상련의 바람든 짝을 찾았지만 서로에 대한 기대만 있을 뿐 서로의 아픔에 도움도 되지 못한 채 헤어진 무……. 세상 어디에도 위로는 없었다.

 

 

어떤 길도 태고의 세계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그대의 영혼에 위로와 행복을 주는

별들의 무리도

숲이나 강물, 바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것은

나무도 아니고, 강물이나 동물도 아니다

그대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은

오로지 그대와 같은 존재들 뿐이다.

 

 

- 헤르만 헤세 ‘어디에도 위로는 없다’ 전문

 

 

어느 누가 따뜻이 불러 주지도 않건만 분주하게, 정처 없이 어울려 돌아다니던 버림받은 무들은 홀로 서야 한다는 데 생각을 모으고 흩어졌다. 바람이 들어 세상을 굴러다니던 30대는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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