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나목을 내다보는 시간/김서령

테오리아2 2022. 9. 21.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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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등뒤에 나목으로 이뤄진 숲이 있다. 저 나무들은 아마도 참나무일 것이다. 누가 심은 게 아니라 원래 이 땅에서 절로 돋아난 나무들. 참나무에 꿀밤이 열리면 꿀밤나무다. 도토리를 꿀밤이라고 부르지 상수리라 부르는 건 들은 적이 없는데 나무일 땐 도토리나무보다 상수리나무라고 부르는 빈도가 더 높은 건 왜일까(난 아직도 세상에 이렇게 모르는 것 투성이다). ''이라니, 그 외의 다른 나무는 '거짓'나무라도 된다는 뜻일까.

 

전에 꿀밤 나무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있다. 산에 꿀밤이 열리면 그걸 다람쥐가 먹고 꿀밤을 먹고 사는 다람쥐를 오소리 같은 좀 큰 짐승이 잡아먹고 오소리를 잡아먹는 너구리같은 더 큰 짐승을 또 호랑이가 잡아먹고, 그런 먹이사슬의 고리가 제대로 꿰어지자면 맨 아래사슬엔 꿀밤나무의 존재가 필수라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살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바로 꿀밤나무라는 그 말의 사실여부를 나는 아직 확인해본 적 없다.

 

그렇지만 그 말을 다 믿지 못하는 건 그 이야기의 논점이, 일본 산에는 꿀밤나무가 없어 호랑이가 자라지 못하고, 호랑이 울음소리가 가끔씩 땅을 흔들어주지 못해 일본 땅은 지기(地氣)가 모자라며, 지기가 모자란 땅에서 사는 일본인은 정신력이 왜소하고 옹졸할 수밖에 없다, 뭐 그쯤의 논리였는데 나중 알고 보니 일본 땅에서 번연히 꿀밤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뇌의 캡쳐 기능은 어리석고 고집스러워 나는 꿀밤나무를 보면 자동적으로 그 먹이사슬 이야기를 연상한다. 산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올리면서 다람쥐, 오소리, 너구리, 호랑이의 먹이사슬 구조를 재빨리 팔락팔락 파일 점검한다. 요컨대 도토리를 보면 호랑이를 연상하고 참나무의 톱니처럼 생긴 이파리를 봐도 재빨리 호랑이의 포효라는, 지축을 울리는 엄청난 소리의 스케일을 떠올리고야 만다.

 

평생 참나무를 봐왔건만 그냥 참나무와 상수리나무와 떡갈나무가 같은 나무인지 이름만 다른지를 나는 구별하지 못한다. 신갈나무와 졸참나무를 구별할 줄 모르니 그 둘의 잡종이라는 물참나무 역시 알 리 없다. 아무튼 지금 내 등 뒤로는 아마도 그런 각종의 참나무들일 꿀밤나무가 가득 들어서 있다. 여름엔 짙푸르다가 가을엔 갈빛으로 물이 들었다가 지금은 갈잎도 거의 떨어진 나목이다. 나목! 옷 벗은 나무. 그걸 내다보는 것이 내 일과 중 중요한 한 부분이다.

 

잎이 무성할 때는 책상의 방향을 몰랐다. 잎이 지고 난 후에야 아침볕이 그쪽에서 비춰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러고 보면 여름과 가으내 서향으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등 뒤에 햇볕이 떠올라 내 머리통을 책상 위 컴퓨터 위에 드리우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이 사무실이 놓인 방향을 알게 됐다. 동향으로 창이 났건만 책상은 다들 서향으로 놓였구나. 출입문의 방향 때문에 책상의 방향도 그렇게 됐겠지만 이 방이 유독 산만한 건 책상 놓인 위치 때문이 아닐까혼자 실없는 계산을 해본다.

 

이 자리에 앉아 9월이 지나고 10월이 지나고 11월이 지나고 12월이 되었다. 12월도 이제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낯선 곳이 낯익은 곳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저 숲은, 아니 저기 선 각각의 나무들은 내게 말없는 위안이었다. 잎의 빛깔이나 가지의 모양새나 흔들림의 평화가 아니라 그저 서 있는 자세로, 익숙한 존재 자체로 등 뒤에서 나를 감싸주고 안식하게 만들었다.

 

조직의 비효율에 대한 환멸이랄까 구조 속에 끼인 개인의 비애랄까를 뒤늦게 곱씹게 되던 이 곳에서 저 나무는 매번 내 안에 숨어 있는 에너지를 확인케 해줬다. 딴 방에 들어갔다 지쳐서 내 자리에 돌아와 앉으면 저 나무들이 어김없이 익숙하게 등 뒤를 받쳐줬다. 어떤 안락의자보다 안락하게 저 별것도 아닌 참나무들이 짙푸르게 누르스름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이파리들을 태연하게 흔들면서 사람을 위안하는 비밀을 어떤 지표로 밝혀낼 수가 있을까.

 

저 숲은 전혀 고요하지 않다. 잎이 뱅그르르 돌면서 떨어지거나 가지가 괜히 부러져 떨어지거나 바닥에 꿩이 날아와 앉거나 높은 우듬지 쪽으로 청설모나 까치가 날아가는데 그때마다 숲 전체의 공기가 파도치듯 화르륵 뒤집어진다. 방음 잘 되는 유리창이 달렸으니 소리가 귀로 들리는 건 아니다. 시각적으로 들린다. 아니 보지 않아도 뭔가 소란한 낌새가 간헐적으로 지나간다는 걸 안다. 그게 지나갈 때만다 설레는 것도 같고 두려운 것 같은, 황홀인지 공포인지 기쁨인지 아픔인지 구별할 수 없는 마음의 뒤채임을 느낀다. 등 뒤에 참나무 숲이 있다는 말은 등 뒤에 어느 날 호랑이가 떡 버티고 앉아 유리창 안으로 날 들여다볼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같다.

 

의자를 빙글 돌려놓고 고마운 나무들은 내다본다. 우리의 눈(생명 혹은 삶)이 마주치는 짧은 이 시간, 말라붙은 이파리를 매달고 흑갈의 몸뚱이로 묵묵히 저 자리에 십 수년(아니 수십 년? 나의 무지는 저 떡갈나무의 나이조차 가늠할 수 없다)을 서 있었을 나무를 내다보는 위안을 말로 설명해낼 수가 없다. 뭔가를 늘 언어로 설명하고 싶어 하는 이 안달과 안타까움은 문장을 배워버린 자의 한계이다. 알량한 문장을 가지지 않았다면 감각의 파장을 굳이 단어로 얽매려용을 쓰지 않아도 좋으련만.

 

그런 헛수작을 지어내지 않을 때 저 풍경을 훨씬 깊이 즐길 수 있을 것을 모르지 않는다. 언어적 지성에 갇혀 비언어적 지성의 광활함을 잃어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한계 안에 갇히고 만다. 습관인지 허영인지 그보다 질긴 업인지.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업의 때를 부드럽게 눅여주는 게 바로 저 나목이 주는 위안의 핵심이다.

 

아마도 전생에 나는 나무 아래 살며 나무의 사계를 날마다 어루만지는 어떤 생명이었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눈앞에 나무가 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나무가 보이지 않는 곳에 터를 마련한 적 없다. 그게 나의 기호나 선택이 아니라 우주 운행의 방식 속에 이미 들어 있었던 원칙이었을 것 같다. 바쁜 일거리를 밀쳐두고 의자를 돌려놓고 실없는 생각으로 한 식경을 보내는 ''를 저 나무들이 몹시도 익숙한 눈길로, 마주 바라본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아득하고 아득해서 지난날이 수백 년 같고 또는 덧없고 허랑해서 10년이 한두 주일이 같다. 그 시간의 착각을 견디면서 빽빽하나 서늘하게 늘어선 나무들을 내다본다. 알아봤더니 저 숲은 산림청 소속의 땅이라 한다. 산림청의 한 자락을 날마다 지켜보는 자리가 허락된 건 예사 행운이 아니다. 다른 몇 가지 피곤쯤은 감수할 가치가 충분하다.

 

2007년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시간 속에서시간의 흘러감을 견디며 속수무책 참나무를 내다보는 시간. 참나무와 꿀밤과 다람쥐와 마침내 호랑이와 그리고 나와 내 앞의 컴퓨터와. 그 존재와 역학과 인연을 이러저리 음미한다. 생명은 단순한데 그 단순이 중첩되어 그림자가 생기고 그 그림자가 다시 겹겹의 음영을 드리워 세상은 아득하고 덧없다. 한 해가 저무는 어스름에 허공을 향해 컹컹컹 짖는다. 외로움에 관한 한 꽤 감각이 괜찮은 시인 신현림처럼 부질없이 컹컹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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