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모루 / 윤진모

테오리아2 2022. 9. 2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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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났다. 추석을 앞두고 선산에 벌초하러 간 이튿날 날도 새기 전 아내로부터 날아온 소식이었다. 8남매 가운데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마디의 유언도 남기지 않는 쓸쓸한 퇴장이었다.

 

아파트 16층 집에서 염하였다. 운명하기 4년 전 어머니는 불의의 사고로 병원 영안실에 빈소를 차렸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몸져누운 안방에 마련했다. 방 한가운데 병풍을 치고, 소렴, 대렴을 마쳤다. 형제들은 한쪽에서 염습이 끝날 때까지 앉아 있었다. 천주교식으로 장례하여 별다른 복장이라든지 상식 같은 건 아예 차리지 않았다.

 

“5년이나 누워 지낸 망자가 욕창도 하나 없네.”

 

염을 하던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옆에서 거들던 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른쪽 엄지발가락 옆에 탁구공만 한 것이 툭 불거져 있었다. 주말이면 안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아내와 함께 목욕을 시키면서도 그때는 왜 큰 관심을 두지 못했을까. 아버지가 검정 고무신을 즐겨 신으신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엄지발가락 옆에 낙타의 단봉처럼 생긴 단단한 혹 하나를 저승길에까지 가져가려고 한다. 그 연유야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내 눈에 커다란 다래끼가 달린 것처럼 눈을 바로 뜨기가 힘이 든다.

 

아버지는 일찍이 염색 기술을 배웠다. 스무 살도 되기 전, 일본 오사카의 어느 염색공장에 청춘을 맡겼다.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으리라. 참을 수 없는 울분을 오롯이 받은 게 바로 발이었을까. 마음과 몸이 아플 때마다 애꿎은 돌덩이나 드럼통을 차면서 속을 달랬을지 모른다. 뼈처럼 단단한 살덩어리가 엄지발가락 한쪽에 눈망울을 부라리듯 매달려 있다.

 

최근에 식칼 자루가 갈라지면서 빠졌다. 생전에 어머니가 오랫동안 아끼던 것이라 버릴 수 없었다. 주방 한쪽에 웅크린 자루 없는 칼을 볼 때마다 저걸 어떻게 하지?’ 오며 가며 마음만 졸였다.

 

대구 인근에 대장간이 어디 있을까?’ 대가야읍 시장에 고령 대장간이라는 자그마한 간판이 보였다. 40대 중반의 덩치가 크지 않은 젊은이가 벌겋게 달구어진 쇠붙이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신문지에 싸 들고 온 칼을 내밀었다. 3대째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그는 잠시 일손을 멈추었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잘 깎인 나무토막에 칼을 꽂아 주곤 하던 일을 계속한다.

 

불에 달군 쇠붙이를 쇠 받침대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린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진 모양대로 다듬었다가 물에 담그고 식히기를 반복한다. 수없이 두들겨 맞는 운명을 타고난 물건이다. 밑에 받힌 게 뭐냐고 물었더니 모루라고 한다. 장인이 때리는 대로 맞아준다. 온몸으로 받쳐 주면서도 아프거나 뜨겁다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할 바를 다할 뿐이다. 툭 불거진 한쪽 면에 사각형과 동그라미의 뻥 뚫린 구멍이 보였다. 그 구멍을 이용하여 어떤 모양을 만들 때 몸을 내맡겨 비틀리는 아픔도 고스란히 받아내는 모루! 그는 성인이다.

 

어디선가 본 듯 가슴을 치미는 게 있었다. 아버지를 염할 때 봤던 발가락이 눈앞에 크게 다가섰다. 그때 본 아버지의 엄지발가락 옆에 툭 불거진 것은 당신이 지닌 모루가 아니었을까. 공장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으리라. 생전에 눈물을 보인 적도 없다. 아버지는 진주조개였나.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겉보기에 잘 드러나지 않는 발가락에 차곡차곡 쌓았을까.

 

아버지는 광복 직전 일본에서 아내를 병으로 잃었다. 첫 번째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낸 적이 없다. 가슴에만 묻은 채 전처가 남긴 남매와 재취한 아내로부터 얻은 51녀를 거느리며 독한 화공약품을 맡으면서도 묵묵히 일했다. 여러 옷감에 온갖 색깔을 입히면서 눈을 호사스럽게 만들었다. 하루 일을 마치면 막걸리 몇 잔에 고달픔을 달랬으려니…….

 

마을을 지키는 장승처럼 살았다. 전처 자식이든 후처 자식이든 딱 부러지게 나무라는 일이 없었다. 우두커니 지켜보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심사였을까. 가정을 지키려는 듯 속으로만 삭이었으리라.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재취로 시집온 어머니가 낳은 첫아들이다. 사랑을 많이 받은 만큼 속앓이도 넘치도록 가슴에 안았다. 이복 누님이나 형이 말썽을 부리거나 속을 태우는 일이 있으면 고스란히 내게 쏟았다. 때론 영문도 모른 채 종아리에 회초리를 받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게 아파야 하는데도 아프지 않은 손길이었다. 당신이 영원히 잠들면서 내 어깨에 작은 모루를 얹어 놓고 떠났는지 모른다.

 

철들자 계집애 같은 일을 도맡았다. 누나는 스무 살 나이에 시집을 갔다. 아들만 여섯이고, 제일 막내가 여동생이다. 꼼짝없이 어머니를 도와 여식이 할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빨래 다리는 일을 돕고, 메주콩을 삶아 절구에 찧어서 네모나게 만들어 처마 밑에 매달기도 했다. 추석이 다가오면 지겨울 정도로 송편을 빚었고 설빔을 준비하기 위해 손에 물집이 생기도록 가래떡을 썰었다. 김장철이 되면 배추 두 접과 무 한 접을 소금에 절이고 씻는 일부터 양념 만드는 일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딸처럼 일했다.

 

언제부터 돌출되었는지는 모른다. 적어도 30여 년이 넘는 것 같다. 내 오른쪽 어깨뼈 위에는 새알심만 한 것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통증이 없어 평소엔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지낸다. 목욕하다 어깨에 툭 튀어나온 부분을 만지며 함께 살아갈 뿐이다. 그저 어머니가 내게 달아준 계급장이나 훈장으로 여기며 내 할 바를 다하며 살아간다.

 

나도 하나의 모루였을까. 아버지의 아들로, 아내의 남편으로,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제대로 살아왔는지 돌아본다. 어깨에 얹힌 새알이 더 단단해지는데도 무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