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글 87

유통기한-김근혜

유통기한 김근혜 미풍 한 줄기처럼 다가온 그녀. 보랏빛 들국화였다. 무리 속에 있어도 유달리 눈에 드는 미소는 마음을 끄는 자석이었다. 시름을 담은 눈빛 속에서도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가 선물이라며 대추 엑기스를 내밀었다. 가을부터 주겠다고 했는데 잊고 있었다며 긴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주는 것만 잊은 것이 아니고 유통기한도 깜빡했나 보다. 유통기한이 넉 달이나 지나 있었다. 차마 아름다운 마음에 미안함을 얹기 싫어서 함구했다. 살다 보면 입에 자물쇠를 채워야 하는 날도 있다. 그녀의 정이 담긴 엑기스를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 내 마음에 그녀를 담아 둔 것처럼. 오래 알고 지낸 지인도 그런 적이 있었다. 가끔 만나 차도 마시고 마음도 나누는 사이다. 한번은 벌레 먹은 복숭아..

근* 글 2018.04.04

푸른 얼·룩-김근혜

푸른 얼·룩 김근혜 블라우스에 묻은 얼룩이 표백제를 써도 지워지질 않는다. 왼쪽 가슴에 남은 흔적 같다. 그 기억을 지우려고 손에 더욱 힘을 주고 문질러 본다. 손목만 욱신거린다. 열 몇 살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니 자태가 아름다운 여인이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조등으로 걸린 엄마의 빈자리가 늘 허전하던 때여서 그 자리를 대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새엄마는 나이 차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날씨처럼 변덕이 심했다. 불협화음 사이에서 늘 조마조마한 나날이었다. 벗어나고 싶어서 날이 새기가 무섭게 학교로 달려갔다. 집이 싫어서 달렸고 그 여인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서 또 달렸다. 묵은 때가 많은 빨래는 삶아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듯이 내 유년이 되돌릴 수 없는 얼룩으..

근* 글 2018.04.04

6월의 江-김근혜

6월의 江 김근혜 6월이 아름다운 이유는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영령들과 참전용사들의 뜨거운 피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파트 담 너머로 붉게 핀 장미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픔 없이 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충혼탑을 보며 숙연해지는 이유도 그들의 고귀한 생명으로 지켜낸 나라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6월 25일이면 아픈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던 날이니까요. 안동에서 살던 작은아버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학도병으로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갔고 황해도 해주에서 살던 어머니는 남하하다가 가족과 생이별을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동족상잔의 희생자입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아픔과 어머니의 슬픔을 함께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작은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면 지금은 아흔을 바라보는 ..

근* 글 2018.04.04

용돈이 없어서-김근혜

용돈이 없어서 김근혜 어느 가난한 목사님의 사연에 카네이션 그림이 올라왔다. 화가도 기가 죽을 만큼 그림 솜씨가 대단했다. 고등학생 아들이 용돈이 없어서 어버이날 선물을 카네이션 그림으로 대신한 것이라고 했다. “용돈이 없어서…”란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다. 용돈이 없다고 불평하지 않고 그림 꽃으로 대신한 자녀가 기특하고 대견했다. 큰아이가 어버이날 선물이라며 안개꽃과 큰 상자를 내민다. 내용물은 갱년기 여성이 먹는 음료다. 홍삼제품이니 가격도 만만찮았을 것 같다. 딸아이의 형편을 아는 나로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취업준비생이라 용돈도 없는 아이가 어떻게 마련했는지 궁금했다. 어버이날에 맞추어서 이벤트란 이벤트엔 모두 응모했다고 한다. 웬만한 사연으로는 당첨되기 어려운 것을 아는지..

근* 글 2018.04.04

어디가 끝?

어디가 끝? 키 작은 문어 머리 H네 암자. 코딱지만한 데 사람들은 들끓어. H는 입담이 좋고 잘 삐져서 ‘아줌마’로도 불려. 사람들 끌어모으는 재주가 남달라서 시주가 떨어지질 않아. 그한테 가면 쉽게 명예를 살 수 있어서 돈을 싸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 돈은 많은데, 물건은 제 구실을 못하고 명예는 얻고 싶은 사람들. 그러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지. 그의 손을 거치면 도금한 것 같이 돼서 수상작이 될 때가 많아 그러다 보니 그의 손을 빌어 명예를 얻는 거지 난 그를 교주라 불러. '선생'과 '교수'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교수'라 불러 교주의 암자는 점점 커져 갔지. 알량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돈을 많이 주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암자에 명부를 새겨주지. 돈을 조금 준 사람은 도마 위의 생선이야. ..

근* 글 2018.03.16

사진, 또 하나의 언어-김근혜

사진, 또 하나의 언어 김근혜 징후다. 답답해서 밥이 목구멍에 걸린다. 산맥들이 꿈틀거리며 탈출을 꿈꾼다. 좋지 않은 호흡기 탓에 서랍 안에서 꿈이 늙을 때가 많다. 방랑벽이 있는 사람이 겨울을 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견디는 재간은 나이인 것 같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무작정 시동을 건다. 이사 온 지 삼 개월이 지나가는데 낯설다. 감기로 인해 실내에서 지내다 보니 가을이 떠나고 없다. 직장을 그만둔 후론 사진을 찍는다. 영혼이 피사체에 빠져 일체가 될 때 느끼는 희열이 나를 바깥으로 밀친다. 누군가가 지나쳐버린 하루를 담고, 내가 사랑하는 파도도 넣으며 위안을 얻는다. 검은 상자 안에서 빨간 알약, 파란 펭귄, 다 닳은 지팡이가 나온다. 그들의 호흡이 멈추기 전에 재빨리 하드웨어에 저장한..

근* 글 2018.02.27

귀 멀미-김근혜

귀 멀미 김근혜 귀耳가 저녁에는 더 바쁘다. 예불시간에 맞춰 종이라도 치려는 건지. 커다란 눈을 단 산악자전거가 찌르릉거리며 귓속을 이러저리 달리는 느낌이다. 전입신고도 하지 않고 입성한 그에게 정거장이 돼주기로 했다. 왼쪽으로 누워야 겨우 내려오는 차단기도 마다하고 두근거리며 그를 기다리는 날이 생겼다. 전깃줄 우는 소리, 파도 소리, 매미 소릴 내며 쉼 없이 조잘거리는 귓속. 그가 요동칠 땐 이상하게 첫사랑이 떠올랐다. 귓속을 어지럽히던 그가 잠시 침묵을 하는 동안 금단현상이 왔다. 그 적막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나쁜 사람과 함께 하면서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것처럼. 어린 시절 외롭게 자란 탓도 있다. 난 황혼 무렵을 사랑하지만 미워도 한다. 해거름, 대문 밖에서 가족을 기다..

근* 글 2017.09.20

아내 사용 설명서/김근혜

아내 사용 설명서/김근혜 내 이름은 아내입니다. 함부로 다루거나 힘을 남용하면 금방 흠이 납니다. 유리그릇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어 주세요. 탈이 나면 평생 툴툴거립니다. 고장이 났을 땐 즉시 고치는 게 좋습니다. 버려두면 수리할 수 없어집니다.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건성으로 들어서 같은 얘기를 몇 번씩 하면 화가 납니다. 시시콜콜한 말이라도 추임새를 넣어가며 공감해 주세요. 아내들의 수다는 자가 치료인 생존수단입니다. 가슴의 울림까지 들어준다면 더 행복하겠지요. 사냥꾼 모드가 작동해서 빨리 일어나고 싶을 땐 간단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의사를 전달해보세요. 주의할 것은 해결사 탐지기를 작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내는 답을 구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남편과 같이 있고 싶고, 자신의 말을..

근* 글 2017.02.13

꽃보다 9

꽃보다 9 김근혜 교회 앞마당에 들어섰다. 헌혈차와 몇 개의 부스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자주 있는 일이라 예사로 넘기고 본당으로 향하고 있는데 “원장님”하는 목소리가 귀에 익다. 학모로 만나 지금까지 정을 나누고 있는 지인이다. “장기기증하실 거죠? 저도 했어요. 남편한테 권했는데 내가 서약서 쓰는 동안 도망가고 없네요. 큭큭.” 뜬금없는 지인의 말에 깜짝 놀랐다. 뭔가 옹색한 변(辯)이라도 늘어놓는 게 순서일 텐데 이럴 때 내 입심은 발휘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스로 향하고 있는 내 발걸음이 신기했다. 서약서를 받아들었다. 글씨가 작아 잘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하는 것이니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모두 표시했다. 얼떨결에 하긴 했는데 무슨 내용..

근* 글 2016.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