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회의 미수 사건 / 김삼진

테오리아2 2022. 9. 27.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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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차장, 회의 좀 합시다. 과장들 좀 이리 불러 봐요. 거기 홍 계장, 김 계장도 같이 오고.”

 

부장의 쉰 목소리다. 다른 부서는 이미 퇴근하여 빈자리가 많았다. 북적대던 사무실은 한산하다.

 

저는 친구 결혼식에 가야해서.”

 

말끔한 정장차림의 홍 계장이 양해를 구하며 뒷자리의 부장 눈치를 살폈다. 뒤를 돌아보니 부장이 가도 좋다는 손짓을 한다. 내 앞의 과장둘도 얼굴을 마주보며 망설이는 표정인데 홍 계장에게 선수를 빼앗기자 김 샌 표정이다.

 

 

 

나를 비롯한 간부들이 회의용 탁자로 엉거주춤 모였다. 부장은 다음 주 토요일 퇴근 후에 내장산 단풍을 보러가자고 했다. 술도 한 잔 하고 일박하고 점심 먹고 올라오자는 것인데, 강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의는 따라야 했다. 부장은 각 지점장들에게도 연락해서 올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르라고 했다. 늘 이런 식이다. 봄에는 꽃구경, 가을에는 단풍구경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구경을 왜 굳이 부하들과 가려고 하는지 휴일까지 부하들을 붙잡아두려 하는 그의 속내를 모르겠다. 나는 간혹 빠지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눈치가 보여서 개운치 않았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절반 이상이 부장으로 인한 것이었다. 주말에도 다른 부서는 한 시가 되기 전에 대부분 퇴근을 하는데 우리는 두 시가 넘도록 부장의 눈치를 보면서 책상에 앉아 있어야 했다. 부장도 어떤 때는 미안한 생각이 드는지 퇴근 때 빌딩 지하 중국집으로 앞장을 서기도 하지만 그 자리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이다. 휴일마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가도 안 가도 스트레스 받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 주 토요일 오후였다. 부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는 책상 위에 펼쳐진 부장의 다이어리를 보게 되었다. 매월 첫 장에는 통면으로 한 달치 일정을 메모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꼼꼼한 부장은 일정 성격에 따라 흑··적의 플러스 펜으로 기록을 하고 샤프로는 보조 메모를 적었다. 나의 눈은 재빠르게 오늘 날짜를 살피고 특별한 일정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시간에 그가 자리를 비운 것은 화장실에 간 것이다. 지금 화장실에 갔다면 퇴근하기 위한 준비이기 쉽다. 나는 부장의 하루 움직임을 잘 알고 있다. 그가 퇴근하기 전에는 반드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어쩌면 오랜만에 집에 가서 가족과 점심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사람에게 집에 가서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화했다. “떠날 때 전화하면 정거장으로 나갈게.” 집사람이 들뜬 소리로 반겼다.

 

 

 

얼마 후 부장이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들어왔다. 자리에 앉으면서 습관처럼 다이어리를 펴고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메모된 일정들을 점검하는 눈치다. 화장실 가기 전에 한 시간 넘도록 네 가지 펜을 가지고 지우고 메모하던 것들이다. 그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리라. 저 점검이 끝나면 서랍마다 열어 보고 닫을 것이다. ‘찰칵가운데 서랍을 잠그는 소리가 들린다. 이젠 옷을 입기 위해 일어나야 하는데 기색이 없다. 나의 뒤통수에는 눈이 없어도 부장의 움직임 정도는 느낄 수 있다. 차하급자로 십년 이상을 훈련이 되어 있어서다. 그런데 허스키 보이스가 뒤통수를 때렸다.

 

김 차장, 회의 좀 합시다. 과장들 좀 오라고 해요.”

 

월요일 출근과 동시에 영업간부회의가 있는데 퇴근 앞두고 무슨 회의를 또.’ 속으로 구시렁대며 뒤를 돌아보려 할 때였다.

 

갑자기 하며 부장이 억눌린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부장의 책상 위에 대머리가 받쳐져 있었다. 혀를 깨물렸는지 어버 어버버하며 고통스러워했다. 알고 보니 회전의자가 오래 돼 스프링이 부러져 내려앉으며 부장의 턱이 책상 가장자리에 걸린 것이었다. 책상에 걸린 부장의 머리는 삼국지에서나 볼 수 있는 쟁반에 받쳐진 적장의 목과도 같았다. 나는 웃지도 못하고 과장들과 함께 어떡해요, 어떡하지하며 공연히 서성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구급차를 부를 정도는 아니어서 특별하게 할 일은 없었다. 다만 K과장에게는 냉수를 떠오게 하고 L과장 등에게는 부장을 부축하여 옆 회의용 의자에 앉도록 조치를 취한 후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왔다.

 

 

 

화장실에 들어가니 P과장이 L계장과 함께 배를 끌어안고 웃고 있었다. 두 놈 모두 눈물까지 흘려가며 몸을 비틀었다. 나는 짐짓 혼을 내는 척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은 억누를 수 없었다. 잠시 후 우리는 표정을 걱정 모드로 바꾼 후 사무실로 들어갔다.

 

회의는 물론 무산되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회의 미수 사건으로 명명됐고 우리들 술자리 안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40년 전쯤 지난 해프닝인데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떠올라 웃음을 짓게 한다.

 

 

 

부장을 비롯한 당시의 부하들이 그립다. 그곳은 내가 청춘을 바친 회사다. 부장은 목표달성을 위해서 부하들을 단합시키고 독려해야 했을 것이다. 의욕이 넘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악역을 맡아야 했고 부하들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쌓이고 쌓여서 폭발할 듯 했을 때 터진 사건으로, 부장의 희생(?)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든을 바라보는 부장은 몇 년 전에 상배를 했다는데 어찌 지내는지. 건강은 한지 궁금하다. 당시의 과장들도 이젠 모두 예순 중반이다. 부장을 비롯해 함께 모일 기회가 있다면 그 에피소드로 웃음꽃을 피우고 싶다. 같이 늙어가는데 거리낄 게 뭐 있으랴. 부장이 내가 건넨 술잔을 털어 넣을 때쯤, “그때 많이 아프셨죠?” 하며 함께 파안대소 하고 싶다. 모두들 눈물을 질금질금 흘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