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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공무원문예대전 최우수상/아름다운 원시(遠視) / 김영식

테오리아2 2022. 9. 27.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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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 공무원문예대전 최우수상/아름다운 원시(遠視) / 김영식

 

어느 날부터 눈이 침침해지면서 책읽기가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가까운 것들은 자꾸 흐릿해지는

 

데 눈을 들면 그러나 먼 것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무슨 큰일인가 싶어 황급히 안경점을 찾았으나 자연스

 

런 노화현상이니 너무 걱정 말라는 것이었다. 순간 마음이 울적해졌다. 싱그러웠던 내 젊은 날이 늦가을 낙

 

엽처럼 천천히 나를 떠나고 있었다. 매양 봄이라 생각했는데 어느덧 가을의 끄트머리에 서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붙잡을 순 없을까? 눈이 더 흐려지기 전에 서둘러 안경을 맞추어야겠다고 작정했다.

 

 

 

눈이 차츰 희미해진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는가? 더욱 그것이 노화현상이라니. 세월 앞에선 아무 것

 

도 무한한 것이 없구나하고 생각했다. 잠시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더러는 비 내리고 바람

 

불기도 했지만 눈이 밝았던 것처럼 모든 일이 확신에 차있어 패기만만했던 시절이었다. 태양을 향해 날아

 

가는 이카루스처럼 세상을 다 소유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뜨거운 열정을 이젠 가만히 무릎 아래 내려놓

 

아야 한다니. 가슴 한구석에 휑하니 동굴 같은 구멍 하나 뚫리고 그 곳으로 시린 바람이 간단없이 드나드

 

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한편으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젊음이 지나간다는 건 아쉽고 견딜 수 없이 우울

 

한 일이지만 젊음이 부질없이 거머쥐려 했던 욕망들이 흐릿해졌다는 건 일견 고마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켜보면 가까이 두려고 했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부와 권력, 명예, 자식, 의미 없는 잡다한 일상 등. 집착

 

은 또 다른 집착을 낳고 한 욕망이 채워지면 또 다른 욕망을 희구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공허만 밀물처

 

럼 밀려들었던 것을 새삼 기억한다.

 

원시는 그러나 이처럼 부질없는 것들을 희구했던 젊은 날의 나를 반성케 하는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

 

저녁, 여러 가지 욕심들을 내려놓은 빈자리로 먼 것들이 고요하게 건너온다. 오후의 교실을 울리는 맑은 풍

 

금소리처럼 심금으로 전해져오는 것들. 이내가 덮인 먼 산, 노을을 떠밀며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한 척

 

의 배, 아득한 허공을 저으며 날아가는 새의 푸른 몸짓. 그리워서 언제나 안타까웠던 것들이 따스하게 말

 

을 걸어오고 있었다.

 

 

 

먼 것들은 내가 얼마나 안스러웠을까?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들에 그렇게 집착을 하고 가치를 부여하

 

려했던 내가 또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못마땅했던 주변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어졌다.

 

소리 많은 아내도, 공부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아이들도 상대방 입장에서 수긍이 되어지는 것이었다.

 

척에 있으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로 잘 행해지지 않았던 노후의 부모님을 찾아뵙는 횟수가 많아진 것도 이때

 

쯤이다.

 

중국의 송대(宋代)때 유학자인 주돈이는 애련설(愛蓮設)에서 연꽃은 가까이서 만지거나 희롱할 수 없고 멀

 

리서 조망할 수 있어 좋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향은 멀리까지 풍기며 멀수록 향기가 맑다라고 연()

 

사랑하는 변()을 말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연꽃은 우리의 손이 닿지 못하는 연못 가운데에 있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아야 선명해지는 원시처럼 감상하는 사람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못이라는 그 일정한 틈이 객체인 꽃과 꽃을 바라보는 주체 간에 그리움을 형성하는 것이다. 소유하지 못해

 

못내 안타까운, 가만한 그리움의 거리가 연꽃을 더욱 아름답고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것처럼 가까운 사람과도 일정한 간격을 두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이든 친구든 너무 허

 

물없이 지내다보면 그 사람에 대한 경외감이 없어져 곧 관계가 시들해지는 것을 왕왕 보게 된다. 사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너무 가까이 두게 되면 그 사물에 대해 가졌던 애초의 신비감이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을 종종 경험했던 것이다. 수평선, 먼 산, 허공이라 말하면 그것들의 풍경은 너무 멀어 아득하고 안

 

타깝지만 그러나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면 아득해서 언제나 그립고 은은한 것이다. 조선시대 때

 

화가 최북은 심미안(審美眼)을 얻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멀게 했다. 사물의 표피적인 현상

 

만 보는 눈의 한계와 경도(傾倒)를 경계함이었으리라.

 

 

 

이젠 소중한 것일수록 조금 거리를 두고 보려한다. 그러면 그 가치들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으리라. 마음

 

으로 보는 눈, 내면의 것들을 읽어내는 혜안을 가진다면 좀 더 세상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

 

고 보면 이 원시현상도 그리 울적해할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육체의 눈이 멀어지는 대신 마음의 눈을 뜬

 

것이 여간 고맙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다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다.

 

가까이 놓여 있던 책을 저 만큼 밀어놓고 본다. 행간마다 희미하게 걸쳐져있던 글씨들이 순간 뚜렷해지면

 

서 그 의미들이 제대로 이해되어졌다. 살아가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할 것들이, 그리고 조금씩 내 안

 

에서 밀어내야할 것들이 어디 책뿐이겠는가. 한 생각 덜어내니 마음은 댓잎 우듬지를 스치고 가는 가을바

 

람처럼 가벼워진다.

 

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멀어지게 된 지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용서가 되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도 이즈

 

음엔 나와 조금씩 화해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원시로 얻은 심안(心眼)이 내게 준 아름다운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안경을 맞추는 일은 그래서 당분간 보류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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