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딱, 그만큼/최장순

테오리아2 2022. 9. 27.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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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푸른 벽이었다. 멀리서는. 그러나 다가갈수록 숲은 훌륭한 배후가 된다. 나무들이 온통 하늘을 덮고 있다.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한 아파트 삶이 아닌가. 때맞춰 걷는 숲. 그늘이 따가운 햇살을 가려준다. 그루터기에 앉아 카메라 렌즈를 통해 올려다본 우듬지들이 예술작품이다. 일부러 그리기도 어려운 수채화다. 아마존 거대한 숲 사이로 이리저리 흐르는 물줄기를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멀찍이서 짐작한 내 착각이 저만치 물러난다. 우듬지들은 서로가 닿지 않게 절묘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하늘을 조각조각 나눈 절묘함. 그 공간을 통해 우듬지 아래의 가지와 이파리에 빛을 나누고 있다. 잘 균열이 된 거북 등을 닮았다. 이리저리 트인 공간 사이로 하늘은 맑고 푸른 기운을 숲 안으로 쏟아붓고, 나무는 끝단과 끝단이 서로 부딪치지 않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낮은 곳의 이끼와 양치식물과 공존하고 있다. 딱 필요한 만큼의 거리. 숲의 생존과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질서다. 고착생활을 해야만 하는 나무들의 영민함. 식물학자들은 이를 ‘수관기피현상’이라 부른단다. 

 

 2.

  “카메라가 근접할수록 배우는 표정이 굳었다. 그 배우에게 무엇이라도 끌어내려면 카메라를 뒤로 물리고 망원렌즈로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배우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이 좋아졌다.” 영화감독 클로드 소테의 말이다.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가까이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은 그의 경험담은 전략적 거리를 통해 인물의 내부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할리우드의 노련한 여배우들은 포그렌즈를 좋아한다고 했다. 주름이나 잡티 같은 것들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따가운 초점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한 배우는 자연스럽게 연기를 한다. 카메라의 렌즈처럼 줌인이나 줌아웃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눈이다. 자세히 보려면 몸을 움직여 가까이 가야 한다. 하지만 가까이 갔다고 해서 모두 확연해지는 것은 아니다. 

 단체 카톡방에는 직접 찍은 사진들을 더러 올린다. 풍경 사진일 경우는 대체로 좋아요, 부러워요, 공감의 댓글로 넘어간다. “무엇이 보이나요?” 퀴즈 풀이하듯 덜렁 던져놓는 얄궂은 사진도 있다. “글쎄, 무엇이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정답은 오히려 간단하다. 무엇이 보이는지 사진을 확대해 세밀히 살펴본 것과 달리 있는 그대로 지그시 바라본 사람이 절묘한 답을 내놓는다. “아하!” 감탄사가 나온다. 한 부분만 확대해서 섬세함을 강조하지만, 때론 과장되게 보이기도 해서 아쉬운 점이다. 그렇다고 먼 거리 풍경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흐릿함이 신비감이라기보다는 속사정을 감춘 안갯속 같기 때문이다.

 

 

 

 3.

 중생대의 공룡들에겐 적이 없었다. 절대강자인 자신들에게만 몰두했을 뿐 언젠가 그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는 의심은 한 치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몸집이 작은 포유동물에게 왕좌를 내어주기 전까지는 그랬다. 덩치가 크지는 않지만 인간은 우수한 지능을 이용해 모든 동물을 지배하며 군림했다. 하지만 안전한 듯 보이던 인간도 미생물이라는 작은 생명체로부터 역습을 당한다. 인간의 영역이라는 것이 견고한 불가침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허둥대는 현실이다. 아직은 가장 소극적인 방어력인 마스크를 쓰거나 거리두기를 하거나 백신으로 예방할 수밖엔 없다. 치료제를 개발할 테지만,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변종을 일으키며 계속 인간을 조롱하려들 것이다. ‘뭉쳐야 산다’는 말은 COVID-19가 활개를 치는 한 효용가치가 없다. 피해 입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든 멀어져야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물리적 거리를 유지한다고 해서 심리적 거리마저 멀리할 수는 없다. 

 

 4.

 1920년생 동갑내기인 김태길, 안병욱, 김형석 선생의 일화이다.

 안병욱 선생이 제안했다. 우리 모두 50년 동안 같은 목적으로 일에만 몰두해왔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일 년에 두세 차례 만나 우정을 되살려 보면 어떻겠느냐고. 김태길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10년 전쯤이면 몰라도, 이제는 서로 열심히 일하다 때가 되면 각자 가자.”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힘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는 것인데 마지막 남은 친구의 아픔도 생각해봤느냐며 정기 모임을 갖지 말자고 했다는 것이다. 의외의 대답에 세 분은 동의했다고 한다.

 만나지 않았다고 해서 세 분의 돈독한 우의가 깨진 것일까? 오히려 서로를 신뢰하고 그리워하는 정신적 유대감이 더 확고해졌을까. ‘안 보면 멀어진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을 경우가 있다. 장거리 연애가 장벽이라는 젊은 연인들의 말도 있듯, 이분들의 일화가 누군가에게는 공감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불합리할 수 있다. 딱, 그만큼의 관계는 얼마만큼,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일까.

 

 5.

 不可近不可遠. 좋은 말 같으면서도 야박한 말 같기도 하다. 깊숙이 파고드는 관심도 문제지만, 무관심은 더욱 문제다. 그러니 딱, 그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라고 한다. 애매하고 어렵다. 자칫 고슴도치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거리두기는 무관심과는 다르다. 딱 그만큼의 거리란 서로를 위한 최소한의 거리이자 자신을 지키기 위한 안전한 거리다. 서로 그리워할 만큼의 거리, 서로를 이해할 만큼의 거리다. 물리적 거리에 마음의 거리를 보탠 지혜의 거리라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마음 변치 않는 관계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불가근불가원이 서로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말아야 한다는 데 의미를 둔다면 ‘저만치’ ‘저만큼’ ‘그만큼’의 적절한 거리는 합당하다. 원시와 근시를 동시에 해결하는 다초점 렌즈처럼 말이다.

 

 *고슴도치딜레마-너무 가까이하기도,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도 어려운 인간관계를 빗댄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