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글

포토에세이-사의(김근혜)

테오리아2 2014. 3. 2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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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四宜)

김근혜

  소담한 마을이다. 도시의 갑갑함을 버리고 훌쩍 떠나온 길에서 생명 숲을 만났다. 도하송이 허리를 굽혀 반긴다. 섬솔밭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여행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푸근히 감싸 앉는다. 휴(休). 숲이 주는 치유이다.

 

 

 

  호산지당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연못에 눈길이 멎는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흐드러지게 핀 노란 어리연꽃들이 잘 어우러져, 원시적 신비로움마저 감돌게 한다. 우주를 품은 듯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곳에 수기(水氣)를 채우면 인재가 많이 난다고 해서 후손들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이다. 벤치가 좀 쉬었다가라고 말을 건넨다. 고마움에 덥석 앉았다. 잠시 무게에 짓눌렸던 인생의 짐을 내려놓았다. 힘 있는 사람도 힘없는 사람도 자연 앞에서는 평등한 것을.

   “귀거래 귀거래 말뿐이오. 가리업싀 그저 말뿐이듯이……

  성공과 출세가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자리를 버리지 못하고 매여 있었던가. 훌훌 던져버리고 자연인이 된다. 이 이상 더 큰 기쁨이 있을까. 거창한 행복보다 소소하게 느끼는 일상적인 여유로움이야말로 청복(淸福)인 것을. 홀연히 가다가 복사꽃 핀 숲을 만나 선경에 드는 도연명처럼, 나도 잠시 넋을 빼앗겼다. 무릉도원이 예일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수가 여기일까. 아름다움에 취해 영영 길을 잃어버려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덕동문화 마을에 발이 묶였다. 덕동은 덕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도둑 들 일이 없어 문 잠글 까닭도 없다고 하니 근심은 쓸데없는 것이리라. 공유(共有), 공산(共産), 공생(共生)이 숨 쉬는 이상세계, 안생생(安生生) 대동(大同)사회가 바로 여기가 아닌가. 비운 자들만이 누리고 살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가진 것이 없으니 비울 것도 없지만 부요해지고 싶은 것은 인간이 지닌 욕망이 아닐까. 이곳에서는 꿈틀거리던 욕망마저도 저절로 수그러드는 것 같다. 세상은 크게 보면 다 같은지도 모를 텐데 내 몫에 눈이 먼다. 명예에 눈을 닫고 욕심을 버리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련만 남보다 앞서 달리려고 한 내 발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용계정 앞에 섰다. 잠시 검문을 하려는 듯 통허교가 신호를 보낸다. 고고한 선비들의 넋이 세속의 먼지 묻은 사람을 허락할 것 같지 않아 머뭇거리다 신발을 털고 정각에 들었다. 수려한 경관이 눈을 홀린다. 벼랑 암벽 위에 세운 정각 앞으로 용이 노닐다 비상했다는 계천이 흐르고 솔숲과 연못이 아우르고 있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다. 마루에 누워 있으면 물소리가 달빛에 어우러져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라고 한다. 나도 어느 사이 사람들 틈에서 와유(臥遊)를 즐기며 곡수에 술잔을 띄워 본다. 하늘 한 자락이 지붕 위로 내려앉는다.

 

 

 

  ‘사의(四宜)’는 용계정의 옛 정각 이름으로 농재 이언괄 선생의 4대 손인 사의당 이강이 착공했다. 사의(四宜)는 사계절 변함없는 만상의 조화를 뜻한다고 한다. 마음이 몸 밖으로 도는 것을 경계하고, 눈이 끌리는 곳에 무릎 꿇지 말라는 섭심(攝心)일 것이라고 나름대로 가정해 본다. 이강은 솔숲을 거닐면서 소나무의 푸른 절개와 기상을 닮고자 했으리라. 선비가 지켜야 할 도리 앞에서 때론 자신도 풀 같이 흔들리는 나약한 범인(凡人)임을 생각했을 것이다. 스스로를 채찍질한 사의혼(四宜魂)이 그의 아호인 사의당(四宜堂)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속 일을 멀리하고 심부를 다스려 후학에 힘쓰는 것이 진정한 선비정신임을 알고 몸소 보이려 했던 것이리라.

 

 

 

 

  물질의 풍요와 편리를 다 누리고 살면 오히려 독이 되니 적당히 억제하며 사는 것이 이롭다는 가르침을 후손에게 전하는 것이리라. 조상들이 남긴 숨결에서 큰 깨우침을 얻는다. 나는 후세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문화유산을 곱게 물려주기 위해 애써 가꾸는 덕동마을 사람들의 사의정신(四宜精神)을 가슴에 고이 담는다.

  배웅하는 도하송을 뒤로 하고 숲을 빠져 나왔다. 아쉬움에 걸음이 느릿해진다. 휴(休). 숲도 나를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자꾸만 등에 기대라 한다.

 

 <영남문학 포토에세이 2013 가을호 발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