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글

덕동문화마을-김근혜

테오리아2 2014. 5. 18.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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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허교 용계정 우측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하는 돌다리.

통허교 용계정 우측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하는 돌다리.


 

애은당고택 임진왜란 당시 정문부가 식솔들과 함께 피난처로 사용하였던 애은당고택(경북 민속자료 제80호). 안채는 정면 4칸반, 측면 3칸반이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목조기와집이다.
애은당고택 임진왜란 당시 정문부가 식솔들과 함께 피난처로 사용하였던 애은당고택(경북 민속자료 제80호). 안채는 정면 4칸반, 측면 3칸반이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목조기와집이다.


 

덕동민속전시관 덕있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덕동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덕동민속전시관 덕있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덕동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소담한 마을이다. 도시의 갑갑함을 버리고 훌쩍 떠나온 길에서 생명 숲을 만났다. 도하송이 허리를 굽혀 반긴다. 섬솔밭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여행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푸근히 감싸 안는다. 숲이 주는 치유이다.
역사와 문화의 혼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잠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 다리쉼을 해보고 싶었다.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1리에 위치한 ‘덕동문화마을. 대구에서 1시간30분 정도면 일상 탈출이 가능하다. 마을 뒤로는 침곡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자금산이 있으며 서편 벼슬재를 넘으면 포항시 죽장의 가사리로 갈 수 있다. 지난 1992년 문화마을로 지정된 ‘덕동문화마을’은 조선 후기 문중 사당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사료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여주 이씨 가문의 세덕사 관련 자료를 비롯한 마을의 사회, 경제적 이면 상을 이해할 수 있다. 18세기 고문서 등을 소장하고 있는 문사의 마을이기도 하다. ‘덕동문화마을 숲’ 또한 2006년 시민단체인 생명의 숲이 주최한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생명 대상을 수상했다고 하니 가족과 함께 산교육의 현장인 이곳에서 자연이 주는 치유를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덕동’은 덕이 있는 인물들이 많다고 하여 불린 지명으로 자금산 남쪽 산기슭에 형성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지명에서부터 마을 사람들의 인품이 느껴진다. 남의 일, 내 일 구분 없이 서로 한 가족같이 지내서인지 어르신들의 환한 표정이 여느 동네와 사뭇 다르다. 농재 이언괄은 형인 회재 이언적이 관직에 나가있자 어머니 봉양을 위해 물 좋고 산 좋은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자손대대로 이어져 오는 문사의 마을이 된 것이다.
이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포항시 기북면은 문헌상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부곡(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의 집단마을)의 옛터가 국내 최초로 확인된 곳이라고도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성법 부곡’ 현장이 주변 마을에서 확인되고 있다. 신라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제철과 연관된 철물기구와 무기 생산 공장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가까이에 있는 ‘벼슬재’는 벼슬을 가진 이들 외에는 넘지도 못했다고 한다.

 

 

◆ 왜병도 피했다는 길지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여강 이씨의 집성촌 덕동마을의 용계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3호).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문부의 별장으로 건물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목조기와집이다. 용계정은 건립 이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세덕사’라는 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되다 1864년(고종1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세덕사와 함께 훼철될 위기에 처해지자 덕동 마을 사람들이 서원의 건물들과 별개의 장소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자 용계정 주변에 밤새도록 담을 쌓아 올려 철폐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여강 이씨의 집성촌 덕동마을의 용계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3호).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문부의 별장으로 건물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목조기와집이다. 용계정은 건립 이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세덕사’라는 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되다 1864년(고종1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세덕사와 함께 훼철될 위기에 처해지자 덕동 마을 사람들이 서원의 건물들과 별개의 장소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자 용계정 주변에 밤새도록 담을 쌓아 올려 철폐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360여 년 동안 후손들은 조상의 뜻을 기리고 아름답게 가꾸고 있다. 유형문화재 제243호 용계정은 정문부의 별장이고, 민속자료 제80호 애은당은 피난처다. 그 외 3량가납도리집인 제81호 사우당, 문화재자료 206호 여연당, 제373호 오덕리 근대 한옥, 덕계서당, 민속박물관 등이 있다.
‘덕동민속전시관’은 가족에게 나눠줄 재산을 기록한 문서, 분재기를 비롯하여 4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보물창고다. 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지 않다.
덕동의 옛 이름은 송을곡이다. 왜병은 ‘송’자가 들어간 곳은 전쟁에서 패한다는 설이 있어 덕동마을은 피해갔다고 한다. 환란을 당했을 때 임시로 몸을 거처하기에는 여기가 낙양 같은 길지여서 왜병도 피해간 곳이라고 한다. 의병장 정문부 가족도 임진왜란을 피해 잠시 이곳에 머물렀다. 민속자료 제80호로 지정된 애은당이 정문부가 기거한 고택이다. ‘ㅁ’자형 맞배지붕으로 거북 모양의 땅 위에 건물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거북의 앞발에 해당하는 곳에는 별당과 방앗간을, 머리 부분에 속하는 앞면에는 누에를 치던 잠실을, 꼬리 부분에는 화장실을 배치했다.
도둑 들 일이 없어서 문 잠글 까닭도 없다고 한다. 공유, 공산, 공생이 살아 숨 쉬는 이곳은 비운 자만이 살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가진 것이 없으니 비울 것도 없지만 부유해지고 싶은 것은 인간이 지닌 욕망이 아닐까. 명예에 눈을 닫고 욕심을 버리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련만 발은 그런 곳을 먼저 알고 내달린다.

 

호산지당 350여년 전의 회나무 우물을 축조하여 만든 인공연못 ‘호산지당’은 덕동마을이 산강수약이라 수려한 산세는 강하고 물은 적어 인물이 배출되지 않는다 하여 1974년 덕동학당 운동장 자리에 물을 가두어 만들었다.
호산지당 350여년 전의 회나무 우물을 축조하여 만든 인공연못 ‘호산지당’은 덕동마을이 산강수약이라 수려한 산세는 강하고 물은 적어 인물이 배출되지 않는다 하여 1974년 덕동학당 운동장 자리에 물을 가두어 만들었다.

 

용계정과 연접한 호산지당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연못에 눈길이 멎는다. 호산지당은 1930년경 건립되어 1950년대에 폐교된 덕동 학당의 터라고 알려져 있다. 연못 안에 솟아오른 바위가 특이하다. 덕동 학당의 구령대였다고 한다. 황소개구리도 교장선생님 흉내를 내고 싶은지 크게 배를 불리고 한껏 무게를 잡다가 사람들 소리에 놀라 물속으로 몸을 숨긴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흐드러지게 핀 노란 어리연꽃들이 잘 어우러져, 원시적 신비로움마저 감돌게 한다. 우주를 품은 듯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산세가 험하여 큰 인물이 나기가 어렵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1974년에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이다. 이곳에 수기를 채우면 인재가 많이 난다고 해서 후손들을 위해 어미의 태를 열듯이 물을 가둔 곳이다. 지금은 친환경 마을 지정에 따른 지원사업으로 호산지당을 비오톱(생물공동체의 서식처)으로 조성하여 청소년들에게 생태환경 학습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벤치가 좀 쉬었다 가라고 말을 건넨다. 고마움에 덥석 앉았다. 잠시 무게에 짓눌렸던 인생의 짐을 내려놓았다. 훌훌 던져버리고 자연인이 된다. 이 이상 더 큰 기쁨이 있을까. 거창한 행복보다 소소하게 느끼는 일상적인 여유로움이야말로 청복인 것이다.

 

◆ 소나무의 푸른 절개와 기상을 닮을 곳

 

덕동숲 1600년경 이강이 정착하면서 조성된 덕동마을 형성초기 수구막이 숲으로 조성된 곳이다. 2006년 제7회 아름다운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덕동숲 1600년경 이강이 정착하면서 조성된 덕동마을 형성초기 수구막이 숲으로 조성된 곳이다. 2006년 제7회 아름다운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용계정 앞에 섰다. 고고한 선비들의 넋이 세속의 먼지 묻은 사람을 허락할 것 같지 않아 머뭇거리다 신발을 털고 정각에 들었다. 수려한 경관이 눈을 홀린다.
벼랑 암벽 위에 세운 정각 앞으로 용이 노닐다 비상했다는 계천이 흐르고 솔숲과 연못이 아우르고 있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다. 마루에 누워 있으면 물소리가 달빛에 어우러져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라고 한다. 하늘 한 자락이 지붕 위로 내려앉는다.
덕동문화마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용계정은 1546년에 건립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북평사를 지낸 정문부가 별장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정자원림을 경영해왔던 조선 시대 대표적인 별서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피난 왔던 정문부가 전쟁이 끝난 후 전주로 돌아가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손녀사위인 사의당 이강에게 물려주었다. 이강은 농재 이언괄의 4대손이다. 폐비 윤씨 사건 등으로 조정이 혼란해지자 벼슬에 뜻을 접고, 인조 말 삼전도의 굴욕을 보면서 은둔하였다고 전해진다.
용계정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서원철폐령 당시 세덕사의 강당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세덕사는 농재 이언괄 부자를 제향하던 곳이다. 세덕사와 용계정이 철폐될 위기에 놓이자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밤새도록 담을 쌓아 용계정은 지금까지 보존되었다고 전해진다.
용계정 정각 이름은 ‘사의’로 불려진다. ‘사의’는 사계절 변함없는 만상의 조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의는 이강의 호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강은 솔숲을 거닐면서 소나무의 푸른 절개와 기상을 닮고자 했을것이다. 선비가 지켜야 할 도리 앞에서 때론 자신도 풀 같이 흔들리는 나약한 범인임을 한탄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채찍질한 사의혼이 그의 아호인 사의당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속 일을 멀리하고 마음을 다스려 후학을 위해 힘쓰는 것이 진정한 선비 정신임을 알고 몸소 실천하려했던 이강의 혼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믿음과 의리를 지키고 꿋꿋이 살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강은 후세대들에게 사의의 중요성을 간곡히 당부한다.
사의는 마음이 몸 밖으로 도는 것을 경계하고, 눈이 끌리는 곳에 무릎 꿇지 말라는 금언이다. 물질의 풍요와 편리를 다 누리고 살면 오히려 독이 되니 적당히 억제하며 사는 것이 이롭다는 가르침이다.
사시사철 변치 않는 신의와 절제하며 살고자 노력했던 선조들의 마음이 곧 사의일 것이다. 이익에만 몸을 부린 뻣뻣한 내 목이 저절로 땅을 향한다.

김근혜

대구행복의전화 소장ㆍ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