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론

[스크랩] <121>못을 뽑다/권남희

테오리아2 2014. 11. 2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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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을 뽑다

권남희/창작문예수필 2013 봄호 대표작

(stepany1218@hanmail.net)

벽이 갈라진다. 너무 큰 못을 벽에 겨누고 두드려 박은 것이다. 오래된 벽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새해 아침부터 못 박을 곳이 없나 벽을 바라보다 일을 냈다. 집안 곳곳에 못을 박고 뽑아낸 흔적과 새로 박은 못들이 있다. 벽은 이미 간격조정을 할 수 없을 만큼 박힌 못으로 가득 찬 느낌이지만 미처 비명 지를 틈도 주지않고 대못을 들어 박기 시작한다. 못 박히는 소리는 온 집안을 울리고 아래 위층까지 대못 치는 소리가 퍼져나간다. 망치소리는 내 팔을 따라 몸 안으로 돌아다니며 진동 하다가 머리까지 흔들기 시작한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밤 아홉시 이후에는 벽에 못을 박지 말아달라는 문구가 붙여있다. 아침이지만 잠시 숨을 고른다.

새집을 계약하고 이사했을 때 벽들은 얼마나 순결했던가. 저 눈밭에 사슴이라더니 벽들은 손대면 절 대 안 될 것처럼 잡티하나 없는 뽀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하얀 실크벽지로 마감한 그 우아함에 매혹당해 벽을 보고 맹세를 했다. 오래도록 벽의 순결함을 지켜주고 그 어떤 상처도 내지 않을 것이라고. 아주 작은 못조차 박는 일을 스스로 용서하지 않을 것처럼 벽을 바라보다 행복한 상상까지 했다. 이 벽은 앙드레지드나 모파상, 화가 파울 클레가 드나들며 영감을 얻었던 튀니지 시디부사이드의 카페 드나트 하얀 집처럼 행운을 불러올 것이라고.......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쪽빛 그림의 커다란 액자를 건 다음 아무 것도 걸지 않았다. 대부분 액자는 조심스럽게 벽에 기대어 두거나 창고에 넣어두었다. 꼭 걸어두고싶은 그림이 있을 때는 벽과 얼마나 조화를 이룰까 간격을 재고 망설이기를 수없이 하며 벽을 아꼈다. 벽이 다칠까봐 늘 조심조심 바라보기만 했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벽은 한동안 존재만으로 충분한 사랑을 받았다.

한 해 두해 지나면서 슬슬 못을 찾기 시작했다. 벽을 위한 순결서약서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지쳐가던 나는 지루하다는 핑계를 댔다. 아무 것도 걸어둘 수 없는 벽은 바보같고 할 말 있는 것들이 그동안 참을 만큼 참았다고 얼굴을 내밀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낙서로 가득한 술집의 벽은 예술성을 얻는 경지인데 아무도 찾지 않는 벽은 이기적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벽은 음식물이 튀고 먼지가 내려앉고 누렇게 바래 더 이상 우아하지도, 순결하지도 않았다. 더러워진 벽을 가린다며 우리는 각자 젊은 날 받았던 상장부터 갖가지 걸개액자를 꺼내어 걸기 시작했다. 벽을 함부로 다룰수록 못이 수시로 박혀 벽이 흔들렸다. 거실에, 안방에, 점점 더 많은 액자, 더 큰 액자가 걸리는 날은 대못이 벽에 박혔다.

벽은 못을 거부하는 것으로 말을 하고 새해 아침 못박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남편은 정초부터 왜 못을 박느냐고 불평을 한다. 그의 소리를 무시한 채 못을 더 세게 두드리다 문득 남편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못 박기로 대신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그와 나의 관계도 그렇게 서로에게 못박기나 하다가 가슴은 점점 멀리 갈라져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처음 만남을 시작했을 때, 사랑을 키워나갈 때 우리는 상대를 배려하는 말만 해주고 마음 상할까봐 참아주고 기다려주며 노력했었다. 새로 사들인 화초에 정성을 들여 꽃을 피우는 것처럼 언제나 꽃을 피우고 가꾸는 일에 몰두했다.

어느 순간 서로가 주는 덕담 한 마디에 환호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사라졌다. 마음은 투박해진 채 허물이 없어졌다는 핑계로 못 박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서로는 못이나 박는 벽이 되어주고 상처받은 벽은 비명을 지르며 여기저기 뜷린 구멍으로 담아 둘 수 없는 말들을 쏟아놓기도 한다. 벽은 더 이상 행복을 주지않고 카페 드나트처럼 영감을 주지도 않는다. 보고 싶지않고 듣고 싶지않을 때 벽에게 못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못박힌 채 더렵혀진 벽은 자꾸만 부스럭거리고 있다.

우리는 못이 뽑히지 않아 견딜수 없는 아픔이 밀려들때 서슴지않고 서로에게 더 큰 못을 박았다. 너무 큰 못을 견디지 못하고 갈라진 벽을 어루만진다. 계속되는 못질로 믿음을 잃은 벽, 이곳 저곳의 균열은 벽 안에 갇혀 있다가 큰 못 한방에 끝내 무너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제 나는 못 박기를 그만두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장도리를 살펴본다. 박기기능도 있지만 못을 뽑을 때도 필요한 장치가 있다.

오늘 그동안 박았던 못을 뽑는 일부터 해야 할 것 같다.(󰡔월간문학󰡕 2013.3.)

 

∣작법 공부∣  이관희 문학평론가 . <창작문예수필> 발행인

문학이란 무엇인가?

비평자는 권남희라는 작가를 모른다. 이 작품이 비평자가 읽은 첫 번째 권남희 작가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보았을 때 너무나도 반가웠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고향친구를 기적적으로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처럼, 너무 반가워서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반가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권남희라는 작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젊은 사람인지, 나이 든 사람인지도 모르고,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가 쓴 이 한 편의 글이 전율할 듯 반가울 수 있었단 말인가?

그 까닭은 ‘이것이 바로 문학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시절부터 사귀어 온 평생의 친구, 애인 같은 문학. 그것은 김소월이고, 김동인이고, 김동리이고, 황순원이며, 이범선이고, 정현종이다. 내가 어찌 김소월이 낯 설 수 있으랴. 내가 어찌 김동리와 이범선이 낯 설 수 있으랴. 저들 나의 평생의 친구들이 낯설지 않다면 권남희도 낯 설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전율할 듯 그의 작품이 반가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이라는 한 마디로 지칭할 수 있는 저들 김소월과 김동리와 이범선의 문학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문학의 무엇이 권남희라는 낯선 작가의 작품도 중학시절부터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기뻐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술성이라는 것이었다.

예술성이 없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예술성이 없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다. 예술성이 없는 춤은 춤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술성이 없는 문학은 문학일 수 있는가?

왜 세상이 처음부터 수필을 향해서 ‘여기의 문학’, ‘서자문학’이라고 손가락질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신변잡기’에 ‘수필도 문학이냐’고 조롱하고 있는가? 수필가들은 어찌하여 저들의 손가락질에 단 한 마디의 합당한 항변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는가? 그 모든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세상이 수필을 향해서 손가락질 하는 까닭도, 저들의 손가락질에 한 마디 정당한 변명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똑 같은 한 마디에 있으니 곧 수필이라는 글의 절대 다수에는 예술성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수필도 문학이냐’는 세상의 조롱에 왜 수필이 문학이 아니란 말이냐, 항의하기 위해서는 수필이 창조하고 있는 예술을 들어 보여야 할 텐데 바로 그 예술이 없는 글을 써 온 것이 지난 1세기 수필문학이라는 것의 역사였으니 무엇을 가지고 저들의 조롱에 항변한단 말인가?

예술이란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상상적․허구적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이 한 가지 사실이 빠진 예술이란 천하에 없다.

수필가들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이다. 왜 그렇게 되었나? ‘수필이란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를 진솔(眞率)하게 쓰는 글’이라고 세뇌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 위에 ‘진솔하게’의 뜻은 ‘붓 가는 대로’ 즉 써지는 대로 쓰는 것이라는 주석까지 달아준 결과가 예술성이 없는 글이 된 것이다.

예술이란 진솔하게 즉 ‘진실하고 솔직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란 ‘진실하고 솔직하게’ 노래 부르는 것도 아니다. 예술이란 ‘진실하고 솔직하게’ 쓰는 것도 아니다. 예술이란 예술적 거짓말의 세계다.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를 참으로 진실 되고 솔직하게 기록한 기록물이 있다면 그것은 대한민국 8도 강산 없는 곳이 없다는 CCTV일 것이다. 세상에 CCTV보다 더 정확한 논픽션물이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예술이란 CCTV처럼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쓰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예술이란 예술적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예술적 거짓말을 문학 이론 용어로는 상상적․허구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즉 예술이란 본질상 상상적․허구적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수필도 진정 문학이라면 어떻게 써야 되겠는가? 여전히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쓸 것인가? 더구나 붓 가는 대로? 수필도 문학이라면 상상적․허구적 작품을 만들어내어야 비로소 ‘수필도 문학이다.’라고 항변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상상적․허구적 작품을 어떻게 만드는가? 더구나 수필은 시, 소설과는 달리 사실의 소재, 즉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문학인데 사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어떻게 상상적․허구적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 기본 작법이 <소재에 대한 비유 창작 + 구성법>에 있다는 것이 이 작품 「못을 뽑다」가 보여주고 있는 작법인 것이다.

「못을 뽑다」의 원관념 소재는 인간관계다. 인간관계 중에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로 초점을 집중하고 있다.

예술작품의 목적이 무엇에 있든, 예술창작의 목적과 방법은 주제의 형상화에 있다.

주제는 어디에 있는가? 주제는 어디서 찾아 낼 수 있는가? 예술 작품의 주제는 선택한 소재 속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만약에 어떤 소재 속에서 주제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아직 예술작품의 소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소재란 소재의 이야기 자체의 흥미가 아니다. 그러나 지난 1백년 동안 절대다수의 수필이라는 글들은 소재 자체의 흥미 외에 무슨 주제를 말하여왔는가? 하나의 소재를 놓고 ‘재미있는 이야기’ 이상 무엇을 더 고민한 일이 있는가?

작가란, 예술가란, 재미있는 이야기에 놀아나는 자들이 아니다. 작가란, 예술가란, 주제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돈도 안 되고, 어떤 사람처럼 갑자기 유명한 정치인이 될 확률도 완전 제로 상태임에도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글을 쓰는 이유는 오직 이 주제에 대한 예술적 고민 때문인 것이다.

이 작품의 원관념 소재인 인간관계가 비로소 작품창작의 소재가 되게 된 계기는 그 막연한 인간관계라는 소재 속에서 ‘서로 못을 박고 사는 삶의 양상’이라는 형상적 주제를 이끌어내게 되었을 때인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에세이의 주제와 창작에세이의 주제는 본질적으로 다른 양상을 띤다는 사실이다. 에세이의 주제는 개념적이다. 그러나 창작문학의 주제는 본질적으로 형상적이다. 왜냐하면 창작문학은 인간의 삶의 양상을 형상화 하는 문학이기 때문인 것이다.

문학의 독자 중에는 이 작품의 본래 소재는 벽에 못질하는 이야기가 아니냐, 라고 생각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조금도 잘못이 아니다. 작가가 마침내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는 아마도 ‘벽에 못을 박는 일’이 작가의 창작발상(영감)을 흔들어 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벽에 못 박는 일’이 창작발상을 흔들어 깨우기 전에 작가의 뇌리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면 ‘벽에 못 박는 일’이 무엇이 될 수 있었겠는가? 즉 작가의 뇌리 속에 ‘벽에 못 박는 일’이라는 보조관념이 나타나서 자신을 꾸며주기(형상화)를 오랫동안 기다려 온 아내와 남편의 관계라는 원관념에 대한 문학적 고민(주제)이 들어있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벽에 못 박는 일’이 충격을 주어 창작발상이 되었겠느냐는 말이다.

작가는 ‘벽에 못 박는 이야기’가 창작 시야에 띄기 전에 인간관계, 그 중에서도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갈등 경험을 해 왔던 것이다. 그것이 일주일 전부터 그래왔든 10년 된 일이든 작가의 뇌리 속에서 ‘벽에 못 박는 일’이 창작시야에 띄자 곧장 그 속에서 ‘벽에 못질하듯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고 사는 존재의 양상’이라는 주제가 형상적 존재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권남희는 지난 1세기 동안 절대다수의 수필가들처럼 소재의 흥미 자체에 이끌려 ‘붓 가는 대로’ 끄적대는 신변잡기 작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소재 속에서 주제를 발견한 후에는 그 주제를 어떻게 형상화 할 것인가가 창작에 임한 작가의 다음 차례 작업이다.

형상화란 어떤 사실을 문자화 하는 일, 즉 문자로 기록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다. ‘봄비가 내리면 마음이 촉촉하게 젖는 느낌이다.’는 형상화가 아니다. 왜 이것은 형상화가 아니란 말인가? 봄비가 내리면 마음이 촉촉하게 젖는다고 느끼는 주체는 작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형상화란 작가가 느낀 느낌을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봄비의 느낌을 형상화하여 독자가 작품 속에서 직접 봄비를 맞고 마음이 촉촉하게 젖는 정서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1세기 동안 절대다수의 수필이라는 글은 작가가 직접 작품 속에서 ‘나는 봄비가 내리면 공연히 마음이 촉촉하게 젖는 느낌이 들곤한다.’는 식의 글을 써 놓고 문학작품이라고 발표하여왔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일반산문 작품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작 작품은 아니다.

‘봄비가 내리면 마음이 촉촉하게 젖는 느낌이다’는 작가 자신에 대한 묘사이지 형상화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수필은 참 오래 묶은 나르시시즘의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고 사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의 양상이다. 그 가운데서 작가의 창작 포인트는 남편의 가슴에 못을 박는 아내, 아내의 가슴에 못을 박는 아내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면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남편과 아내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만약에 작가가 ‘남편과 나는 언제부턴가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살아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서두문장을 쓰기 시작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썼다면 말 할 것도 없이 왜, 어떻게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그동안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 내용은 독자들의 경험이나 거의 같은, 그러므로 굳이 그런 사소한 이야기, 그리하여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일상사를 굳이 글로 써서 발표 할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글을 써 놓고 ‘수필작가’라고 명함을 파서 들고 다니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에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지 않고 사는 부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진부한 이야기나 써 놓고 작가라고 얼굴 들고 다니기 때문에 ‘수필도 문학이냐’는 조롱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권남희는 그렇게 쓰지 않았다. 권남희의 글쓰기는 글쓰기가 아닌 형상화작업이었다. 글은 쓰는 것이고, 작품은 만드(창조)는 것이다. 권남희는 글을 쓰지 않고 작품을 만들었던(창조) 것이다. 권남희는 어떻게 작품을 만들었는가?

위에서 형상화란 작가가 느낀 느낌을 독자가 직접 체험(정서적 체험)할 수 있도록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작품의 경우 작가가 해야 할 다음 단계의 작업은 ‘서로 못을 박고 있는 남편과 아내라는 존재’를 만들어서 독자가 직접 만나보는 정서적 체험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인데 문제는 작가 자신과 남편이 어떻게 작품 속에 들어와서 독자가 직접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는 남편과 아내’라는 존재로 보이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같은 일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은 신적인 창조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창작이란 상상적․허구적 창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답은 나오지 않았는가. 실제의 인물, 즉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화자 나와 남편을 대신할 수 있는 어떤 상상적․허구적 사물이나 존재를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서 독자가 주제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면 되는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 시란 바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시적 존재인 시어를 창작하여 독자가 경험 할 수 있게 해 주는 문학양식이고, 소설은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서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가 말 하고자 하는 주제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문학양식인 것이다.

수필도 시, 소설 같은 창작문학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말 할 것도 없이 시가 시어를 만들어내고, 소설이 허구의 인물이야기를 만들어 내듯 창작에세이도 무엇인가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제3의 매체로서의 사물․대상을 만들어내야 되는 것이다. 그 기본 작법이 위에서 말한 <소재에 대한 비유창작>인 것이다.

이 작품은 ‘서로의 가슴에 못질하고 있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는 주제를 벽에 못질하는 이야기, 즉 벽과 못이라는 사물과 그 행위를 끌어다 접목시켜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벽과 못의 관계’로 만들어 내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일은 ‘서로의 가슴에 못질 한다’는 일상생활에서 누누나 다 사용하고 있는 너무나도 잘 아는 사유(死喩)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신선한 창작물로 감상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는 그 방법이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필자의 창작문예수필 이론 중에 ‘산문적 은유는 운문의 직관적 언어 창조 은유와는 달리 산문적 구성법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비로소 하나의 은유로 탄생 할 수 있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이 작품은 산문문학이 어떻게 그 비유를 창작할 수 있는가를 실제 작품을 통해서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서로의 가슴에 못질’하는 실생활 속의 사유(死喩)를 창조적 은유로 재탄생 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구체적이 방법이 다름 아닌 산문적 구성법에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 작품이 “새해 아침 못 박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남편은 정초부터 왜 못을 박느냐고 불평을 한다.” 이하를 서두에 가져오고, “벽이 갈라진다. 너무 큰 못을 벽에 겨누고 두드려 박은 것이다.”를 그 뒤에 붙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되었다면 ‘만세! 대한독립’ 격이 되지 않았을까. 대한독립 만세는 ‘대한독립 만세!’가 되어야 감정에 맞는다.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상화된 사유가 신선한 창작물이 될 수 있었던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지구촌 문학이 한 결 같이 연구, 개발하여 오고 있는 창조적 구성법에 있었던 것이다. 독자가 서두에서부터 작품 중후반까지 읽는 동안 작품 후반부에 등장하는 서로의 가슴에 못질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벽에 못질하는 이야기로 읽을 준비가 충분히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구성법의 작용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창작이란 본질적으로 상상적․허구적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라 할 때 그 기본 방법이 구성법에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운문의 시 창작과는 달리 산문의 서사문학에서는 사유도 하나의 소재로 선택 될 수 있고, 신선한 비유로 새롭게 탄생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시가 운문적 구성법 위에 시어를 창작하고, 소설이 허구적 이야기(스토리)에만 매달리지 않고 창조적 인물을 만들어 내듯 창작에세이는 <구성법 + 사실의 소재에 대한 비유 창작>이라는 제3의 새로운 창작양식의 문학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찰스 램 이후 에세이문학의 뚜렷한 창작문학화 현상이다.

권남희 수필 「못을 뽑다」는 이 같은 창작에세이의 기본 작법을 통해서 모든 예술창작이 보여주고 있는 상상적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작가는 낯설지만 작품은 구우를 만난 듯 반가웠던 것이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1002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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