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론

껍데기 수필시대를 거부하며- 박양근

테오리아2 2016. 3. 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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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시대마다 나름대로 부르는 이름을 지닌다. 그 명칭은 시대를 이끈 사람의 이름을 따기도 하고 사조나 유행을 빌리기도 하고 폭넓게는 문화적 특성을 참고하여 부르기도 한다. 유럽의 예를 들면 19세기에는 빅토리아시대가 있었고, 20세기 초에는 아방가르드가 있었으며 지금은 동서양을 통틀어 IT시대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카프문학이 있었고 청록파로 불려지던 시대도 있었다. 그만큼 한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는 그 무엇이 중요한 잣대가 된다.

 수필가들은 21세기를 수필의 시대라고 말한다. 기대 반 희망 반의 소산이다. 하지만 수필의 시대라고 부를 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럴려면 어떡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수필가들이 고민하는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수필의 시대라는 원류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나타난다. 인간의 감성을 중시하는 르네상스 시대를 빛낸 문학의 꽃은 시였다. 그 시가 영상과 이미지를 중시하는 21세기의 디지털시대를 맞이하면서 위기에 당면하게 되었다. 컴퓨터라는 영상매체와 사이버 공간이 지닌 상상력과 이미지가 시를 능가하는 환상을 제공해주면서 시의 감동성이 무디어버린 것이다.

 이제 독자들은 주절거리는 시보다 서술자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산문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하고 있다. 산문에는 흥미를 담은 서사가 있고, 감동을 주는 서정이 있으며,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설리가 담겨있으며 독서시간의 제약도 충실히 반영해준다. 곧 산문의 미니화다.

 산문은 운문의 반대 양식이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표현에서 유래한다. 고대인들이 그들의 원시생활과 스토리를 전할 동안 소수의 재주꾼들이 독점한 시는 대중적 생활과 직결되지 못했다. 이제 현대인들은 그 문학적 고향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문학의 특징 중의 하나는 유목성이다. 그 징후는 모계사회로의 회귀와 자동차와 WWW라는 무한공간을 돌아다니는 이동과 휴대폰으로 대표되는 혼성일 것이다. 산업혁명 후에 등장한 근대시민들이 그들의 생활을 그려내기 위해 로맨스와 다른 소설이 필요했던 것처럼 21세기의 현대시민은 소설을 대신하는 새로운 산문을 요구한다. 그 대안이 수필이다. 엄밀히 따지면 서구의 정신적 자산이 에세이와 동양적 풍토를 담아내는 수필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미니산문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의 근대수필은 대략 1920년대부터 시작한다. 봉건적 의식에서 벗어나는 문학양식으로서 수필은 이제 80여년의 연륜을 거치고 해방 60년을 맞이하면서 신 산문의 대표적인 장르로 매김 할 당위성과 필연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수필시대>가 "우리수필의 중흥을 위하여 횃불을 높이 들었다"는 선언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문인의 각오가 좋은 글을 쓰는데 있다면 문학지 발행인의 소명은 좋은 창작공간을 그에게 제공하는데 있다. 예술에서 좋다는 것은 미학에서 보면 진선미에 일치한다. 그리스의 도예가들과 동양의 묵객들이 예술의 혼을 빌어 일생동안 한 편의 좋은 시와 소설을 남기기 위해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문학지를 발행하는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갖가지 미명美名의 깃발을 저자거리에 매달게 된다. 하지만 공명심을 문학적 열정으로 위장하고 상업성을 문학의 포교라는 너울로 위장한 경우가 없지 않다. 이것은 산문의 시대에도 수필의 시대에도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후일 한국수필사에서 2000년 대 초기를 수필잡지의 전국시대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사실 문학현상에는 순화구조가 있어 지난 10여 년간 많은 수필가를 배출하였다. 하지만 대중문화가 확산되고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그리고 각종 문예지가 등단기회를 확대한 결과로써 수필가라는 이름은 이제는 흔한 명함이 되어버렸다. 우스개일지 모르나 21세기의 문화인 행세를 하려면 운전면허증과 여권과 문인이라는 증명서를 가져야한다고 말한다. 어쨌든 그렇게 배출된 수필가들을 위한 창작 공간이 필요해지면서 수필지 창간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

 그 후폭풍은 무엇일까. 인정하든 하지 않든, 수필작품에 질적 등급이 매겨지듯이 수필잡지도 질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준이 낮은 잡지는 동인지의 아류가 되어 끼리끼리 발표하고 읽는 뺑뺑이잡지로 전락한다. 이런 잡지들은 등단 장사를 통해 수명을 이어가면서 좋은 잡지를 구축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말 좋은 잡지는 외로운 문학의 길을 힘겹게 걸어가야 하리라. 진정한 수필가라면 그 잡지를 잊지 않고 지켜주어야 할 것이다.

 언젠가 십여 종에 달하는 수필전문잡지의 발행인들이 모여 무슨 협의체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참으로 오해받을 발상이라고 여긴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잡지발행인들끼리 모여 무슨 가격단합을 하고, 하향 평준화를 통해 너 살고 나 살자는 밀약을 맺겠다는 뜻인가.

 잡지를 발행하는 취지는 하나다. 어느 잡지보다 순수하고 문학성 있는 길을 가겠다는 결의다. 그 순수한 정신은 말 그대로 독자와 작가를 향한 선언이어야 한다. 공생의 음모가 있어야 존립하는 잡지라면 마땅히 스스로 깃발을 내려야 한다. 그런 잡지라면 수필시대에 필요한 잡지는 더더욱 아니다.

 수필은 여타 문학보다 더욱 고결하고 순수한 창작정신을 요구한다. 왜 수필을 일러 격조의 문학이라고 할까. 뜨거운 가슴에 못지않게 깊이 있는 경륜이 깔려야 수필다운 수필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수필시대를 외치는 빈 구호보다는 시대적 진통과 인간본연의 고뇌를 표현하는 문학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진정한 수필시대의 도래를 위히 짐 질 몫을 생각하는 진정한 수필인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