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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목포문학상 본상/아버지의 갓바위 / 김정예

'아쉽게도 이번 채용에는 함께 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5번째 공채에 떨어졌다. 작은 책에만 눈과 코를 박아 놓고 숨도 죄스럽게 쉬며 공부했는데 또 낙방했다. 차라리 공무원 시험이었다면 툭툭 털고 등을 돌렸을 테지만 기업 공채마다 번번이 돌아가며 떨어지니 어느곳에서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좌절감이 일상을 집어삼켰다. 누군가 실수로 흘려보낸 유리병처럼 좌표도 부표도 없이 망망대해를 떠도는 기분이었다. 내게는 '장녀'라는 짐이 있었다. 빨리 가족을 부양해야한다는 압박감이 닻이 돼 나의 마음을 우울한 기저로 끌어내렸다. 아버지를 볼 때마다 죄송한 마음이 들어 피하기만 했다. 밥도, 대화도, 가끔 함께 나가던 낚시도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비 맞은 쥐가 벌벌 떨며 하수구로 도망가듯 처량히 가족을 피해 다니던 ..

현상現象수배/조현미

어느 날, 당신이 숲길을 지나는데 멀쩡한 나뭇가지가 떨어진다면, 용의 선상에 과연 누구를 올리겠는가. 바람, 혹은 새? 그도 아니면 다람쥐나 청설모? 허나,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라면, 잘라낸 단면이 부리를 연장으로 썼다기에 너무 정교하다면, 떨어진 나뭇가지가 한결같이 참나무 속의 활엽수라면? 남은 용의자는 이제 다람쥐와 청설모뿐이다. 도토리나 상수리를 즐겨 먹기로 사람을 제하곤 이들뿐이다. 그악스러운 뙤약볕이 하늘을 지져대는 한낮이었다. 바람도 출타중인데 자꾸만 나뭇가지가 떨어졌다. 소낙비처럼 직선을 긋지도, 꽃잎처럼 하르르 지는 것도 아닌, 성글고 큼지막한 눈송이처럼 요요하면서도 유연한 하강이었다. 나뭇잎 대여섯 장을 꽃잎처럼 두른 중심엔 연회색 모자를 쓴 도토리가 앉아 있었다. ‘드디어 사건 현장을..

어느 날 밤의 단상 / 루쉰

나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꼽는 독자들은 종종 내가 진실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편파성에서 기인한 과도한 칭찬이다. 내가 일부러 사람을 속이려 하지 않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밝히려 하지도 않는다. 내가 표현하는 것은 단지 몇 가지 생각들로서, 인쇄인에게 넘기기에 충분한 정도의 것일 뿐이다. 내가 종종 남들을 분해하려고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 대해서 수술칼을 갖다 대는 것이다. 그것도 보다 냉정하게, 내가 자신을 가린 장막의 한 귀퉁이만을 들어 올리면 예민한 정신들이 쏟아져 나온다. 만일 내가 자신의 전부를, 내 모습 그대로를 들춘다면 어떤 것일까? 때때로 사람들을 쫓아 버리기 위하여 이 방법을 사용하고 싶은 생각이 나는데, 그렇..

달빛, 꽃물에 들다 / 김새록

쭉쭉 뻗은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은 먹이를 찾아 달리는 짐승 같다. 논두렁 밭두렁 골목길에서 볼 수 있는 한적한 곡선의 흐름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달빛처럼 은은하고 부드러운 교통망은 속도를 다투는 도시에 걸림돌일 뿐이다. 새털구름, 조각구름, 그리고 뭉게구름처럼 모양새가 각기 다르게 흘러가는 구름이나 높낮이가 물결 같은 능선, 선의 방향에 구애받지 않고 들쑥날쑥 뻗어가는 나뭇가지. 크고 작은 돌멩이들의 자연스러운 곡선은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쉼터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회지의 땡볕 같은 속도의 흐름 속에 말랑말랑한 정서를 생각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사람도 처음 달빛이었다가 자랄수록 뙤약볕 같은 성격으로 변질되는 인성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천진난만한 신생아의 순수와 부드러움은 자연의 ..

얼간이 법칙 / 김예경

성격이 침착하지 못한 사람을 두고 덜렁댄다고 한다. 나는 침착해 보인다는 말을 가끔 듣는데 겉보기와 달리 상당히 덜렁대는 편이다. 단적인 예로 나는 집 안에서 내가 보관해둔 물건을 잘 찾아내지 못한다. 그런 약점을 감안해 잘 보관한다고 해도 그런 물건일수록 더 못 찾으니 그런 때는 참말이지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지 보관에 문제가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집에서 내가 찾지 못하는 물건을 찾아내는 사람은 항상 큰딸이다. 딸은 본인이 둔 물건을 그렇게나 못 찾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자기가 둔 물건이 아닌데도 그리 쉽게 찾아내는 딸을 이해하지 못한다. 분명히 비결이 있다 싶어 물어보지만 대답은 항상 똑같다. 물건의 종류에 따라 보관할 만한 장소가 대강 짐작이 가지 않느냐고 한다..

제3회 시흥신인문학상 대상/친구 W / 이동형

동네 카페에서 난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었고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반가웠다. 언제 장만했는지 모를 구두와 서류 가방, 셔츠 위에 껴입은 털조끼 차림으로 그는 나타났다. 민낯에 티셔츠 와 운동화 차림인 내가 무안할 정도로 그는 차려입고 나왔다. 앞머리를 왁스로 말아올리고 얼굴에선 화장 품 냄새가 났다. 그는 목소리까지 나긋나긋하게 바뀌어 있었다. 하굣길에서같이 웃고 떠들던 예전의 그와 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 모든 것이 꼭 그의 종교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단지 그가 전보다 성 숙해진 탓이다. 그뿐이다. 어릴 때부터 W와 나는 친구였다. 내게서 친구란, 내가 미처 몰랐던 면이 그 사람에게 있더라도 이를 받아들 여 줄 수 있는 관계를 의미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때만 해도..

냇내, 그리움을 품다(제9회 천강문학상 수필 대상) 허정진

냄새는 그리움이다. 문득 아니면 울컥, 그때 그 어느 날의 흔적과 시간을 찾아 영혼의 빗장을 푸는 알레고리이다. 갓 볶아낸 커피 향기, 담장너머 청국장 냄새, 새로 갈아입은 옷에서 나는 새물내, 그 목도리에서 그 사람의 언어와 체온과 숨결이 느껴지는 체취, 꽃그늘을 지나다 흠칫 돌아보는 향수 내음. 가슴이 먹먹한 날, 무심코 잊고 살아왔던 먼 기억들이 일상을 툭 치고 갑자기 밀려오는 그리운 냄새들이 있다. 인간은 아주 다양한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 커피나 꽃들이 가진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눈을 감고도 그 사람의 땀과 체취만으로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다. 후각수용체 신경은 특정 냄새에 대해 한 가지 세포만 존재하기 때문에 수많은 냄새에 대한 정밀한 뇌 지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식욕을 느끼..

2018년 흑구문학상 수상작/명태 / 곽흥렬

드디어 동해 바닷가 작은 포구를 벗어났다. 차는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구절양장의 산허리를 휘돌고 돌아 나간다. 대관령의 험준한 고갯마루를 타고 넘어 줄곧 서西로, 서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 현기증으로 머리가 어찔어찔하고 속이 메슥거려 온다. 그렇게 얼마를 지났을까. 탁 트인 분지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느닷없이 나타난 황태 덕장, 끝 간 데를 모르게 늘어선 명태의 군상들이 사정없이 후려치는 칼바람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인 채로 꾸덕꾸덕 몸피를 줄여 가는 중이다. 이 깊은 산중에 웬 포로수용소가 있었더란 말인가. 사뭇 절규에 가까운 그들의 고통스런 표정에서, 자유를 갈구하며 몸부림치는 뭇 백성들의 환영幻影을 본다. 한껏 벌린 입에서는 피 끓는 혁명가가 울려 나오..

아등바등 / 이상경 - 제12회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 금상

묘하게 알아보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생전보다 특별히 부으시거나 살이 빠지신 것도 아닌데도.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제야 익숙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시기 전 담도가 막힌 탓에 온통 누렇게 변해 있었기는 해도, 확실히 명절 때마다 뵈었던 그 얼굴이 맞았다. 기묘했다. 그냥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또 아예 사람인 적 없었던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왜 옛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는지 짐작할 것도 같았다. 생명의 마지막 흔적마저 자취를 감춘 얼굴은 마른 강바닥 같았다. 강이었고, 강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넘실거리는 뭔가가 사라져 버렸기에 강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고 이질적인. 천성이 감성적인 엄마는 할머니 옆으로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 먼저 ..

육탁 / 김희자

침묵을 비집고 빛줄기가 거실 바닥으로 든다. 겨울 날씨가 봄 날씨 같다고 비웃었다가 된통 욕을 보고 있다. 세상천지가 꽁꽁 얼고 하늘과 땅의 길도 막혔다. 영하 20도. 맹추위는 가난한 사람의 체감온도를 한층 추락시킨다. 냉혹한 바닥을 치고 나갈 탈출구는 어디쯤 있는지. 여자는 지금 미래로 나아가지도, 과거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바닥을 치는 여자의 육신처럼 거실 바닥에 뒹굴던 빛줄기가 파닥거린다. 새벽 어판장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 육탁(肉鐸)과 같다. 화려해 보이는 도시의 군중 속에 말 못 하는 가난이 여기에도 있다. 더는 칠 것이 없는 생의 바닥. 물질도 정신도 모두 바닥이다. 한파가 가슴 깊숙이 파고든 지 오래이니 심신이 꽁꽁 얼음장이다. 그런 여자에게도 봄날은 올까? 물질이 궁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