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 1548

男자지圖/김근혜

男자지圖 “어디를 잘라낸 것이 가장 마음이 아픈가.” 성전환 수술받은 어떤 남성에게 물었다. 그 남성은 “월급이 깎인 것.”이라고 말했다. 남성의 생식기를 잘라낸 것을 아파할 것으로 생각하며 질문한 것이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다. 사용자는 성전환해서 여성이 되었으니 월급을 깎은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차별 당했다는 말이다. 성전환 수술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자궁 선망과 성차별에 대한 이십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첫 수업 시간이다. 주제는 성차별에 대한 자유토론이다. 몇몇 여학생들의 의견이 비슷했다. 남,녀 간의 취업 기회나 임금차별, 승진에 관련된 사회적 불평등에 관한 것이었다. 부부가 똑같이 직장을 다녀도 육아와 요리 전담은 여자라며 평등하지 못한 성역할에 대한 분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

몸/김귀선

조심스럽게 옷을 벗긴다. 두툼한 스웨터와 꽃무늬 고무 치마, 양말을 차례로 걷어낸다. 앞트임 없는 윗옷은 뒤집듯 위로 올리고 돈주머니가 매달린 분홍색 속바지는 아래로 끌어내린다. 이어 겹쳐 입은 두 개의 내의를 분리하려다 한꺼번에 벗겨낸다. 마지막으로 펑퍼짐한 속옷을 방바닥에 내려놓자 찰기 빠지고 늘어진 나신만 남는다. 저수지의 물이 줄고 나서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듯이 물기 마른 구순 노인의 몸에서 삶의 근원을 본다. 욕조 물에 때가 불릴 동안 얼굴부터 씻긴다. 이마의 주름이 고른 밭고랑 같다. 묵정밭에 듬성듬성 거름 무더기를 널어놓은 듯 버짐이 얼룩얼룩하다. 한 여자의 세월이 무서리 맞은 수숫대로 고스러져 있다. 저 얼룩도 때처럼 씻어 없앨 수 있다면…… 얼굴을 문지를수록 어머니는 아이처럼 눈을 ..

어미 / 김혜정

어느 날 나의 일터인 어린이집 베란다 밑에서 새끼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베란다로 달려 나가 법석을 떨었다. 이제 갓 돌을 지난 아기들까지 새끼고양이를 가리키며 옹알이를 했고 네댓 살 먹은 아이들은 신기한 듯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어린이를 돌보는 선생들도 일제히 고양이를 보러 베란다로 나갔다. 어미고양이는 하고 많은 아파트를 두고 왜 하필 어린이집 베란다 밑에 둥지를 틀었을까? 어미 고양이도 예쁜 아가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그 모습을 보면서 행복해하는 선생님들이라면 자기 새끼들을 잘 보살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꼬물꼬물한 새끼고양이 다섯 마리는 어미젖을 먹고 있었다. 얼룩무늬와 검은색무늬가 그려져 있는 모습이 어미와 아빠고양이와 똑 같아 ..

제10회 달서책사랑 전국주부수필공모전 대상/다시 책시렁에서 / 이지영

문간방에 먼지가 세 들어 사는 집이 있었다. 집 앞 큰 길에는 정류장이 없어도 버스가 멈춰 섰다. 해질녘에 버스가 지나가면 그 길 위에는 흙먼지와 아버지가 남겨졌다. 좀 있으면 대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부엌에서 숟가락 놓는 소리도 따라 들어갔다. ​ “아빠 다녀오셨어요?” 마루 위로 쏟아지는 네 남매의 목소리는 온 동네를 채웠다. ​ 석류나무가 새순을 올리던 어느 봄날, 저물도록 버스가 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이튿날 우리 가족은 짐을 꾸려 고향집을 떠나야 했다. 아버지가 손수 짜 주신 소나무 책시렁을 그대로 남겨 둔 채 몸만 빠져 나왔다. ​ 이사 간 집에는 우편함이 없었다. 아랫목에 묻어 두던 아버지의 밥그릇도 사라졌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던 나는 잠에 취해 살았다. ​ 199..

향기를 듣다/최민자

딱새 한 마리가 동네의 아침을 깨우듯 유자 한 알이 온 방의 평온을 흔든다. 방문을 열 때마다 훅 덮치는 향기. 도발적이다. 아니, 전투적이다. 존재의 외피를 뚫고 나온 것들에게는 존재의 내벽을 뚫고 들어가는 힘도 있는 것일까. 절박한 목숨의 전언 같은 것이 내 안 어딘가를 그윽하게 두드린다. 맛보다는 향기로 승부한다는 점에서 유자는 레몬과 닮은 꼴이다. 레몬 향기가 금관 악기면 유자 향기는 목관악기다. 레몬 향기가 바이올린의 고음이면 유자 향기는 비올라의 중음이다. 매끈한 피부에 길쭉한 몸매, 청순하고 새치름한 레몬이 도회 아가씨라면 우툴두툴하고 우루뭉술한 유자는 투박하고 속정 깊은 남도 아낙을 닮았다. 스러지는 것들에게는 소멸의 공포 같은 게 있는 것인가. 유자는 요 며칠 더더욱 맹렬하게 향기를 뿜어..

센 녀석이 온다 / 이삼우

햇살이 넘실거리는 주말 오후다. 소파에 상체를 파묻고 TV를 보면서 졸고 있을 때였다. 휴대전화의 컬러링이 절간 같은 집안의 정적을 깨뜨린다. 작은 며느리 전화다. 손자 녀석이 보채는 통에 할머니 집에 오겠단다. 작은 아들네는 우리 부부가 사는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안방 침대에서 주말 드라마를 보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아내도 손자가 온다는 전화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집 안 청소를 안 했는데….” 혼자 말하듯 웅얼웅얼한다. 당신이 청소하겠다는 의사표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옆이 있는 남편한테 부탁하는 것도 아닌 삼인칭 유체이탈 화법이다. 아내는 잠이 덜 깬 푸석한 얼굴로 거울을 보더니 안 돼! 하며 재빠르게 샤워실로 들어가 버린다. 노부부만 사는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정확히 말하면 내..

동상(凍傷) / 유점남

셋째 언니가 발이 아프다고 한다. 어릴 때 얼었던 발가락이 겨울만 되면 덧나기 때문이란다. 고무신 하나로 추운 겨울을 견디던 때라 나도 고생한 적이 있었지만 오래전에 다 나았다. 60년도 더 된 상처가 언니에겐 왜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열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오니 셋째 언니가 없었다. 전에도 두 번이나 가출한 적이 있어 아버지가 찾아오곤 했었는데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얼마 뒤 어느 집 식모가 되었다 하고 공장에 취업을 한 것 같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누구도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언니의 가출은 그렇게 식구들에게 잊히고 말았다. 언니를 다시 만난 것은 15년이 훌쩍 지난 뒤였다. 내가 결혼을 하고 서울에서였다. 재개발 지역 반지하 단칸방에서 택시 운전을 하..

아버지의 손 / 박정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죽음과 아버지를 연관시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도 꿈이 있었고 성공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성공할 때까지 기다려주실 줄 알았다. 정말 언제까지라도 기다려주실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성공을 미뤄두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약주를 사 들고 자주 찾아뵈었을 것이다. 바람 부는 날엔 바람에 찢긴 대로 비가 오는 날엔 비에 젖은 채로 성공하지 못한 초라한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불쑥불쑥 아버지 앞에 보여드렸을 것이다. 이젠 아버지가 그리우면 아버지의 손을 닮은 손을 보러 호미곶으로 달려간다. 동해안 포항 호미곶에 가면 떠오르는 해를 받치듯이, 또는 공을 쥐듯이 손가락이 안으로 구부러진 손이 있다. 손은 오른손과 왼손이 바다와 육지를..

불통不通 / 안연미

사람마다 감정 상태에 따라 표현법도 다른가 보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는 곳에서 메시지 전달은 더 말할 나위 없는 듯하다. 몇 해를 친숙하게 지내던 지인과 하루아침에 불통이 생기니 말이다. 남편과 미국을 다녀오니 전국이 불볕이라 미 서부의 뜨거운 공기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여독을 풀기도 전에 할 일이 많았다. 자동으로 꺼지기를 반복하던 손전화기를 새것으로 바꾸고 나니 열흘 넘게 물 구경 한 번 못한 텃밭도 돌봐야 한다며 남편은 발길을 재촉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버린 밭을 남편 혼자 해결하기에는 턱없는 일인지라 다른 이의 힘이 필요했다. 예초기 두 대에 시동이 걸리니 곁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들리지 않을 만큼 소음이 대단했다. 감자를 심어둔 곳에 잡초를 헤집고 보니 말라버린 감자 줄기와 잎이 ..

여름 연못의 수련, 이 어인 일인가! / 김훈

광릉 숲속 연못에 수련이 피었다. 수련이 피면 여름의 연못은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 속에서 가득 차고 고요한 순간을 완성한다. 수련은 여름의 꽃이지만 작약, 모란, 달리아, 맨드라미 같은 여름 꽃들의 수다스러움이 없다. 수련은 절정의 순간에서 고요하다. 여름 연못에 수련이 피어나는 사태는 '이 어린 일인가?'라는 막막한 질문을 반복하게 한다. 나의 태어남은 어인 일이고, 수련의 피어남은 어인 일이며, 살아서 눈을 뜨고 수련을 들여다보는 일은 대체 어인 일인가. 이 질문의 본질은 절박할수록 치매하고 치매할수록 더욱 절박해서 그 치매의 절박으로부터 달아날 수가 없는 것인데 수련은 그 질문 너머에서 핀다. 수련이 핀 여름 연못가에 주저앉은 자와 물 위에 핀 꽃 사이의 거리는 멀고, 이 거리를 건너가는 방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