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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달, 연두가 온다 / 장미숙

테오리아2 2022. 9. 27.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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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은 배경을 둔 색깔이지만 연두는 배경이 되는 색깔이다. 초록의 바탕색을 이루는 연두는 봄의 전령사이고 모든 색의 시작이다. 봄이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 출발선에 선 연두가 머리띠를 질끈 묶고 선수로 나선다. 지대가 낮은 들판으로부터 길을 건너고 마을을 지나 계곡을 가로질러 높고 낮은 산으로 연두는 달려간다.

논둑이나 밭둑에 걸터앉고 저수지 둑에도 멈춰서며 돌담 옆 감나무 가지에서 까불기도 한다. 보리밭에서 한눈을 팔다가 개울물 소리에 발맞춰 종종거릴 때도 있다. 연두가 머무는 곳은 생명의 성지가 된다. 꿈틀꿈틀 피어오르는 흙의 온기에 스며 연두는 쑥이 되고 냉이가 되고 달래가 된다.

 

 

바람의 옷자락 사이에 숨은 연두는 숲속 나무를 깨운다. 가지마다 피어난 잎눈 속에는 연두의 숨소리가 가득하다. 한여름 진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이파리의 잎맥은 연두의 발아로부터 시작된다. 나무가 나무다운 건 이파리의 무한한 변화에 있다. 새 부리 같은 유록색의 유년을 거쳐 유청색의 청소년기를 지나 초록의 청년기를 맞는다. 갈색이나 주홍빛으로 노년을 불태우고 나면 빈 몸으로 참선에 드는 나무의 근간에는 연두가 자리한다.

침묵의 계절을 견디고 몸을 푼 강물도 실상은 연둣빛이다. 초록이 물속에 풍덩 뛰어들기 전, 물살의 등을 어루만지는 연두의 손길에 강은 가만가만 마음을 연다. 확 다가가지 않은 은근함, 감각적인 내음을 지닌 차분한 색이 땅에 스며들어 생명을 어루만진다.

햇볕 따뜻한 날 밭두렁에 앉아 있으면 바지런한 연두의 움직임이 보인다. 바람에 살랑이는 작은 손들이 금세 햇빛을 끌어당겨 자신의 몸에 색을 입힌다. 휘파람 소리에도 찰랑거리는 봄, 세상이 꽃향기로 가득 차면 연두는 조용히 뒤꼍으로 물러날 줄도 안다. 꽃은 쉬이 지고 녹음방초의 계절은 순식간에 들이닥친다. 초록의 점령군이 도시 골목까지 밀고 들어올 때도 가만히 초록의 등을 밀어 올리는 연두, 4월은 연두가 가장 빛나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