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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발의 철학 / 복진세 - 2022 매일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테오리아2 2022. 9. 27.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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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그릇에는 도자기와 막사발이 있다. 가만히 보면 생김새도 다르고 쓰임도 달라서 재미있다. 사람도 도자기 같은 사람이 있고 막사발 같은 사람이 있다.

 

도자기는 관요에서 이름난 도공에 의하여 질흙으로 빚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다. 도자기는 관상용 또는 화병이나 찻잔, 식기 등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대부분은 만들어질 때부터 용도가 정하여진다. 격식 있는 상을 차릴 때는 밥그릇 국그릇 탕기 찜기 접시며 주병 등과 같이 용도대로 사용해야 한다. 국그릇에 밥을 담을 수는 없다. 그릇 하나에 하나의 용도만이 정하여졌다. 도자기는 활용 면에서 보면 매우 편협한 그릇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깨끗이 닦아서 장식장 등에 전시되어 관상용으로 사용된다. 행여 다칠세라 다루기에도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우리 집 대청마루 장식장에는 꽃무늬가 선명한 도자기가 항시 진열되어 있었다. 언뜻 보아도 값이 꽤 나가는 듯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어머니가 시집와서 처음으로 샀다는 도자기는 어머니가 가장 자랑하고 싶은 목록 중 으뜸이었다. 우리 집 도자기는 귀한 손님이 오실 때나 아버지 생신 등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늘 장식장에 모셔져 있다. 어머니는 훤칠한 키에 뽀얀 살결을 가지고 도자기를 닮은 형을 무척 사랑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형은 장인 소리를 들을 만큼 빼어난 솜씨를 가진 꽤 유명한 전문가였다. 전문가는 자기 직분만 충실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도자기 그릇과 닮았다.

 

막사발의 모양새는 투박하나 기품이 있어 보인다. 두껍고 거친 겉면은 부드럽지 않으나 기세등등한 장수의 넉넉함을 닮았다. 하늘을 향하여 벌린 주둥이는 당당하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가졌다.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수수하고 꾸미지 않은 자연미에 빠져든다. 도자기와 같이 일상생활에 주로 식기로 사용되었으나 사용 빈도 면에서는 막사발이 단연 앞선다. 막사발은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담아낸다. 도자기가 용도 외에는 사용되기를 거부하는 이기심 많은 그릇이라면, 막사발은 다양성과 포용성을 지닌 서민들의 그릇이다.

 

형은 특별한 용도로만 사용되는 도자기를 닮았다. 형은 당연히 전문가의 일 외에는 집안일을 전혀 거들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가졌다. 당연히 집안 심부름이며 잡일은 내가 도맡아 하였다. 어머니는 나를 종그락이라고 불렀다. 작은 표주박인 종그락처럼 부리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언제든지 손에 끼고 다니며 온갖 일을 맡기기에 좋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도자기를 닮은 형이 부러웠다.

 

그릇은 채워졌을 때는 그 용도를 다한 것이다. 다시 비워졌을 때 비로소 그릇의 임무를 다시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비어 있어도 그릇 본연의 의무를 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막사발처럼 내용물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채우고 비울 수 있는 그릇이 좋다. 공자는 논어 위정 편에서 군자불기(君子不器)를 가르쳤다.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아서는 아니 된다.", "군자는 한 가지 재능에만 얽매이지 말고 두루 살피고 원만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키우는 데 혈안이 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심각한 개인주의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개인 이기심이 극치를 이룬다. 정치인들도 국가나 국민의 안위보다는 자기 개인이나 정당의 이익만 좇는다. 도자기처럼 편협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회는 전문가도 필요한 세상이지만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아는 막사발처럼 넉넉함을 가진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 스마트폰은 현대 문명의 총아다. 그 원리가 막사발을 닮았다. 모든 걸 다 담았기 때문이다. 막사발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최첨단 그릇이다.

 

막사발은 막 만들어서 막사발인지, 막 사용하여서 막사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나는 후자의 편이다. 막 사용하다가 금이 가거나 이가 빠져나가도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행여 다칠세라 아까워서 사용하지 못하고 구경만 하는 도자기를 대신하여, 집안의 온갖 행사에 불려 다니며 고생을 한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국물이 새거나, 깨진 부분이 일정 선을 넘으면 그때서야 버려진다. 아니 재수가 좋으면 개밥그릇으로 용도가 지정된다. 처음으로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개 밥그릇……!" 개의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자유 시간이다. 가끔 술 취한 주인장의 호된 발길질에 채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자기를 닮은 첫아들인 형은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앞서갔다. 정해진 용도대로 자기만의 길을 걷다가 장식장에 갇힌 채로 간 것이다. '한 마리 산토끼를 잡으려고 온종일 산속을 헤매다가, 아름다운 경치는 구경도 못 해 보고, 해 질 녘에 내려와 잠드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것을 모른 채로……!' 그토록 도자기를 사랑하던 어머니도 도자기의 사망 소식을 모른 채 종그락만을 남겨 둔 채 소천하셨다.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막사발이 되고 싶다. 그동안 도자기처럼 생각 없이 살다 보니 이기심으로 살아온 나날들이 후회스럽다. 여생은 막사발을 닮은 넉넉함으로 살아가리라. 설혹 개밥그릇이 되면 어떠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