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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테오리아2 2018. 4. 4.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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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김근혜

 

은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이다.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무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함께 했지만 바람처럼 스쳐간 이들도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이면 인연에 대한 생각해 보게 된다.

 

전화번호부의 이름을 쭉 훑어본다. 사람, 사람이 보름달처럼 떠오른다. 그중에서 동생뻘 되는 나이지만 오빠 같은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 L 씨다. L 씨는 소소한 일에까지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다. 칼럼을 쓸 때의 일이다. 신문에서 내 글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어왔다. 격려 덕분에 분발할 수 있었다. 자기 일도 바쁜데 남의 일에 정을 낼 사람이 얼마나 되랴. 조그만 일에도 살갑게 전화해서 다독이고 살아갈 힘을 준다. 그의 따스한 정 덕분에 한 해를 잘 버텼는지도 모른다.

 

전화번호부에서 영원히 제명한 아픈 기억도 있다.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한 일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전화번호부에는 없다 해도 기억 속에선 평생을 산다. 나쁜 마음을 먹고 다가온 사람도 있었고 앞으로는 공정을 운운하며 뒤로는 부정한 사람도 있었다. 시간은 나쁜 기억을 새록새록 떠오르게도 했지만 빨리 잊게 하는 재주도 가졌다. 아픔을 준 사람들이 밉지가 않다. 세월이 그렇게 만드는지 좋았던 일만 떠오른다.

 

 

 

 

 

 

 

 

 

 

번듯한 외모보다는 청국장 냄새가 나더라도 진실한 사람이 좋다. 막걸리처럼 텁텁해도 온기를 가진 사람이면 오래도록 만나고 싶다. 작은 허물도 크게 덮어주고, 마음을 터놓아도 흉이 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엄마 품처럼 푸근해진다. 어쩌다 내 인생에 행운같이 찾아온 사람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멀리 이사를 하거나 떠나버려서 슬프다. 그래서 행운은 지나가는 구름이라고 했나 보다.

 

필요로 만난 사람은 오래가지 못한다. 목적을 달성하면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표가 나게 자신의 잇속만 차리는 사람이 있다. 차 한 잔 살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오는 길은 뒷맛이 개운치 않다. 철없을 때는 인정머리 없다고 탓했지만 이젠 내 부덕을 돌아보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많은 사람 중에 내가 원하는 사람만 만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상처도 받고 살아가는 방법도 배우게 된다. 사람 사는 일이 그런 것 같다. 세상은 나쁜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베풀고 손해 보고 사는 데도 보상보다는 피해를 보는 일이 다반사다. 인덕 없는 탓으로 돌렸는데 법정 스님의 말을 빌리면, 진실 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부은 대가로 받는 벌이라고 했다. 설령 그렇더라도 내가 지닌 성정은 버리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일이 자주 생기다 보니 그런 사람을 탓하기보다는 전생의 업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에게 해를 끼치고 떠나는 사람은 전생에서 나에게 받을 빚이 많은 사람이라고. 그리 마음먹으니 고깝던 것도 사라지고 편안해진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습관을 지니고 함부로 하지 않는다면 복을 짓는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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