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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설화와 문헌에 나오는 누에이야기

테오리아2 2016. 1. 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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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와 문헌에 나오는 누에이야기

 

1) 사람들이 누에를 만나기 시작한 것은?
2) 뽕나무와 누에에 대한 설화
3) 누에만이 갖고 있는 큰덕
4) 문헌에 보이는 뽕나무와 누에

 

 

1) 사람들이 누에를 만나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누에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단군왕검이 버들궁전에 살며 누에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라 하지만, 그 이전부터 사람들은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며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로 가는 생활수단으로 사냥으로 얻은 짐승의 가죽과 함께 누에고치를 이용하여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려는 원초적 본능을 해결하는 기술로 사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삼한시대인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과 예맥(濊貊)국에서도 누에를 길러 옷감을 짜서 입었으며 고구려 동명왕과 백제 온조왕 신라 박혁거세 시기에도 농사와 함께 누에치기의 귀중함을 강조하였다 한다.

 

고려시대에도 국가경영의 주요수단으로 인삼, 청자, 비단은 대표적인 국가 전략 산업으로 그 가치는 세계적인 산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더욱더 많은 비단의 생산이 필요하였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나라를 세워 불안정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이 편안히 살게 하려면 산업생산을 통한 국가재정 확충과 함께 명나라에 보내는 조공무역과 신흥 귀족의 품위유지용 수요량의 증가는 국가가 적극 나서야하므로 이를 선잠제(先蠶祭)와 왕비 친잠례(親蠶禮)를 통하여 계속 권장하여 왔다.

 

그러면 이와 같은 행사는 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까를 고증하여 볼 때 국가(왕)의 독립적인 통치행위는 정치와 전쟁, 외교가 최우선이다. 협의의 정치에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과 성곽의 축조, 순행, 관리의 임면과 관직의 설치, 그리고 제천 및 종교적 행위이다. 왕의 정치행위는 그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구체적 행태로 대사(大赦) 권농(勸農) 진휼(賑恤) 토벌(討伐) 열병(閱兵) 등과 이러한 행위의 실천을 위한 교령(敎令)의 반포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왕의 직능은 Wittfosal의 수리사회(Hydraulic society)의 지도자(절대군주)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방어시설(Huge defence), 장엄한 궁궐(Colossal palace), 대규모의 사원(Great edifies), 다양한 수도 시설 등을 위한 대규모의 인력동원을 통한 동방전제군주제(Oriental Despotism)의 모습은 중국천자의 정치행위와 같은 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02

 

중국 사기에서는 황제 헌원의 왕비 서능(西陵)씨가 처음으로 누에농사를 시작하였고 이 시기에 같이 살았다는 전설 속의 신농(神農)씨가 농사 짖는 법을 가르쳤다 하여 아직도 서능씨는 누에를 처음 친 누조(累祖)로, 신농씨는 농사를 처음 가르친 누조로 알려져 왔다. 따라서 모든 권잠의식(勸蠶儀式)에는 서능씨를, 권농행사는 신농씨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과 함께 농사를 잘 짓게 도와주십시오 하는 제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서능씨는 신농씨의 딸로 알려진 사람인데 서능씨로부터 양잠이 시작되었다는 근거로 태산이 있는 중국 산동성 곡부는 공자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 졌지만 신농씨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으로 이곳 산동성 대문구(大門口)에서 누에고치를 삶아 실을 뽑는데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시기의 물레 가락인 방추(紡錘)가 발견된 것을 고증하여 서능씨가 처음 누에를 기르며 누에치는 기술을 보급하였다고 중국의 역사에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 학자들은 모든 문명과 문화는 기후(氣候)가 만드는 것으로 누에치기는 따뜻한 '황하'유역에서 문명을 열어간 한족(漢族)보다는 추운 지방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살던 '동이족' 들이 생존수단으로 맥을 이어온 생업으로 추정한다. 또한, 유물이 발견된 이 일대가 동이족이 많이 이주하여 살아온 지역이란 점도 한번 눈여겨보아야 할 사안이다.

 

02 김지영・신형식, 『김부식과 삼국사기』, 한누리, 2001.

 

 

2) 뽕나누와 누에에 대한 설화

 

(1) 누에의 시초

 

고대의 문물적 고증이나 면역학, 생물학 등의 연구를 통해서 현재의 집누에(家蠶, Bombyxmori L)는 뽕나무에 서식하고 있는 멧누에(桑蠶, Bombyx mandarina Butter)와 같은 선조에서 분화되었음이 혈청학상의 반응이나 세포학상 관찰되는 염색체수 그리고 이들 간의 교잡으로 증명하여 왔다.

 

이 진화과정을 설명하며 그동안 집누에의 염색체 수가 n=28개인 것은 apt누에의 n=27개 중의 하나가 절단되어 늘어났음이 이들 간의 교잡을 통해서 증명된다 하였다. 그러나 정작 잠업의 발상지인 중국대륙(대만포함)에 자생하는 멧누에의 염색체 수는 한반도와 일본의 n=27개와는 달리 집누에와 같은 n=28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n=27개인 일본의 멧누에와 n=28개인 중국의 멧누에를 비교 시험한 결과 고치무게, 고치층 무게 및 고치층 비율이 n=28개인 중국의 멧누에의 것이 우수하여 집누에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지므로 서 집누에의 선조는 이들 중국의 멧누에가 유력하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 n=28개인 선조 형 멧누에는 생존과정 중 계통분화 되어 그의 일부가 자연조건의 진화과정에서 원시 형 멧누에로 남는 대신 다른 일부는 고치를 이용하는 중에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선발되어 원시형의 집누에로 순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순화단계로는 처음 야외에서 사육하는 멧누에 형태로 시작 장기간의 순화를 거쳐 실내에 사육하는 오늘의 집누에로 발전된 것으로 생각된다.

 

(2) 비단의 시초

 

비단은 수천 년 전부터 누에가 인간에게 제공한 가장 좋은 선물이다. 누에로부터 생산되는 실은 외국에서도 문자에 S가 붙는 것은 흥미 있는 현상이며 그 예로써 중국어의 Si(絲) 또는 So, 영어의 Silk. 프랑스어의 Soie, 이태리어의 Seta, 독일어의 Seide, 나전어의 Sericin, 우리나라의 실(Sil) 등은 이것을 말하며 영어의 Silk는 중국어의 Si 또는 So에 유래한 것이라고 하며, 고대 중국의 견직물 거래시장이었던 소륵(蔬勒, Soluk) 이라는 신강성에 있는 도시의 지병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실, 비단실, 명주실, 생사, 견사, 누에고치실 등으로 불리다 현재 가장 많이 통용되는 것은 생사 또는 비단실이다. 원래 사(絲)라는 문자는 동물성섬유 특히 잠사(蠶絲)였던 것인데 근세에 이르러 일반적인 섬유의 의미로 사용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3) 말 그리고 여인과 누에

 

(3)-1 선비 아내가 누에가 되었다.

 

충청북도 민담 민요집에 의하며 옛날 어느 시골에 가난한 선비 내외가 살고 있었다. 남편은 밤낮으로 책을 읽으며 세월을 보냈고 집안 살림은 아내가 도맡아 꾸려갔다.

 

부인은 아침 일찍 집을 나가면 이웃집 방아질이나 부엌일을 거들어 주고 저녁 늦게 돌아와서는 바느질품을 팔아 근근이 두 식구의 목에 풀칠을 했다. 그러나 이웃집 일을 거들어 주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니요 품삯이래야 푼푼한 것이 아니어서 집안 살림은 매양 쪼들리기만 했으나 아내는 남편이 과거에 급제만 하면 잘살게 되리라는 희망을 안고 어려움을 참아가며 살아가는 터였다.

 

산에 가 나무를 하면서도 들녘에 나가 피(稷)를 훑으면서도 부인은 힘든 줄은 모르고 열심히 일을 하고 남편을 하늘같이 섬겼다. 그러나 해마다 과거를 보러 간 남편은 세 해나 거듭 낙방을 하고 오던 해도 선비는 글만 읽고 있을 때이다. 아내는 훑어온 피를 멍석에 널어놓고 남편에게 당부했다.

 

“혹시 비가 오면 피멍석이나 댓돌 위에 올려놓아 달라”고, 그리고 부인은 들로 일을 나갔다. 점심나절이 기울면서 난데없는 구름이 일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줄기찬 소나기가 내렸다. 들일을 하던 부인은 바쁜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보니 마당에는 물이 고이고 피멍석이 둥둥 떠내려가는데 방에서는 글 읽는 소리만 낭랑했다. 순간 부인은 설움과 울분이 복받쳐 소리 내어 울면서 “저런 사내와 평생을 살다 보면 고생밖에 없으니 집을 나간다.”고 간단한 집을 꾸려 머리에 이고 집을 뛰쳐나왔다.

 

선비는 노한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깊이 한숨을 토했다. “임자 조금만 더 참으면 될 텐데......” 선비는 어이없어 하면서 연민의 정을 보냈으나 마음 한구석에 자책과 설움이 솟구쳐 올랐다. 그 후 선비는 더욱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고을 원님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말을 탄 사또가 종자를 거닐고 들길을 지나는데 저 앞 논에서 피를 훑는 아낙네가 보였다. 가까이 살펴보니 등에 아이를 업은 아낙은 몇 해 전에 헤어진 자기의 아내가 분명했으나 아시 팔자 그른 여인이 이듬 팔자는 별수 있느냐는 속담과 같이 개가는 했지마는 피 바가지는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또는 데리고 다니는 종자를 시켜 엽전 한 꾸러미를 여인에게 전하라고 이르고 길을 재촉했다. 종자한테 엽전을 전해 든 여인이 가만히 살펴보니 신관 사또는 얼마 전에 헤어진 선비가 분명했으나 지아비를 두고 개가한 몸이니 그 죄 값이 크기도 하려니와 짐짓 어려움을 참지 못한 후회가 불길처럼 일어 미친 듯 사또 앞에 몸을 던지며 죽었다. 사또가 말에서 내려 여인의 시체에 손을 대니 시체는 누에로 변하고 뇌성과 함께 하늘에서 여인의 한 맺힌 소리가 들렸다 한다.

 

“서방님 죽어서나마 선비 몸에 감기고 싶어 누에가 되겠습니다.” 그 뒤부터 명주는 신부의 옷감이 되었다고 한다.

 

 

(3)-2 예쁜 소녀가 누에였다

 

옛날에 나온 『How the world is clothed』라는 책에 의하면 그 옛날 인도 변두리에 예쁜 소녀가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사나운 계모 밑에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학대를 받고 살아왔다.

 

못되게 굴던 계모는 늙고 굵은 뽕나무 토막에 소녀를 꽁꽁 묶어서 바다에 던져버렸다. 소녀가 바닷물 속에 던져지자 별안간 소녀 눈앞에 선녀가 나타나서 사납게 물결치던 파도는 갑자기 잠잠해지고 소녀가 묶인 뽕나무 토막은 무사히 육지에 표류하도록 보호하였다. 마치 효녀 심청전의 공양미 300석에 팔린 심청이가 연꽃을 타고 물 위로 솟아오른 이야기 같은 것이다. 다다른 곳은 확실치는 않으나 일본의 어느 해안이라고 한다.

 

해안에 다다른 소녀는 상륙하고 뽕나무 토막은 해안 모래사장에서 부석사의 사명당 지팡이처럼 싹트기 시작하여 자라며 무성해졌다. 그 나무에서 나온 뽕나무 열매는 온 세상에 퍼지고 소녀는 주민들의 환영을 받고 잘 살았다. 늙어서 죽음에 이르러 보은과 감사의 뜻을 남기기 위하여 소녀를 보호하던 선녀는 그녀를 누에로 만들어 뽕 먹는 것을 가르쳐 고치를 짓게 했다. 즉 가련한 인도소녀의 화신이 누에라는 전설이다.

 

(3)-3 말이 누에가 되었다는 이야기

 

먼 옛날에 어느 무사가 여행을 떠났다. 집에는 사랑하는 딸과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난 지 여러 날이 지났던 것이다.

 

어느 날 딸이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말에게 한탄하며 말하기를 “말아 나의 아버지를 찾아올 수 있겠는가? 나의 아버지를 찾아온다면 내가 너의 아내가 되어 주마”하고 말하였다. 말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크게 울부짖고 집을 떠난 지 얼마 후에 딸의 아버지인 주인을 찾아 등에 태우고 집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아버지를 찾은 딸은 너무 기뻐 말과 한 약속은 모두 잊어버리고 지내는데 그 말은 약속을 안 지키는 처자를 바라보며 약속을 지키라는 듯 구애를 계속하는 표정을 보이므로 아버지가 딸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니 그 딸이 하는 말이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다 아버지를 모시고 오면 너에게 시집을 가겠노라고 언약을 하였더니 짐승인 말도 그 약속을 지키라고 하는 듯 저에게 구애를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니 감히 짐승인 주제에 내 딸을 탐내는 고약한 말이라고 크게 역정을 내며 당장 그 말을 잡아 죽이고 가죽을 벗겨 말리기 위해 펼쳐 널었다.

 

어느 날 널어놓은 말가죽을 바라보며 그 처자는 짐승인 네가 어찌 사람인 나를 사모할 수 있느냐 그러다 보니 이렇게 가죽까지 벗겨 죽어있는 것이 지금도 나를 아내로 삼을 생각이 나겠느냐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말가죽이 그 딸을 돌돌 말아 싸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온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가더니 그 다음 날 뜰 앞에 있는 뽕나무 위에 내려와 앉은 자리에 수많은 벌레가 나와 뽕잎을 먹고 있는데 그 벌레가 누에더라 라는 얘기가 전하여 온다.

 

또 한 얘기는 순조 때 일이라 한다 .

순조의 황녀는 옥 구술을 가지고 궁에서 놀고 있던 중에 어느 날 왕이 애용하는 말이 궁 안뜰에까지 들어와 있는 것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 말 역시 황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날 밤 황녀의 꿈에 낮에 보았던 말이 나타나 “나는 황녀를 사랑하고 있지만, 짐승인 제가 이를 수 없는 사랑이니 차라리 누에가 되어 비단으로 변하여 당신의 몸을 감싸주리라”하는 꿈을 꾸었다 한다.

 

그다음 날 말이 죽어 묻어준 자리에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벌레가 많이 생기더니 근처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가 그 잎을 먹고 방울 같은 고치를 지어 놓아 그 고치를 본 황녀가 모든 고치를 따오게 하여 실을 풀어 비단을 만들어 옷을 지어 입었다는 것이다.
누에를 마주 바라보면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런 사연으로 서로 닮았다고 전해온다

 

(3)-4 마명보살(馬鳴菩薩)과 누에

 

불교에서 양잠은 석가여래 시대 마명보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다. 무척 옛날에 인도에 마명보살이라는 부처님이 있었다. 당시에는 인간이라 하여도 겨우 짐승의 무리에서 사람으로 승격하였을 뿐 남자나 여자나 자기 몸을 가릴 줄도 몰랐으며 알몸으로 살았을 때다.

 

마명보살은 사람들의 이런 꼴을 볼 때마다 어떤 일을 하여서라도 저 미개한 생활습관을 고쳐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러 각도로 생각하여 보아도 모피는 추운 겨울철에는 입을 수 있으나 여름에는 부적당하고 그렇다고 여름철만 생각하면 추운 겨울철이 걱정이라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여러 날을 불철주야하고 궁리하였다.

 

그러나 좋은 방책이 생각나지 않아 자기를 희생하더라도 고쳐가기 위해 천지를 지배하시는 여래님에게 도움을 구하기로 하고 기도를 하던 중 마명보살의 금강좌 옆에서 한 개의 나무가 생기어 가지가 나오고 잎이 나와 일종의 특수한 향기가 나는 나무가 자라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명보살의 몸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되어 작은 여러 마리의 벌레가 나오게 되었다. 마명보살 자신은 무슨 까닭으로 자기의 몸에서 작은 벌레가 나오게 된 연유를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무한히 배가 고픔을 느끼게 되어 푸른색이 펄펄 나부끼는 특수한 향기가 나는 나뭇잎을 먹어보았더니 어느 것보다도 맛이 좋아서 얼마 동안 먹고 나니 먹기 싫어지고 몸은 유리와 같이 투명하게 되고 잎에서 가는 실이 나오게 되었다. 얼마든지 끈기지 않고 나오는 실을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사방팔방에 걸었더니 둥근 집을 만들게 되고 몸을 감추게 되었다.

 

이때 숲 속에서만 살고 있는 원시인들은 오늘도 먹을 것을 구하려고 돌아다니다가 마명보살의 금강좌 근처에까지 와서 마명보살을 찾기 시작하였다.

 

“어디를 갔을까?” “아마도 꽃을 꺾으러 가신게지.”

“그렇다고 하여도 벌써 돌아올 때가 지난 것 같은데. 글쎄 말이지.” “햇님이 벌써 산꼭대기에 걸렸는데 이상하다.” “마명보살이 입고 있던 의복이 있다.” “아 저기 신고 다니던 신도 있다.”
“그렇다면 짐승들에게 잡혀 간 모양이로구나.”

“그렇지는 않을 거야, 인도에서도 덕이 높기로 이름난 분인데 맹수라 할지라도 범하지는 못할 것이야.”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 어디서인지 묘음조(妙音鳥)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묘음조는 날마다 금강좌 위에서 명랑한 목소리로 울고 있었는데 오늘은 무슨 까닭에 저렇게도 감상적이며 처량하게 들릴까?” “글쎄 알 수 없는 일인걸.”

마침 이때에 여래님이 이곳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여래님이 오셨으니 물어보기로 하자.” “여래님, 묘음조가 슬피 우는데 무슨 연유입니까?” 하니.

 

“여기는 마명보살의 금강좌가 있던 곳인데 마명보살은 간 곳이 없고 이상한 나무가 언제부터 생겼는지 아는가?” “이 나무 위에서 묘음조가 울고 있는 것이야.”

“저희들은 어제도 이곳을 지났으나 그 때에도 마명보살께서는 관경(觀經)하시고 있었는데 이런 나무도 없었는데.” “묘음조의 처량한 울음소리는 성자의 신상에 이변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일세.”

“그러면 마명보살이 맹수에게 당하였단 말씀입니까?”

 

“아니, 성직자가 존귀한 희생을 당한 것이다. 저 나무에 달려있는 흰색 방울 같은 것을 보라. 저것이 마명보살의 자비의 화신이다.” “저 방울 같은 것이 어찌하여 마명보살의 화신이란 말씀입니까?”

“마명보살은 너희들이 벗고 사는 것을 항상 가련하게 생각한 나머지 벌레로 자태를 변하고 방울과 같은 것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면 저 방울 같은 것이 무엇입니까?”
“저것은 향사라고 한다.” (향사란 옛날 인도어로 누에고치를 말함.)

“향사는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향사 내에는 벌레가 번데기가 되어 숨어있고 희게 보이는 껍질을 길고 긴 실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면 실은 한 줄로 풀어낼 수 있군요.”

“그렇지, 그것이 마명보살의 자비란 말일세. 향사에서 실을 풀어 옷을 만들 천을 짤 수 있는 걸세.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

 

이렇게 말하는 동안 처량하게 울던 묘음조도 명랑한 즐거운 노랫소리로 변하였다. 마명보살이 인간에게 주신 자비의 화신도 원시인의 지식으로는 오랜 세월 동안 직물로 만들 줄을 몰랐었다. 이상한 나무는 해마다 증식되고 향사를 만드는 벌레도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점점 번식되고 전파되었다. 그 후 몇 천 년 뒤의 일일 것이다.

 

중국 황하유역에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유능」씨의 신하에 창힐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한문자를 만든 사람으로 이상한 벌레를 잠(蠶)이라 명하고 향사를 견(繭)이라고 하고, 특수한 향기를 가진 누에가 먹을 잎이 달린 나무를 상(桑)이라는 문자로 이름을 지었다.

 

또한 잠(蠶)은 만생명에 의복을 주는 최고 최적의 실을 만드는 하늘에서 주신 벌레라는 뜻이고, 견(繭)은 나뭇잎을 먹고 둥근집을 만들어 실벌레를 집 속에 은신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상(桑)은 좋은 나무 중에서 또 좋고, 또 좋고, 또 좋은 나무라는 뜻이며. 사(絲)는 누에의 배속 2개의 실주머니에서 나온 실을 합사하여 된 실이라는 뜻의 비단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3)-5 신의 머리에서 나온 누에

 

일본고사기 상권에 의하면 속수좌지남명(涑須佐之男命)이 원하기를 대기진비매신(大氣津比賣神)에게 먹을 것을 달라 하였다. 이에 대기진비매신은 코, 입, 하체에서 여러가지 곡물을 구비하고 진상하므로 속수좌지남명은 그의 태도를 오인하고 더러운 물건을 가지고 온 것으로 생각하고 대기진비매신을 죽였다 한다.

 

죽임을 당하고 신으로 된 몸에서 나온 것이 머리에서는 누에가 나오고, 두 개의 눈은 벼 종자가 되고, 두 개의 귀에서는 조가 코에서는 팥이 나오고, 음부에서는 보리가 항문에서는 콩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볼 때 대기진비매신의 눈은 벼 모양을 닮았으며 콧구멍은 팥같이 둥글고 귓구멍은 가장 적으니 조같다 하여 억지로나마 말할 수 있으나 머리 부분에서 누에가 나오고 음부에서 보리가 나왔다는 것은 농산물에서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는 누에가 제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는 학자도 있다.

 

하권에서는 인덕왕은 덕이 높고 치세에 특별히 뜻을 가지고 여러 가지 법률을 정하고 교통의 편의를 도모하고 산업의 진흥에도 배려하고 해상통상의 길도 개척한 왕이다. 높은 누각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음을 보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함이라 하여 3년간 공물과 과세와 과역을 면제하였다는 것은 예부터 전하여지고 있다.

 

임금의 왕후인 석지일매명은 질투심이 심한 여자로 임금이 부리는 관비들에게 왕이 거처하는 곳은 들여다보지도 못하게 하고 평상시에 조금이라도 수상한 거동이 있으면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질투가 심하였다는 것이다.

 

어느 때는 왕실에 연회를 베풀 일이 있어 왕후는 연회 준비 차 연회에 소용되는 백엽을 따러 ‘기이국’에 출타하였던 일이 있다. 이때 왕은 왕비가 부재중에 다른 여자와 급작스럽게 결혼하였다는 것이다. 백엽을 따서 귀가하던 왕비는 이 소식을 듣고 원망과 분노가가 충천하여 먼 곳에서 오랜 시간 애써 따오던 백엽을 전부 바다 가운데 버리고 궁중으로 돌아오지 않고 산성국으로 건너가 한국에서 온 노리능미(奴里能美)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렀다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사람을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하였으나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은 다시 왕후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산성국의 여자들이 괭이를 갖고 밭에서 뽑아낸 무와 같이 희고 탐스러운 팔을 벌리고 끌어안고 잠잔 일이 없는 사이로 나는 모르겠으니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하겠지만 저토록 부부로서 화목한 사이인데 사람을 보내도 모른다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너무하는 일이 아니냐”고 쓴 글을 가지고 산성국의 노리능미의 집에 가서 왕후를 만나려 하였으나 왕후는 이 사람들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부름을 간 사신은 그의 누이동생(왕후의 시중을 들던 여관)과 노리능미와 상의하고 결과를 왕에 아뢰기를 왕후가 산성국에 한국인 노리능미네 집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노리능미의 집에서 키우고 있는 벌레로서 알이 되었다. 기어 다니는 벌레가 되었다. 다시 날아다니는 나방이 되는 이상한 벌레를 보고 있느라 그런 것이지 결코 부정한 일이 있다거나 괴이한 일은 없다는 뜻을 왕에게 전하니 왕은 이를 듣고 그러면 나도 그 이상한 벌레를 한 번 가서 보겠노라고 말하고 산성국의「노리능미」가 있는 집으로 왕후를 만나러 갔었다.

 

이때 「노리능미」는 앞에서 말한 세 번 둔갑하는 이상한 벌레를 미리 왕후가 있는 방에 들여놓았다. 이로 인하여 인덕왕(AD 313-399)은 처음으로 누에(즉 이상한 벌레)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3)-6 누에형태와 습성

 

눈 오는 어느 저문 날, 흰 옷을 입은 나그네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니 50세 전후의 여자주인은 하루 저녁 자고 가도록 허락하였으나 의외로 나그네는 잠을 자던 중 심히 신음하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그네가 죽을 때 유언하기를 나의 시체를 매장하여 주신다면 가진 것은 없고 하여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으나 내년 봄 매장한 곳에서 수많은 벌레가 생길 것인즉 그중에 얼룩무늬가 있는 것만 골라서 뽕잎을 준다면 아름다운 비단실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나그네의 말대로 여주인은 이듬해 그 자리에서 무늬가 진한 벌레만 골라서 키우기 시작한 것이 얼룩무늬 누에의 시초라 한다.

 

이로 인하여 일본종은 얼룩무늬누에가 되고 중국종은 전연 무늬가 없는 흰 누에라는 것이다. 얼룩무늬 누에를 전면에 보면 마치 눈(眼) 모양같이 보이므로 안상형반문(眼狀形班紋)이라 하는 것으로 얼룩누에는 눈이 있는데 흰 누에는 눈이 없어 봉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재미있는 일이다.

 

또한, 사자잠․응잠에 대한 전설에 의하면 먼 옛날 중국 림이대왕시대의 일이라 한다. 왕후인 광계부인과 사이에 금색희라 부르는 공주가 있었다. 왕후가 일찍 사망하고 다시 후비를 맞이하게 되자 후비는 전비의 소생인 금색희를 미워하여 왕에게 진언하여 금색희를 사자산에 버리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색희는 사자 등에 타고 다시 왕실로 돌아오니 후비는 다시 매산이란 곳으로 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매 떼는 금색희를 극진히 대접하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피게 되니 대왕의 신하가 이 소식을 듣고 은밀히 금색희를 데리고 다시 왕실로 돌아오게 되자 후비는 다시 바다 산이라는 섬으로 유배하였다. 이때 어부들이 금색희를 구조하여 다시 왕실로 돌아오게 되니 후비는 다시 신하에 명하여 어전 뜰 앞을 깊이 파고 생매장하였더니 그 후 흙 속에서 빛이 비치게 되어 왕은 기이하게 생각하고 파내게 하니 금색희는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왕이 뽕나무로 만든 배에 태워 창해에 띄웠다는 것이다. 이 배는 유랑을 거듭하던 중 어느 육지에 닿게 되자 구조를 받았으나 얼마 후 세상을 떠나게 되자 화신된 것이 누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연유하여 누에의 첫 번 기잠을 사자의 기잠, 두 번째의 기잠을 응의 기잠, 세 번째의 기잠을 선의 기잠, 네 번째의 기잠을 뜰의 기잠이라 하고 금색희가 네 번 어려움을 당하여 이런 호칭이 생기게 된 것이며 누에가 누에 몸이 커지기 위해 네 번의 허물을 벗는 것도 이에 연유하는 것이라 하며 누에가 탈피(脫皮)할 때를 어려움을 겪는 시기로 보고 보호를 산부와 같이하라 하였으며 이를 병이 나서 생기는 증상이라 하지 않고 생리상의 요구라 하였음은 그 시절 사람들의 뛰어난 총기를 알 수 있다.

 

옛날 양잠서에 보면 사자잠, 응잠 , 선잠, 정잠 등의 기록을 볼 수 있으며 과거의 명칭이 변하여 첫잠, 두잠, 석잠, 넉잠이라 하고 1령(令 ), 2령, 3령, 4령, 5령이라 부른 것은 불과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3) 누에만이 갖고 있는 큰덕

 

중국 옛 서적인 잠경에 기록되기를 누에는 여섯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하여 육덕충(六德蟲)이라 하였고 또 누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귀한 벌레라는 뜻으로 천중(天蟲)이라 부르며 지렁이 총자를 누에잠자의 약자로 사용하고 있다. 누에의 생애가 신비롭고 비단만의 품위 있고 우아한 제품은 세계만민이 다 같이 귀중하게 여기며 널리 애용하고 있다. 누에를 육덕충으로 부르는 연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만천하생령의피 인(滿天下生靈衣被 仁)
세계 온 인류의 의복 원료로서 무명실, 털실, 마, 인조섬유, 생사의 다섯 가지다. 지역이나 계절의 차이와 나라의 구별 없이 보편적이면서 귀중히 쓰이는 의류로 만민의 기호품으로 혜택을 주는 것은 어진 마음이 없이는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비단의 종류도 수십 가지에 이르고 누구나가 비단옷을 좋아하는 것이다.

 

둘째…식취직사주인은공보답 의(食取職死主人恩功報答 義)
뽕을 먹고 자기 직분에 응당한 생의 종말을 다하여 주인의 은혜에 보답함을 의로운 일이라 하였다. 뽕잎을 먹여준 주인에 대한 보답으로 잘 성장한 후, 배 안에 있는 실 샘에서 실을 토하여 생사를 풀어낼 수 있도록 고치를 만들어 자기 몸을 감추는 집을 짓는 것은, 주인이 온도와 습도를 알맞게 보호하여 주고 뽕을 잘 먹도록 누에나이에 알맞은 뽕과 수량의 다소에 따라 해준 것만큼의 보답이다.

이때 고치의 크기와 견(繭)질은 뽕을 먹은 가치만큼 대, 중, 소, 여러 가지 형의 고치를 짓고 그 고치실을 잘 풀리게 하는 고치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의리가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셋째…탕화액불사 충(湯火厄不辭 忠)
번데기를 짖고 나방으로 변가기 전에 뜨거운 물과 불에 들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길러준 주인에 대한 충성된 마음이라 하였다. 누에가 고치를 지으면 사람들은 고치에서 실을 풀어내기 위하여 고온에서 죽이고, 말리고, 뜨거운 물에 끓여도 아무런 반항도 발악을 하지 않고 달게 받아 죽어 감은 충성된 마음씨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벌레들은 자기를 해치려 하면 독침으로 찌르고 악취 나는 가스를 풍겨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며 만들어놓은 집의 벽을 물어뜯고 파괴하며 온갖 방어의 행동을 한다. 그러나 누에나 번데기는 물론 누에나방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주인에게 유리하도록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순종함을 충성심이라 한다.

 

넷째…필사면사기 신(必四眠四起 信)
누에는 성장 과정에 반드시 네 번 허물을 벗고 번데기로 탈바꿈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 뽕을 먹지 않고 있을 때를 누에가 잠을 잔다고 하는데 이일을 네 번하지 다섯 번이나 여섯 번 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없다. 또한, 애벌레 시절만 뽕을 먹지 그 기간 이외는 절대로 먹지 않을 뿐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만 먹고 반드시 누에고치를 만드는 짓을 신용으로 보는 것이다.

 

다섯째…물형상징영견 지(物形象徵營繭 智)
누에에게 같은 뽕을 먹여도 고치 지을 때 여러 형상의 고치를 짓고 같은 뽕잎을 먹고서도 백색, 황색, 녹색, 홍색 등의 각색 고치를 짓는 일을 지혜로운 일이다. 이는 고치의 품종에 따라 고유의 형체로 누에고치를 만들며, 황색, 백색, 청색, 녹색, 홍색 등의 각색 고치를 짓는다. 그러나 누에 체내에 특별한 염색구조 기구를 발견할 수 없다. 이는 인간이 소용되는 대로 각색의 실을 만들수 있게 함이니 다른 어느 동물에서는 볼 수 없는 지혜로운 일이라 칭찬하는 것이다.

 

여섯째…화용, 화아, 산란, 화의 ,신(化踊, 化蛾, 産卵, 化蟻, 神)
누에의 한 살이는 알에서 깨어난 애기누에가 제 몸의 10,000배나 크며 큰 누에가 되어, 누에고치를 지으며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나방이 된 후 나방이 알을 낳고, 알이 다시 누에로 탈바꿈을 반복하는 일은 귀신과 같다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대부분 태어날 때의 모양을 바꾸지 않고 일정한 한도까지 성장하고 생을 다한다.

그러나 누에는 일생동안 네 차례나 탈바꿈하여 형태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뿐 아니라, 유충시대에만 뽕을 먹고 그 외 시대에는 전연 먹는 것을 취하지 않을 뿐 아니라 누에 일생을 통하여 수많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귀신만이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인(仁) 의(義) 충(忠) 신(信) 지(智) 신(神)의 여섯 가지 덕을 지니고 있는 벌레라 하여 누에를 육덕충(六德蟲)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4) 문헌에 보이는 뽕나무와 누에

 

(1) 뽕나무는 병민지초(病民之草)

 

뽕나무는 병민지초라는 이 말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겪으며 전한 당시의 우리 선조들의 삶의 과정이 그대로 녹아내린 표현이다. 조선조 후기에 접어들며 우리나라의 국운이 기울며 세도정치가 극에 이를 때 양잠농가에 대한 지방관리나 토호들의 수탈이 얼마나 가혹(苛酷)했으면 뽕나무는 백성을 병들게 하는 풀이라고 하였다 한다.

 

누에농사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조선 말기에는 양잠의 적지였던 경상도 상주, 전라도 고창, 장성 등에서는 일제히 괴질이 돌아 뽕나무가 모조리 죽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는 괴질 때문이 아니라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한 촌로(村老)가 나무에 독즙을 뿌려 죽인 것이다.03

 

이 같은 기록과 함께 논산의 거유 명제 윤증(尹拯) 집안의 파평윤씨 노종 오방파의 종약(宗約)을 보면 윤씨 문중은 문중 종인뿐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동네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① 동네에는 자손 된 사람들은 들어와 살지 말자. ② 동민의 집과 채마밭의 텃도지는 면제한다. ③ 흉년, 우환, 재난, 등에는 재원을 지원하거나 대여한다는 규약 이외에도 윤씨는“누에 농사를 짓지 마라”고 하였다 한다.
이토록 동민을 생각하는 윤씨 문중의 배려가 후세에까지 이어져 한국 전쟁기에 마을 사람들이 윤씨 일가를 보호하여 주었다 한다.04

 

이를 칼럼리스트 조용헌은 서민의 직업을 지배계층에서 보호하여 주는 모범 사례로 소개하였다, 이처럼 윤씨 종가에서 처음 제1집 종회록을 제정하던 초창기인 1643년대는 동민의 소득을 보호하려는 뜻에서 규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산이 전한 시기인 1839년대의 제9집에 이르러 서는 양반이 누에농사를 하면 아랫사람들에게 부담이 돌아가는 것을 우려하여 그런 규정이 새롭게 추가된 것으로 유추해석이 가능하다.

 

이토록 제1집을 규정하든 숙종조 중기에 제정된 종약이 조선 조정이 영 ․ 정조를 지나며 조정의 통제능력이 급격히 떨어지며 누에농사는 지방의 탐관오리나 토호들의 착취대상 농사로 전락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영향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된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나라의 기운이 융성할 때 뽕나무는 백성을 잘살게 하는 돈나무가 되지만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느 시대 구분 없이 백성을 울리는 나무로 나타난다.

 

03 김성훈, 『실크로드』 창간호, 한국잠사박물관, 2001.
04 이해준, 「호서 3대 명가의 모듬살이와 전통」, 『충남의 민속문화』, 국립민속박물관, 2010.

 

(2) 견사(繭絲)하오리까 보장(保藏)하오리까

 

중국 주나라 위열왕 시대 조간자(趙簡子)라는 실권자가 윤탁(尹鐸)이라는 이가 현재 중국 산시성 성도인 태원 지방인 진양(晉陽) 지역 지방관으로 나아갈 때 자기를 임명한 조간자 와의 대화 내용이다.

「이위 견사호 억 위 보장호」(以爲 繭絲乎 ? 抑 爲 保藏乎?) 내가 임지에 나가서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 듯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여 중앙정부에 보내리까? 아니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도록 지키고 키워가리까? 하니 조간자가 보장하라 이르니 그는 임지에 나가 첫 번째 한일이 호구 수를 줄이며 구휼(救恤)에 노력하는 중 나라에 난리가 났을 때 이다.

 

피난길을 찾던 중 성곽이 잘 정비된 곳도, 창고에 양곡이 그득한 곳이 아닌, 윤탁이 민심을 잘 다스린 진양으로 피난 한 후 돌아온 왕은 그동안 정사를 소홀이 하였던 지난날을 후회하고 나라를 바르게 이끌었다한다.05

 

05 司馬光, 『通鑑節要』, 少微通鑑節要卷之一, 周紀 威熱王在位二十四年 篇

 

 

(3) 뽕나무 뿌리로 둥지를 틀었다면 (桑土補巢)

 

『시경(時經)』 빈풍(豳風) 치효(鴟鴞)편에 나오는 이야기의 내용은 “올빼미야 올빼미야. 내 자식을 뺏었거든 내 둥우리는 헐지마라. 알뜰살뜰 길러낸 내 자식이 불쌍하다. 하늘 흐려 비오기전 뽕 뿌리를 벗겨다가 창과 문을 엮었거나 늘 아래 사람들이 처다보며 얕보다니 이 어찌된 일인가.”라는 시는 주공(周公)이 어린조카를 성심껏 도왔으나 동생들이 배신하고 난을 일으켜 이를 평정하였는데도 왕이 아직도 의심을 풀지 않고 있음을 한탄한 노래의 한 구절이라 한다.06

 

뽕나무 뿌리는 습기를 막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어 유비무환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둥지 속의 새끼를 올빼미가 와서 잡아먹었다. 장맛비가 오기 전에 뽕나무 뿌리로 출입구를 막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자탄하지만 남을 원망하기보다 스스로 대비안 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구절로 어려움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보다 미리 대비하자는 내용이다.07

 

06 이원섭 역해, 『시경』, 현암사, 1967.
07 정민, 「정민의 세설신어(世說新語)」 90, 『조선일보』, 2011, 1월 19일자.

 

(4) 두터운 비단옷 제견( 絹)으로 적국을 정복하다

 

제(齊)나라 임금 환공(桓公)이 이웃 나라 노량(魯梁)을 침공하려 준비 할 때이다.

그때 신하 관중(管仲)이 아뢰기를 “공께서 먼저 두꺼운 비단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그리고 모든 신하들도 입게 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백성들이 따라 입게 될 것입니다.”

 

“제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제견을 입으라는 관중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제견은 노량의 특산품이 아니던가?” 하고 의심하였으나 그의 말대로 노량의 장사꾼을 불러 “제견 1천벌을 가져오면 황금 3백근을 줄 것이며 제견의 수요가 많아 질 테니 그리 알게.”하였다.

 

그 후 노량 사람들은 온 나라가 농사를 포기한 채 제견 생산에만 열중하자 이제 되었으니, 제견을 벗고 얇은 옷을 다시 입으시고 노량과의 교역을 끊으십시오. 하였더니 노량나라의 곡식 값이 노나라에 비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니 온 나라가 굶주리게 되었는데 창고에는 제견만 가득 쌓이니 3년째 되던 해에 노량의 임금이 직접 와서 항복했다 한다.

 

이 말은 『관자(管子)』에 나오는 우화 같은 말이지만 우리나라의 잠업도 수출주종 품목으로 각광을 받으며 성장하다 중국의 덤핑에 밀려 허망하게 끝난 1980년대가 생각난다. 그때 우리나라는 녹색혁명이란 ‘통일볍씨’가 공급된 이후라 모든 곡물이 수요량에 부족하지만 아직도 주곡인 쌀만은 자급이 가능하여 다행이다. 08

 

08 정민, 「정민의 세설신어(世說新語)」 128, 『조선일보』, 2011, 0월 21일자.

 

(5)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의미하는 뜻

 

이 말은 당나라 시인 유정지(劉廷芝. 651~608)의 백발의 노인을 대신하여 읊은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이란 장시에 나오는 말로 중국에서는 창상지변(滄桑之變)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상전벽해라고 한다. 백발을 슬퍼하는 노인의 심경을 대신하는 구절이다.

원문에 있는 구절을 소개하면 갱문상전변성해(更聞桑田變成海) 로 “상전이 벽해가 되고”, “벽해가 상전이 된다”고도 하고 “ 벽해가 상전이 되고”, “상전이 벽해가 된다”한다는 뜻으로 세월의 덧없이 흐름을 이르기도 하고 급변하는 환경 변화를 나타낸다.

 

상마지교(桑麻之交) 란 뽕나무와 마의 사귐이란 뜻으로 어느 곳에서나 흔하게 심겨져 있는 작물과 같이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 간의 사귐을 뜻하는 말로 두보의 시 『기설삼랑증거』에 나온다.

 

상봉지지(桑蓬之志) 란 상호봉시(桑弧蓬矢)의 약자로 고대 중국에서는 아들을 낳으면 뽕나무로 만든 화살로 쑥으로 만든 화살을 천지사방에 쏘아서 큰 뜻을 이루기를 기원하는 풍습을 인용하여 남자의 큰 뜻을 펴가라는 『예기』에 나오는 말이다.

 

상중지희(桑中之喜)란 말은 시경(詩經) 용풍(鄘風)편 만나자고 한 곳은 상중(桑中) 이고요 라는 시에 나오는 이 말은 위(衛)나라 때 궁중과 귀족의 음란함을 표현한 시라고 해석한 주해도 있다.09

 

남녀유별이 철칙이던 시절 남녀가 만날 수 있는 기회란 뽕을 딸 때가 가장 자연스럽게 보일 유일한 기회이다. 우리나라 말에도 “임도 보고 뽕도 딴다.”는 말이 있다. 시는 3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장에 나오는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풀을 뜯는다{采采唐矣). 매란 마을에서(沬之鄕矣).

누구를 생각하는가(云雖芝思). 아름다운 맹강 이로다(美孟姜矣).
나와 뽕밭 속에서 약속 하고(期我乎桑中). 나를 다락으로 맞아들여(要我乎上宮).

나를 강물 위에서 보내준다(頌我淇之上矣).”

 

어느 마을 근처로 아름다운 남의 아내를 뽕밭에서 만나기로 하고 풀을 베러 간 한 남자를 그녀는 높은 다락방으로 데려갔다가 그 남자를 냇가까지 바래다준다는 이야기다. 이 시에 나오는 뽕밭과 다락집과 강물을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으로 남녀의 불륜 관계나 밀통, 밀약 등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제목이 뽕으로 시작된 영화가 시리즈로 계속 방영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고 본다.

 

이처럼 상자가 들어간 사자성어는 상간복상(桑間濮上) 상두주무(桑杜綢繆)라는 사자성어가 더 있으나 상간복상은 상간이란 지명의 유래이며 상두주무는 이미 설명한 상두보소(桑土補巢)와 같은 뜻이다.

杜자와 土자가 같은 뿌리라는 뜻으로 두로 발음하나 뒤에 나오는 土는 흙토와 뿌리 두로 같이 발음하는 글자임을 참고하여야 한다.10

 

09 이원섭 역해, 『시경』, 현암사, 1967.
10 장기근 역해, 『사자성어』, 명문당, 2010.

 

(6) 우리의 땅 독도 잠식(蠶食)을 막으려면

 

누에가 마지막 잠을 자고 한 밥 때가 되어 뽕을 주고 돌아서 나오면 누에가 뽕 먹는 소리가 마치 소나기가 내리는 것 같이 들린다. 이처럼 누에 한 마리로는 별것이 아니지만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뽕을 먹을 때 나는 소리는 대단하다.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듯 한쪽에서 예고나 소식도 없이 국가의 영토나 개인의 재산을 서서히 먹어 들어가는 것을 잠식이라 한다.

 

이 말의 어원은 벼 잎 끝을 벌레가 갉아먹기 시작하여 왼 볏 잎을 다 갉아 먹는다는 뜻의 중국 속담 초잠식지(稍蠶食之)에서 나온 말이다. 일본 정부가 교과서 검정을 통하여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가르치는 것은 선전포고 없이 소리 없는 전쟁을 통하여 자기 내 영토 확장을 위한 고도의 계책이다.

필자는 박물관을 견학하러 오는 학생들에게 누에게 뽕 먹는 그림을 설명하며 이 광경을 한문으로 하면 잠식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은 영어공부도 잘해야 하지만 나라를 지켜가려면 한문도 함께 익혀야 잠식이란 뜻을 알고 나라도 개인도 지켜 갈 수 있다고 이르곤 하였다.

 

이외에 잠사모우(蠶絲毛牛)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명주실과 소의 털이 엉클어진 모습을 표현한 뜻으로 매우 어수선함을 비유하는 말도 있다.11

 

11 장기근 역해, 『사자성어』, 명문당, 2010.

 

 

김재홍 | 한국잠사박물관장

 

 

출처 :

『충북의 민속문화. 06. 뽕나무와 누에가 충북에 남긴 흔적들』

상기 원본에서 일부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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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祖馬鳴大士

 

大士,波羅奈國人。謁十一祖,問曰:「我欲識佛,何者即是?」祖曰:「汝欲識佛,不識者是。」答曰:「佛既不識,焉知是乎?」祖曰:「既不識佛,焉知不是?」大士豁然省悟。祖為剃度,乃曰:「此人昔為毗舍利國王,運其神力,分身為蠶,國人得衣。後生中印土,馬人悲戀,因號馬鳴。如來記曰:『吾滅後六百年,當有賢者,度人無量,繼吾傳化』,今正是時。」遂付以法。後得迦毗摩羅,即入龍奮迅三昧,挺身空中,如日輪相,然後示滅。

 

 

贊曰

宿運神力 與裸者衣 

何者是佛   如菜作齏

恁麼悟去 正眼難窺 

遠受記莂   栽眼上眉

 

 

或說偈曰 ◎宣公上人作

 

勇猛精進修善根 無量劫來度眾生

化蠶吐絲菩薩願 若馬悲鳴祖師風

傳佛心印弘大乘 續聖明燈演圓宗

西天東土齊瞻仰 虛空法界日當中

 

 

白話解

 

大士,波羅奈國人:十二祖馬鳴大士是波羅奈國人。謁十一祖,問曰:我欲識佛,何者即是?他去拜見十一祖,問說:「我想認識佛,什麼是佛呢?」

 

祖曰:汝欲識佛,不識者是。十一祖說:「你想認識佛,你不認識的就是。」因為你沒有識嘛!你想認識佛,可見你是還沒有認識呢!所以說汝欲識佛,不識者就是佛!

 

答曰:佛既不識,焉知是乎?馬鳴大士就回答:「佛,我又不認識,怎麼知道他是佛呢?」

 

祖曰:既不識佛,焉知不是?十一祖就說:「你不認識佛,你怎麼又知道他不是佛呢?」這都是機鋒轉語、打機鋒。這兩個人辯論,你既然不認識佛,你又怎麼知道不是佛呢?

 

大士豁然省悟,祖為剃度,乃曰:大士,就是馬鳴菩薩;豁然,就是豁然貫通;省悟,就不是睡覺,是醒了。這樣子,十一祖就為他剃度,說了他過去生的因緣──

 

此人昔為毗舍利國王,運其神力,分身為蠶,國人得衣:這個人以前是毗舍利的國王,這個國家分上、中、下三類人,上類的人身上有光明,衣服、飲食自然應念而生;中類的人身上就沒有光明,衣服、飲食必須要求取才能得到;而最下類的人,沒有衣服穿,就好像馬裸露一樣。這個國王悲憫這類人,就用神通變化的願力,把他的身體分開變為很多蠶。因為他變了很多蠶子,蠶吐了很多絲,所以大家都有衣服穿了。

 

後生中印土,馬人悲戀,因號馬鳴:因為這樣的功德,所以就生到中印度。當他捨離毗舍利國時,那些馬人都感念他的恩德,對他戀戀不捨,全都悲鳴起來,所以得了「馬鳴」這個稱號(註1)。他大約也常常作馬鳴,像馬哭的樣子,來度化馬類的眾生,因此號稱「馬鳴菩薩」。總之,他這個名號是怎麼來的,並不重要的,怎麼說怎麼合理就可以了。

 

如來記曰:吾滅後六百年,當有賢者,度人無量,繼吾傳化。佛以前曾授過記,說:「我滅度後六百年,將會有聖賢出世,度人很多,他是傳佛心印的一個人。」

 

今正是時,遂付以法:這是十一祖說的,說:「現在正是這個時候。」於是就傳給他心印的法(註2)。

 

後得迦毗摩羅,即入龍奮迅三昧,挺身空中,如日輪相,然後示滅:後來馬鳴大士又傳法給迦毗摩羅尊者,就立即入龍奮迅三昧的定,踴身虛空如同太陽,然後就圓寂,入涅槃了。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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