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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국제거상 임상옥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테오리아2 2016. 1. 8.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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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재물은 물처럼 공평하게 사람은 저울처럼 올바르게

 

국제거상 임상옥 

 

▲ 임상옥 이미지(상상화)

 

“한 번 태어나면 한 번 꼭 죽는다. 삶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엄숙한 환희이며 가혹한 형벌임을 알고 상도를 가라. 큰 장사에서는 마땅히 걸어야 할 상인의 도가 있다. 이를 깨닫는 것은 저마다 절차탁마하기에 달렸다. 부닥치는 시비와 크고 작은 흥망성쇠는 상도에 따라서 천변만화한다. 그 길을 올바로 파악하면 사업은 순조로울 것이고, 상도를 잃으면 그의 사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조선 근세 최고의 거상이자 시인이었던 임상옥의 이 말이야말로 오늘날 모든 경제인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진리이다. 임상옥은 의주·연경·한양 3000리를 조선 상술로 쥐락펴락한 천하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인물이었다. 그는 인삼무역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는 조선 끝 무렵의 대표적 국제무역가였으며 인삼무역으로써 자본가로 우뚝 섰다.

 

임상옥은 용모가 단정하며 늘 스스로를 낮추고 남을 받들 줄 알았으며 신의가 깊었다. 무엇보다 말재주가 좋았는데, 남과 사귈 때면 부드럽고 활발한 말씨로 응하는 소질이 남달랐다. 이런 성품으로 그 시대 명사들과 교유하며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비록 상대의 나이가 한참 어릴지라도 반드시 해서로 정갈하게 써서 정성 들여 봉하고 아무리 급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림에도 자상해 집물관리는 정돈제일주의를 지향했으니, 치부책이 정연해 전혀 차질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한낱 장사치가 아닌 어엿한 사대부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공익과 사사로운 은혜를 위해 많은 재물을 흔쾌히 내놓은 자선가이기도 했다.

 

임상옥은 1779년(정조 3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가난한 만상(灣商) 임봉핵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장사꾼이었던 그의 집안은 평안도 안주에서 증조부 때는 용만으로 이사를 했으니, 4대째 의주 상인 노릇을 한 셈이다. 의주는 조선시대 국제무역의 근거지였다. 때문에 의주 상인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 발로 연경 장삿길을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만주어나 중국어를 배워야 했고 그들의 풍속을 알아야 했다.

임상옥은 열일곱 살 때까지 아버지의 연경사행(燕京使行)을 따라다니며 장사를 배우는 한편 서당에서 글을 읽었다. 개구리도 올챙이 시절이 있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책문을 드나들며 북경(베이징) 장사꾼들의 은어와 시세 변동을 익히고, 세태 만상과 인정 기미를 맛보며 다녔다. 열여덟 살이 되자 그는 인삼을 짊어지고 2000리 장삿길을 밟아 연경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워낙 빈곤해 풍찬노숙 등 온갖 고생을 겪어야만 했다.

 

임상옥이 스물여덟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렵사리 장례는 치렀으나 아버지가 진 빚 수천 금을 떠안게 되었다. 그는 상주의 몸으로 다시 수천 리 연경 장삿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상복의 젊은 상인’은 눈물을 삼키며 압록강 험한 물을 수없이 건넜다. 인삼 보따리를 챙겨 국경선을 넘는 연경 사행길의 말꾼 생활은 너무나도 고달팠다. 그는 중국 상인들을 대하며 견문을 넓히고 장사 눈치를 배워갔다.

그러나 보따리 장사로는 큰돈을 모을 수는 없었다. 임상옥은 곰곰이 생각했다. ‘중국에서 귀한 약재로 인정받는 조선인삼교역권을 손에 넣는다면….’

 

임상옥이 큰 성공을 거둔 원인은 그의 상술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의 배후에 정권의 뒷받침이 있었음도 잊어선 안 된다. 순조 때의 세도가 박종경과의 밀접한 관계가 임상옥 사업에 날개를 달아주었던 것이다. 그 무렵 조선의 재화는 인삼 교역권에 얹혀 있었다. 임상옥은 전 재산을 뚝 잘라 몇천 냥을 꾸려 한양으로 올라왔다. 세도 있는 대감의 줄을 잡기 위해서였다.

마침 총융사(摠戎使) 박종경이 부모상을 당했다. 박종경은 임금의 외삼촌이었다. 그런 집안에 부모상이 났으니 전국이 들썩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박종경 집에는 팔도 벼슬아치·거부·사또들이 다투어 얼굴을 내밀고 몇백 냥씩 부의금을 보내왔다. 소식을 들은 임상옥도 5000냥짜리 어음을 들고 부랴부랴 찾아갔다. 평안도 의주 장사꾼쯤은 명함도 못 내밀 형세였으나 그는 눈 깜짝 않고 박종경 대감에게 5000냥을 바쳐 올렸다.

 

“임상옥?”

 

방명록을 정리하던 박종경은 깜짝 놀랐다.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박종경은 상을 치르고 난 며칠 뒤 임상옥을 불러오게 했다.

 

“나는 요새 속이 거북하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과식이라도….”

 

“그게 아니야. 난 서울 장안의 군권과 치안을 맡고 있는 총융사 벼슬을 하고 있네. 그런데 하루에 남대문으로 사람이 몇이나 드나드는지 그걸 모르겠어. 답답해서 주위에 물어봐도 누구는 2000명이라 하고 누구는 7000명이 넘을 거라 하고…. 임 서방, 자네는 몇 명이나 되는지 알겠나?”

 

박종경이 임상옥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말했다.

 

“두 사람입니다. 하루에 남대문으로 2000명이 들어오건 7000명이 들어오건 그 가운데는 대감에게 이롭거나 해가 될 사람이 섞여 있을 뿐입니다. 이도, 해도 주지 못할 사람이라면 대감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맞네 맞아.”

 

임상옥이 진면목을 보인 것은 바로 그 순간적 기지와 담략과 판단력이었다. 그 뒤부터 박종경은 임상옥을 굳게 믿어 인삼 교역권을 맡겨 크게 성공하도록 보호해 주었다.

 

예부터 우리나라 인삼은 만고명약으로 우수한 품질이 널리 알려져 중국 상인들의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 인삼을 먹지 않으면 장수하지 못한다는 관념이 머릿속에 박혀 있을 정도였다. 장지연의 ‘위암문고(韋庵文稿)’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처음 개성 쪽에서 삼포가 생겼으니 그것이 이른바 송삼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을 그냥 백삼인 채로 보따리에 싸 가지고 북경으로 가 팔았는데, 중국 부자들이 그것을 먹어보니 때때로 위를 역하게 했다. 그래서 그 뒤로는 독이 있다고 해서 잘 먹지 않았다. 그러다가 송도 사람 하나가 백삼을 쪄 홍삼으로 만드는 법을 알아내니 그 뒤부터 인삼을 홍삼으로 만들어 수출했다. 백삼으로 내다팔 때보다 이익이 10배나 남았다. 이것이 홍삼이 생겨난 기원이다. 백삼으로 내다팔 때보다 인삼이 상하거나 썩는 일도 적었고 부자들도 먹고 나서 배가 아프다는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 홍삼을 사행 따라다니는 역관들이 독차지해 부당한 이익을 꾀했으나 뒤에는 나라에서 홍삼 수출을 전담하니 실로 무궁무진한 조선의 재원이 아닐 수 없다.’

 

팔포(八包)는 중국에 가는 사신이 여비로 쓰기 위해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한 인삼 여덟 꾸러미를 말한다. 사신들이 이것을 중국에서 팔아 여비로 쓰면서 자연스레 팔포무역이 이루어졌는데 그 거래량은 조선 끝 무렵으로 내려올수록 늘어났다.

 

본디 사신은 한 사람당 인삼 10근씩을 가져가 팔아서 노자로 쓰도록 했다. 이는 명나라 말에 이르러 80근으로 더해졌고, 1644년(인조 22년)에는 은자 50냥으로 바뀌었다가 1653년(효종 4년)에 다시 인삼 80근으로 고쳐졌다. 그러나 1682년(숙종 8년)에 폐단을 들어 인삼 대신 은자를 허용하되 인삼 근당 은자 25냥으로 환산해 80근에 2000냥으로 하고, 정사(正使)와 당상관은 1000냥을 더 가져가도록 했다.

그 뒤 정조 끝 무렵에 포삼(包蔘) 100근으로 늘어났으며, 다시 순조 때에 8000근, 헌종 때에는 무려 4만 근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수치일 뿐, 사신단을 따라가는 상인들에 의한 밀거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청나라에 갈 일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삼이든 은자든 되도록 많이 숨겨 가져가 팔아치웠다. 국경에서 검문을 한들, 몇 푼 쥐여주면 통과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이 공공연한 밀무역은 법의 힘으로도 어쩔 수가 없었다.

 

 

▲ 중국으로 떠나는 의주의 만상(灣商).

 

 

해마다 엄청난 인삼과 은자가 나라 밖으로 흘러나가 정작 국내에서 쓸 것이 모자라는 지경에 이르자 마침내 조정에서도 사태를 깨달았다. 1810년(순조 10년) 조정은 임상옥을 비롯해 홍득주 등 의주 장사꾼 여섯 사람에게만 대청(對淸) 인삼 교역권을 허가하면서 세금을 매기기에 이른다.

그 무렵 국가 비축 은자는 총 42만냥이었는데 임상옥 등 인삼 무역액이 은자 100만냥이 넘으니, 나라 재정은 거상 임상옥이 몽땅 손 안에 움켜쥐고 흔든 셈이었다. 박종경 대감을 한 번이라도 만나기 위해 거금 5000냥을 아낌없이 내놓은 임상옥의 배짱과 선견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즈음 조선 상권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내상(萊商),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상(京商), 개성 중심 한 송상(松商), 의주 중심 만상(灣商)이 있었다. 30대에 거상이 된 임상옥은 만상의 우두머리가 된다. 인삼 무역 특권을 쥔 만상들은 인삼 무역에만 국한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특권적 상행위는 자유로운 국제적 상거래를 이루었다. 바로 근대자본주의적 무역이 비롯된 것이며, 이처럼 뚜렷한 변화의 중심에는 임상옥 같은 천재적 거상의 공적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임상옥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사람을 보는 관찰력이 뛰어나 상대의 심리 변화와 인품에 대한 가치를 쉽사리 판단하는 놀라운 투시력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눈앞에 큰 불행이 닥칠 때마다 쉽사리 피할 수 있었으며 미리 막을 수도 있었다. 그는 시대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있었지만 급진사상가나 혁명가는 아니었다.

한때 대혁명아 홍경래가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부자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홍경래는 임상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에, 과객으로 가장하고 그를 찾아갔다. 사랑방에서 며칠 묵다가 어느 날 넌지시 말을 걸었다.

 

“소생은 임 상공의 서사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임상옥은 홍경래의 얼굴을 살피더니 단박에 거절했다.

 

“선생은 우리 같은 장사꾼의 서사 노릇으로는 알맞지 않소. 너무 그릇이 크구려.”

 

뒷날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자 관서지방의 많은 부호들이 자금을 대거나 병력을 모집해 그에 합세했다. 그래도 임상옥은 홍경래 측의 손길을 끝내 뿌리치고 그에 말려들지 않도록 집안을 엄히 단속했으며, 난을 진압하려는 정부군과 민병들에 합류, 전쟁의 화마에서 고을을 지켜내는 공을 세웠다. 임상옥은 장사에 있어서는 결단력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굳이 시대흐름을 거스르는 큰 모험은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조선 제일 거상의 자리를 지킨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일찌감치 박종경이라는 조정의 실세를 뒤에 업고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오랜 세월 차별받아 울분이 쌓인 평안도 민중과는 이해관계가 많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한번은 전라도 전주 감영의 어느 이방이 먼 길을 걸어 임상옥을 찾아왔다. 그는 공금을 멋대로 쓰다가 적발되어 목숨이 위태롭게 된 판이었다. 임상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는 당돌하게도 5만냥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다. 임상옥은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한양에서 환전 조치를 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이방이 돌아간 뒤 곁에 있던 사서가 까닭이 궁금해 물었다.

 

“그 사람 얼굴에 살기가 등등하더군. 거절했으면 나도 죽고 그 사람도 죽었겠지. 그러나 내가 5만냥을 내놓으니 나도 살고 그 사람도 살았네.”

 

과연 사람을 시켜 그의 뒤를 캐보니, 만일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임상옥을 살해하려고 품속에 비수를 감추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의 사람 살피는 솜씨가 얼마나 명철하며 도량 또한 얼마나 넓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임상옥은 30대 후반 젊은 나이에 조선팔도를 주름잡는 큰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벼락부자인 그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 또한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의주 백마산성 삼봉산(三峰山) 아래 아버지 산소를 마련하고 이듬해 산소 아래쪽에 수백 칸짜리 집을 지었다. 그는 친척과 수하들까지 모두 모여 살 수 있는 엄청난 이상촌을 세우려고 했다. 공사 기간만 5년, 그러나 그 집은 뜻밖의 화를 불러왔다.

 

“장사꾼 주제에 너무 호사스러운 집을 짓는다!”

 

“나랏법에 분명히 어긋나는 처사다!”

 

한마디로 ‘천한 상인 주제에 집을 너무 크게 지어 돈으로 양반을 우롱했다’는 것이었다. 임상옥은 일가친척들을 한데 모으려 하니 그토록 커질 수밖에 없었으며, 집 크기가 법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소용없었다. 암행어사 출두로 집이 모조리 헐리고, 그는 옥살이까지 해야만 했다. 왕가가 아닌 여염집에서는 아무리 커도 99칸 이상은 지을 수 없었다. 대문 크기, 기둥 높이에도 엄격한 제한이 있었다. 임상옥이 그 법도를 몰랐을 리는 없다. 아마도 오랜 세월 가난과 빚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산소 밑에 위로와 자랑을 겸해 수십 호 기와집 마을을 새로 지었으리라.

 

임상옥은 집이 모두 헐리고 나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경우에도 군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르면 더 큰 화를 당하리라.’

 

그는 ‘가득 채움을 경계하는 잔’이란 뜻의 계영배(戒盈杯)를 평생 곁에 두고 솟구치는 과욕을 다스리며 큰돈을 만들어 갔다. 계영배는 잔 옆에 구멍이 있어 술이 어느 정도 차면 구멍으로 새어나와 과음을 못하게 하는 잔이다. 어느 날 임상옥은 조선 최고 거부가 되었다고 자만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계영배에는 아무리 술을 부어도 채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술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쾌락, 명예, 소유, 집착, 애욕을 모두 채우려 드는 사람은 곤경에 처하기 마련이다. 자만을 자책하고 가득함을 경계해야 한다.’

 

임상옥은 참으로 박물군자라 할 수 있을 만큼 어떤 물품이라도 정확히 감정할 수 있는 명석한 감식안을 지녔다. 어떤 사람이 남달리 큰 산삼을 가지고 와서 그에게 감정해 줄 것을 청했다. 임상옥은 산삼을 아침 햇빛에 자세히 살피더니 이윽고 말했다.

 

“이것은 경삼(驚蔘)이오.”

 

조마조마하게 임상옥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산삼 장수는 제 무릎을 탁 치며 그의 귀신 같은 감정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절간 우물가에서 캐어 온 경삼이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임상옥의 재산은 어마어마해 그의 사무실에서 부기를 맡아보는 사람만 70명이 넘었다. 또한 창고에는 온세상의 진귀한 보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하루는 미산(美山) 홍도정(洪都正)이라는 부자가 임상옥을 찾아왔다. 그는 중국에서 어렵사리 구한 산호지팡이를 자랑 삼아 짚고 왔다. 그런데 지팡이를 그만 잘못 짚어 뚝 부러지고 말았다. 고려청자만큼 귀하다는 산호지팡이가 동강나 버렸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런데 임상옥은 태연스레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홍도정 어른의 지팡이와 똑같은 것을 가져오너라.”

 

하인들이 산호지팡이 10개를 들고 오자 홍도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거듭 감사하며 마음에 드는 한 개를 짚고 돌아갔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함이다”

 

 

▲ 조선 말기 보부상들

 

의주부사의 옥로(玉鷺)가 깨지는 바람에 의주 이방이 임상옥을 찾아온 일도 있었다. 사또가 행차할 때 갓에 달지 않으면 권위가 서지 않는 귀한 물건이었다. 임상옥은 곧바로 옥로 수백 개를 내와서 적당한 것을 골라 가져가도록 했다. “과연 임 상공은 천하의 거상이구려!” 이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임상옥을 온갖 말로 칭찬했다.

 

임상옥의 집에 원접사(遠接使)와 평안감사, 의주부사가 한꺼번에 들이닥친 일도 있었다. 그 일행이 자그마치 700명이 넘었다. 이때 임상옥은 한 사람 앞에 한 상씩 차려주었다. 음식도 음식이려니와 밥상과 밥그릇, 수저 등등 기구 모두가 놀라울 만큼 갖추어져 있었음은 그의 엄청난 부를 엿볼 수 있는 한 예였다.

 

임상옥이 여느 때처럼 사신 일행을 따라 인삼을 가지고 북경에 가니, 북경 상인들의 태도가 예전과는 달랐다.

 

“인삼 한 묶음에 얼마요?”

“은자 500냥은 받아야겠소.”

 

“너무 비싸오. 200냥이 아니면 안 사겠소.”

 

그들은 불매동맹을 맺은 것이다. 조선인삼이 명약임은 틀림없지만 그만큼 값이 비싸 북경 상인들에겐 큰 부담이기도 했다. 상인들이 한통속이 되어 구입을 하지 않는다면 조선 임상옥의 인삼은 나중에는 200냥이 아니라 50냥 헐값에라도 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귀국길에 오를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천하의 임상옥도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사신단에는 천하명필 추사 김정희가 있었는데, 임상옥은 그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김정희는 종이를 한 장 꺼내더니 이렇게 썼다.

 

‘百尺竿頭進一步(백척간두진일보)’.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다다라 또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뜻이다. 김정희는 말했다.

 

“조급해 하지 말게. 저들이 강수를 쓴다 해도 자네가 한 발 더 나가 과감히 큰 수를 내면 위기를 벗어날 길이 열리지 않겠는가.”

 

임상옥은 문득 깨닫고 한 가지 꾀를 냈다. 그는 여비로 남겨둔 은자 4000냥을 가지고 종자들과 함께 북경에서 가장 번화한 청루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마냥 술을 마셨다. 상인들은 코웃음을 쳤다.

 

“제아무리 조선 거상 임상옥이지만 이번에는 안 될 걸.”

 

드디어 돌아갈 날이 밝았다. 임상옥은 느닷없이 노한 얼굴로 종자들에게 명했다.

 

“인삼을 마당에다 쌓아 놓고 모조리 불을 질러라!”

 

종자들은 그 노기에 질려 시키는 대로 인삼 바리를 모두 꺼내 놓아 불을 붙였다. 하나둘 구경꾼이 모여들고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동정을 염탐하던 중국 상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임상옥의 인삼을 못 사면 올 한 해 동안 중국엔 인삼이 없다.’

 

중국 상인이 모조리 달려들어 연기와 불길에 휩싸인 인삼 포대를 끌어내기에 바빴다. 인삼은 곧 제값을 찾았다. 그러나 그쯤에서 물러설 임상옥이 아니었다.

 

“영약(靈藥)을 천대하는 눈 어두운 사람들에겐 굳이 권하지 않겠소. 내 차라리 모두 불사르고 돌아감이 우리 조선 영토(靈土)를 욕되지 않게 하는 길이오.”

 

임상옥은 불길 속에서 꺼내 놓은 인삼 포대에 다시 불씨를 던지려 했다. 그러자 상인들이 그를 붙잡고 애원했다.

 

“임 대인, 우리가 잘못했소. 용서해 주시오.”

“값은 얼마든지 내리다! 제발 불이나 끄시오.”

 

인삼은 그 자리에서 제값의 10배나 껑충 뛰었다. 방금 전까지 불매운동이니 기세가 등등하던 북경 상인들은 이제는 도리어 값을 따지지 않고 다투어 집어갔다.

청국 상인의 계략으로 역경에 빠진 임상옥은 그 위기를 바꾸어 단번에 몇백만금을 횡재하게 되었다. 임상옥은 은괴와 비단 등을 산더미같이 바리바리 싣고 금의환향했다.

 

깜짝 놀라는 어머니에게, 은괴를 쌓으면 마이산(馬耳山)만 하고 비단을 쌓으면 남문루(南門樓)만 하다고 말했다. 사실 임상옥이 그때 태운 것은 이런 일을 대비해 미리 가져갔던 도라지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천하 거상이 되자 임상옥의 사랑방에는 돈 빌리러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하루는 낯선 세 사람이 찾아와 장사 밑천을 부탁했다. 임상옥은 그들에게 저마다 한 냥씩 내주며 시험해 보았다.

 

“이 한 냥으로 재주껏 이윤을 남겨보시오. 닷새 뒤에 봅시다.”

 

닷새 뒤에 세 사람이 돌아왔다. 첫 번째 사람이 말했다.

 

“한 냥으로 짚을 사서 짚신 다섯 켤레를 삼아 날마다 장에 가서 팔았더니, 하루에 한 푼씩 남아 다섯 푼을 가져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다. “한 냥으로 대나무와 창호지를 사다가 종이 연을 만들었더니, 마침 섣달 대목이라 금방 다 팔렸지요. 본전 한 냥을 제하고도 한 냥의 이문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까짓 한 냥으로 무슨 장사입니까. 9푼으로 술을 사 마시고 남은 한 푼으로는 백지 한 장을 사서 의주부윤 나리께 편지를 썼죠. 내가 절간에 가서 사서오경을 읽으려 하니 그동안 쓸 생활비 좀 달라고요. 그랬더니 의주부윤께서 열 냥을 주시더군요.”

 

허풍일지도 모르지만 임상옥은 웃었다. 그는 장사 솜씨를 평했다.

 

“짚신을 만들어 판 손님은 장사보다는 농사가 더 맞을 것 같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건 농사꾼 철학이오. 그리하면 큰돈을 벌지는 못합니다. 연을 만들어 판 양반은 때를 잘 살필 줄은 알지만 눈앞의 이익에 얽매이는구려. 그렇게 현상(現狀)만을 좇다가는 제 꾀에 넘어갈지 모르오. 큰 장사꾼은 비가 오거나 말거나 우산과 나막신을 만드는 사람이라오.”

 

임상옥은 짚신 만든 사람에게 100냥, 연 만든 사람에게 200냥을 내주어 보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에게 말했다.

 

“편지 한 장으로 한 냥을 열 냥으로 만들었다니 뜻이 커서 좋소!”

 

그러고는 제대로 장사를 해보라며 서슴없이 1000냥을 꺼내 주고 1년 뒤 다시 만나기로 했다. 1년 뒤에 그 사람이 찾아와 말했다.

 

“평양에서 장사를 할까 하다가 그만 한 기생을 만나 홀딱 빠졌습니다. 덕분에 한 달도 못 되어 1000냥을 몽땅 날려버렸지요.”

 

 

▲ 2001년에 방영된 임상옥(이재룡 분)을 주인공으로 한 TV드라마 ‘상도’의 한 장면.

 

 

아무리 봐도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임상옥은 그에게서 남보다 큰 손자국을 보았다. 사나운 말이 길들면 명마가 되지 않는가. 임상옥은 또 2000냥을 내주며 1년 뒤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그런데 약속날짜에 그 사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임상옥도 버린 셈치고 이 일을 깨끗이 잊어버렸다. 그런데 6년 뒤 그 사나이가 인삼 열 달구지를 끌고 껄껄 웃으며 나타났다. 자그마치 10만냥어치였다.

 

“2000냥으로 진탕 놀다 보니 손에 남은 건 100냥뿐이더군요. 그걸 가지고 뭘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인삼씨를 한 자루 사서 태백산 첩첩산중에 골고루 뿌렸지요. 6년 뒤에 가보니 이렇게 많은 인삼이 자랐지 뭡니까. 이제 대인께서 몽땅 사 주시면 됩니다.”

 

임상옥은 그 사나이의 기개에 크게 만족했다.

 

“내 제값을 쳐줄 테니 돈은 자네가 다 가져가게!”

“안 될 말씀입니다. 임 대인의 돈으로 이런 장사를 한 것이니 반씩 나누어 갖지요.”

 

그는 끝내 거절하고는 인삼 대금 10만냥을 반으로 뚝 갈라 5만냥만 들고 사라졌다. 임상옥은 아랫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사꾼이라면 최소한 5년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하지. 저 사나이는 조급함을 버리고 좀 더 큰 것을 꿈꾸었네. 누구든 먼 앞을 내다보고 꿈을 크게 가지면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네.”

 

북경 장삿길을 앞둔 어느 날 임상옥은 전에 함께 갔던 장사꾼을 불러 이번에도 같이 가자며 권했다. 그 장사꾼은 병이 났다면서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앞서 북경에서 한 청나라 상인에게 큰돈을 빌렸다가 도둑에게 몽땅 털린 일이 있었다. 임상옥은 그가 청나라 상인의 돈을 갚지 않으려 꼼수를 쓰는 걸 눈치채고는 벌컥 소리쳤다.

 

“참으로 배은망덕하구먼. 몸이 아파 못 간다면 누구를 대신 보내서라도 돈을 갚아야 할 게 아닌가!”

“뭘 그리 역정을 내십니까. 혹 그 상인이 제 안부를 묻거든 큰병을 앓다 죽었다고 하면 그만이지요.”

 

그 뻔뻔한 태도에 임상옥은 다시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며 불같이 화를 내고 장사치를 쫓아냈다. 북경에 도착한 임상옥이 장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에 그 청나라 상인이 찾아왔다.

 

“그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아까운 인재를 잃었구려. 우리 풍습에는 누가 눈에 들면 밑천을 대줄 뿐더러 실패해서 본전을 날려도 세 번까지는 봐주는 법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그러면서 그 가족에게 전해 달라며 은자 한 움큼까지 건네는 게 아닌가. 눈물까지 글썽이는 상인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어 죄책감이 들었다. 임상옥은 참으로 난처했으나 말없이 은자 주머니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북경에서 일을 마친 그는 신의 없는 장사꾼에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압록강을 건넜다. 불벼락을 내리리라 벼르며 단숨에 그의 집으로 갔는데, 뜻밖에도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닌가!

그의 아들이 말하기를, 임상옥이 떠난 뒤 장사꾼은 갑자기 큰 열병이 들어 온갖 약으로도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죽기 전 자신이 청나라 상인의 돈을 떼어먹은 일을 털어놓으며 신의를 지키지 못해 참으로 부끄럽다며 그 돈을 꼭 갚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임상옥은 말없이 은자 주머니를 그 아들에게 건네주고 물러나왔다. 그는 말 한마디의 무서움과 신용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임상옥은 늘 이렇게 강조했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함이다.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고, 따라서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다.”

 

임상옥은 일찍이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성을 지킨 공이 있으며 또 신사변무사(辛巳辨誣使)의 수행원으로 연경으로 들어간 공도 컸다. 이에 임상옥을 조정에서 오위장에 임명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1832년(순조 32년) 임상옥은 곽산 군수가 되었다. 1834년(순조 34년) 7월에 있었던 의주부의 수재로 민가의 피해가 1737호, 떠내려간 파수막(把守幕)이 45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16명, 파손된 집이 근 2000채에 이르렀다. 의주 백성들의 극심한 고통을 본 임상옥은 수만 석 곡식을 내놓아 수재민을 구제했다. 그는 그 공로로 헌종 원년 6월 구성(龜城) 부사에 오른다.

 

늘그막에는 사색에 잠기는 나날이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임상옥은 벼슬을 내던지고 뛰쳐나와 삼봉산 아래 칩거에 들어갔다.

 

오늘날까지 임상옥이 전설적 경영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조 최고의 부자이면서 상인 계급으로 부사라는 관직에 오른 점이 그를 전설적 인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인간 임상옥이 아닌 상도(商道) 임상옥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가 실천한 좌우명에 숨어 있다.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재물에 있어서는 물처럼 공평해야 하고, 사람에 있어서는 저울대처럼 바르고 정직하게 하라.’ 오늘의 재벌들이 경영의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임상옥은 부를 쌓는 데 천재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데에도 천재였다. 한꺼번에 수백 냥을 거두는 것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거니와 그 부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한쪽으로 동포를 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자손을 위해 영구한 계획을 세웠다.

재산의 사회 환원에도 적극적이어서 교량을 놓고 배를 만들어 교통을 편리하게 하고 자연재해가 닥칠 때마다 곡식을 풀어 백성의 주린 배를 채워 주었다. 많은 토지를 고스란히 물려주면 자손들이 온전히 보전하지 못한다 하여 궁토(宮土)로 만들어 상속하기도 했다. 길 가던 과객이나 걸인들이 하룻밤 묵기를 청하면 누구 하나 거절하지 않고 잘 대접해 보냈다.

 

조선왕조 500년 이른바 사대부 아닌 인물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은 실로 유교사상의 폐단이 아닐 수 없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맨 아래 천민으로 대했던 것이다. 한국 근대화에 선구적 역할을 한 임상옥의 국제무역인으로서의 활약상은 정사(正史)에 단 한 줄도 기록되지 못했다. 그의 자손들 또한 그가 국가와 사회에 끼친 자선적(慈善的) 업적은 미사여구로 늘어놓고도 정작 그의 본업인 무역 활동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며 숨겼다. 이는 임상옥의 인물 평가를 오직 관서의 사대부로 높이려 했던 결과가 아닌가. 그가 맡았던 오위장이나 군수·부사 벼슬은 그 무렵 차별받던 서북인과 고향 사람에게는 영예롭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임상옥이 수많은 백성을 구제했던 자선·공익사업들이 오히려 그의 인격을 빛나게 했다. 요컨대 관직이나 훈공 등이 모두 그의 사대부가 될 만한 자질을 증명하는 점에는 틀림없으나, 임상옥은 이른바 사대부를 뛰어넘은 조선 제일 거상이자 국제무역인이라는 데에 위인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조선 창조경영의 선구이며 부호였던 임상옥은 가정적으로는 결코 행복을 누렸다고 할 수 없다. 이미 50고개를 넘게 되자 그는 아무리 개인 능력이 크고 넓어도 양반 자손이 아닌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아우 둘을 잃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조차 일찍 죽어 무척 외로운 삶을 이어갔다.

임상옥은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며 만년을 보냈다. 그는 시재(詩才)도 괜찮았다. 가장 타산적인 상재를 가진 그가 그와는 정반대인 시재를 겸했다는 사실은 그의 고결한 인품을 설명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가 세상의 온갖 괴로운 일을 잊고 시 짓기에 몰두하게 된 것은 아마도 고독과 슬픔에서 이루어진 그의 자위적 정서의 일면이리라.

 

인간의 외로운 노경, 남 모르게 눈물을 흘려야 했던 거인. 그러나 인생이란 이 얼마나 황망한가. 그리하여 죽을 때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하는 시간의 연속이 아닌가.

 

절세의 상재(商才)요, 시운을 잘 탔던 임상옥은 1855년(철종 6년)에 의주 삼봉산 끝자락에서 일흔일곱 나이로 삶을 마친다.

 

오늘날 임상옥의 그 많은 재산은 흔적도 없이 간 곳 없고, 그가 지은 시 몇 줄만이 전해올 뿐이다.

 

 

三更官燭怯春寒 한밤 촛불은 차가운 봄날씨에 놀라 떠는데

經歲相逢話萬端 해를 넘겨 그대 만나니 할 말이 많으나

去後西州長短事 길고 짧던 세상일, 한번 서주로 가버린 뒤

永淸橋上月團團 영청교 다리 위로 달만 두둥실 떴네

 

 

고정일

194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0년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 수상. 1956년~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 1977~19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 저서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장진호’ ‘이중섭’ ‘매혹된 혼 최승희’ ‘폭풍 속에서’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 한국출판학술상 수상,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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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燭 : 公家供給、供官吏辦公用的蠟燭。

 

不燃官燭成語故事_成語“不燃官燭”的典故出處和主人公是誰?

【出處】《北堂書鈔》卷三十八引吳·謝承《後漢書》 東漢時期,有一個人叫巴隻,他曾任揚州刺史。 巴隻為官清廉,品格端方,從來不願意占公傢一點便宜,將公傢與私人的界限分得十分清楚。他當官時,從來不將妻室兒女接至任所。他的日常開支嚴格限制在自已的俸祿之內。他做官時,晚上若有私人的客人來訪。他寧願與客人坐在黑暗之中交談,也不點官傢一支蠟燭。 後人用此典形容地方官吏清正廉潔。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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