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론

수필은 만인(萬人)의 것 ▒

테오리아2 2014. 3. 22.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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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만인(萬人)의 것 ▒
  

  
    사랑이나, 미(美)나, 선(善)이나 덕(德)과 같은 정신적 재(財)는 많은 시간을 두고 노력하고 싸워서 얻어지는 재보(財寶)들이다.  이 재보의 최종의 결정자는 주관(主觀)이다.  생명(生命)의 작용으로서의 의식은 자아(自我)다.  우리의 의식은 자아가 절대의 주체다.
    문학은 주정적(主情的) 경험의 독백(표현)이다.  경험은 항상 주정적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수필은 '만인의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학문의 고하를 막론하고, 인품의 귀천을 막론하고, 사람에게는 생활해 가는 데 그 어떤 느낌을 가지게 마련이다.  이 느낌이나 생각을 글로 옮기면 수상이나 수필이 될 수 있겠다.  네 계절을 통하여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자기의 생각을 느낀대로, 생각한 대로 쓰는 글이 '수필의 생명'이다.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프랑크는 열 다섯, 열 여섯 살의 소녀였고,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쓴 이윤복 어린이도 불과 십 사오 세밖에 안 되는 가난한 소년이었다.  그들은 <문학론>이나 <수필론>을 읽고, 배운일이 전혀 없는 어린이들이다.  그런데, 왜 그들의 외침이 우리의 심금을 올리고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는가?
    좋은 글의 조건은 그리 높은 곳에 있지 않다.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흔한 괴로움이나 슬픔 등 그로하여금 가장 소중한 자기의 생활을 노래한 평범한 진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 어떤 생각이나, 그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한, 언제나 그 어떤 형태로서의 표현을 하지 않고서는 배겨나지 못한다.
    대화의 형태로, 혹은 문장으로, 어떤 기회가 닿을 때에 타인에게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이 때로는 절규도 되고, 때로는 호소로, 때로는 논쟁으로, 또는 설화로 표현되게 된다.
    그러나 문학적 표현으로서의 '수필'은 단순한 이지(理智)나 설명이나 논란이나 비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독자를 납득시키는 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수필은 '감동(evoke)'을 주는 글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수필의 어려움이 있다.
    '수필'은 누구든지 쓸 수 있는 글이다.  그러나 뛰어난 사람에 의해서만 씌어질 수 있다는 데 '수필'의 어려움이 있다.
    수필은 단순한 묘사로서만도 만족될 수 없고, 감정의 단순한 표현으로도 만족이 안 된다.  반성이나 추리나 비판도 같이 끼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수필에서는 작가의 깊은 사색(思索)의 그림자를 읽게 되고, 넓은 지식에 부딪치게 된다.

   경험을 말하는 것이 '문학'의 시작이다.  문학은 주정적 경험의 표현이다.  경험은 항상 주정적(主情的)이다.  '수필'은 장소에 따라, 생각에 따라, 자기의 생각을 느낀대로, 생각한 대로 쓰는 글이다.  이것이 '수필'의 생명이다.
    독일의 저명한 시인이며 소설가인 헤르만·헷세(H. Hesse)는 이렇게 자기의 창작태도를 말한 바 있다.
    "나는 문학을 고백이라고 풀이한다.  이런 풀이를 평범한 것이라고 비난받아도 나의 해답은 그것밖에 없다."
    요즘 서점가에서 <수필창작법>이나 <수필문학론>, <수필작법>같은 책들이 많이 팔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책들에는 한결같이 문장의 분류와 그에 따르는 감상, 해설, 문장표현의 효과적 방법, 쉼표, 마침표의 바른 사용법, 원고지 쓰는 법, 집필에 대한 경험이나 예문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물론 그런 것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부분적 정보들이다.
    초보자들을 위한 문장 지도는 문장을 제대로 못쓰는 상태, 썼다 해도 만족한 상태가 안 된 상태를 출발점으로 하고 시작해야 한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데까지 착실하게 접근해 나가는 방법이 새로운 <문장지도법>이다.
    나는 근년 6∼7년 사이에 성인수필 창작반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거기에서도 나는 항상 이런 권고를 한다.
    "이 세상에 벙어리가 아닌 이상, 생각을 남에게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건의 내용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을 골라서 상대방에게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만들어 써 보라.  그럴 때, 그것이 아직 '수필문학'은 될 수 없지만, '수필적'인 문장이 될 수 있다"
    '수필'은 자기의 이야기나 생각이 중심이 되는 글이다.  그래서 수필을 '자기현시(縣示)의 글'이니, '자조(自照)의 문학'이니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은 철두철미 개인에 예속될 물건이다.  일체의 예술은 모방이 아니라, 창조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예술작품은 그 작자 개인의 독창적 독자성의 산물이다.  그러기 때문에 수필창작에 어떠한 원칙, 어떠한 공식(公式)이 강요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개인은 개인의 유일성(唯一性) 때문에 개인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수필문학>이야말로 '만인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겪는 슬픔이나 기쁨이 그대로 문학이라 할 수 없다.  이러한 소재(素材)가 문학이 되려면, 과거의 기억심상(체험)과 어우러져서 어떠한 심리적인 특수한 경로를 거쳐야 한다.
    '무엇을 쓸 것인가?'는 문장의 출발점이다.  이것이 발견되지 않고서는 표현의 기술, 사건의 묘사, 문장의 구성법 등을 배운다해도 문장은 쓰여지지 않는다.
    수필가 이현복교수(인천교대)는 수필이 만인(萬人)의 것이면서도 어려운 문학, 고급의 문학이라는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필문학이 신변잡기가 아닌 문학이 되기 위해서도 그 무엇이 요청되는 데, 그것이 지성이요, 감성이다.  문학작품으로서의 수필은 형식의 자유로움과 주제의 심각성 사이에서 긴장감을 획득하는 데 있다.  이 주제의 심각성은 곧 격조 높은 지성과 감성에서 온다."
    원래 수필문학은 그 출발이 '만인의 문학'이면서도 그 단계는 지식인의 문학이었다.  시, 소설, 희곡 등이 대중을 상대로한 원시예술에서 출발하였다면, 수필문학은 학문적 축적이 있은 후에 나타난 문학이다.  왜냐 하면, 수필문학은 독자에게 천박한 즐거움을 주는 문학이 아니요, 의미있게 사고하도록 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알베레스(R. M. Alberes)가 "수필, 그 자체는 지성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 문학"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영국의 비평가이며 <영국산문문체론>을 쓴 하버드·리드(H. E. Read)도 "수필은 단순한 기성의 언어에 의한 건축물이 아니다.  시나 희곡처럼 탁마되고, 정선되어 이루어진 산물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 가지고 있는 언어에 의하여 이루어 지는 산문이 '수필'이다.  소설이나 희곡은 의도적이거나 조직적인 데 비하여, 수필은 자기 마음 속에 비치는 제재를 그대로 자기를 통하여 암시(暗示)하는 글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문단사에 70년대에 와서 수필이 분출되기 시작한 것은 '수필'이 갖는 특수성 때문에도 그 이유가 있겠지만, 70년대는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나 있을 때인 만큼, 시나 소설이 정치적 현실에 밀려, 삶의 의미를 제시하지 못할 즈음에 자기를 발견하고자 하는 몸부림은 '수필의 형태'를 빌어 분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대구, 부산, 광주, 마산, 진주, 목포, 전주 등지를 비롯하여 수필문학 동인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80년대 초 내가 조사한 것만으로도 창간호에서부터 3집 이상을 펴낸 동인지만도 전국에 240여 종에 달했다.  70년대는 문단사적으로 볼 때에 실로 '수필의 춘추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 수필전문지 월간 <수필문학>(김승우 주간)이 나와서 문단을 자극하고 많은 수필동인들을 발굴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오늘 우리 문단에서 수필이 차지하는 영역이 광역에 걸치는 구실을 하면서도 수필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 반성할 일이다.
     수필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로서는 그 요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 세 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째, 수필문학이 차지하는 영역이 너무 넓기 때문에
                좋은 수필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둘째, 지난 500년 동안 수필의 방법적 연구가 제대로
                시도 되지 않았다.
        셋째, 한국의 멋을 모르고 서양 모방에만 기울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수필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데 대하여 문학평론가 한상렬씨는 <수필 문학의 올바른 인식>(1943.3) 이란 소론에서, 첫째로 수필문학에 대한 개념정립의 미흡이요, 둘째로는 작가의식의 결여, 셋째로 수필문학에 대한 평가기준의 모호성과 본격적인 수필비평의 부재에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이상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쓰는 것이 수필의 시작이지만, 수필의 영역이 너무 넓고, 그 구성방법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을 하나의 사상으로 창출해 낼 효과를 가져오기 위하여 적절한 제한이나 상황을 가감하는 일은 여간한 노력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좋은 수필을 써 내기 어려운 점이 있다.

  
  


  

  ▒ 휴게실(3) ▒
  

▷ 수필(隨筆)은 이야기의 문장이다                                                      

·   수필은 구체적 사건을 다루는 글이다.
·   수필은 이야기의 구성에 있어서 사상의 위치는 사건에 의존하는 글이기 때문에 추상을 피     하고 구체적인 사건을 이야기에 의해 다루어 가게 된다.
·   수필은 자아(自我)를 통하여 또 다른 하나의 현실을 암시(暗示)해 주는 글이다.
·   생명의 작용으로서의 의식은 자아이다.  우리들의 의식은 자아가 절대의 주체다.

▷ 생활을 보는 눈

·   시인이나 수필가는 항상 생활을 중하게 여겨 보아야 한다.
·   시인은 학자가 아니다.  진리를 말하는 데도 감흥, 정서에 호소해야 한다.